베레모, 카키색 군복, 구레나룻, 깊은 눈동자
게바라는 과연 ‘이미지의 혁명가’에 불과할까
의대생 시절 모터사이클 미주 일주, 현실 목격
자신만의 신념 키운 다음 혁명의 길에 뛰어들어
쿠바에 핵미사일 배치하려한 소련도 과감히 비판
눈 밖에 나서 쿠바 떠났지만 이상 실현하려 노력
권력 즐기지도, 아부하지도 않고 신념대로 행동
샤르트르 ‘우리 시대 가장 이상적인 인간’ 칭송
10월 9일은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1928~1967)가 세상을 떠난 날이다. 올해로 50년이 됐다. 당시 남미 볼리비아의 산중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던 게바라는 10월 8일 산골 마을 라이게라에서 볼리비아군에 포로로 잡혔는데 재판도 없이 다음날 학교 건물에서 곧바로 총살당했다. 39세였다. 볼리비아 정부는 수염과 머리카락이 덥수룩한 그의 시신 사진을 이튿날 곧바로 공개했다. 게바라를 제거했다는 증거를 신속하게 제시한 셈이다. 그만큼 그의 존재가 위협적이라고 생각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난 게바라는 1956년 피델 카스트로 등과 함께 쿠바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결국 1958년 12월 친미 풀헨시오 바티스타 정권을 넘어뜨리고 이듬해 아메리카 대륙의 첫 공산 정권을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게바라는 여러 가지 이유로 1966년 아프리카 콩고를 거쳐 남미 볼리비아로 옮겼다. 게바라는 쿠데타로 집권한 볼리비아의 레네 바리엔토스 군사정권을 무너뜨리려고 47명으로 이뤄진 게릴라 부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불리한 상황 속에서 포로로 잡혀 처형당했다.
그의 시신은 비밀리에 볼리비아에 묻혔지만 1997년 발견돼 쿠바의 산타클라라로 옮겨졌다. 외신에 따르면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 300㎞ 떨어진 산타클라라에 있는 게바라의 무덤에는 최근 그의 얼굴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거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 등을 든 참배객들이 몰리고 있다.
<게바라는 좌우를 떠나 저항과 가치전복의 아이콘이다>
<국가지도자를 맡은 적이 없는데도 ‘혁명의 아이콘’이 됐다>
<혁명가 게바라는 중산층 출신의 의사였다>
젊은 시절 게바라의 삶에서 특이한 점은 여행이다. 열정적인 젊은 의대생이던 게바라는 자신의 터전인 라틴 아메리카를 구석구석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했다. 게바라가 대학생이던 당시 그의 나라 아르헨티나는 포퓰리즘으로 유명한 후안 페론 대통령(1895~1974)이 집권하고 있던 시기였다. ‘페론주의’라는 이름의 남미 포퓰리즘으로 유명한 페론은 1943년 군인으로서 군사쿠데타에 참가해 권력에 다가섰다. 1946~1955년, 그리고 1973~1974년 두 차례 대통령을 지냈다. 그의 두 번째 부인 에바 페론(1919~1952)은 ‘에비타’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뮤지컬 ‘에비타’의 실제 주인공이 된 인물로 남편의 포퓰리즘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 받는다. 세 번째 부인 이사벨 페론(1931~)은 남편이 1973년 재집권할 때 부통령으로 출마해 당선했으며 남편의 사후 대통령직을 승계했다가 1976년 군사쿠데타로 실각했다. 5년간 가택연금을 당하면서 부패 혐의로 기소됐던 그는 1981년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남미 구석구석 여행으로 현실을 인식하다>
‘의사 게바라’를 ‘혁명가 게바라’로 바꿔놓은 것은 현장 여행이었다. 1950년 첫 여행에서 게바라는 4500km를 달렸다. 작은 모터를 달아서 개조한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아르헨티나 북부의 농촌 지역을 여행했다. 여행은 게바라에게 자기성찰의 계기가 됐다. 그는 남미 전역을 두루 여행하면서 주민들의 가난과 굶주림, 질병을 두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 가난은 물론 그 가난을 가져온 구조적인 문제점도 확인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의 경제, 사회, 정치적인 상황과 모순을 인식한 것이다. 그러면서 가슴 속에 정치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가난한 사람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과 더불어 사회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사회정의와 사명감에 불타는 젊은이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개혁적인 젊은이였지 혁명가는 아니었다.
<청년 게바라, 두 발로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쓰다>
두 번째 여행에서 게바라는 눈앞에 펼쳐지는 라틴 아메리카의 현실 앞에 분노했다. 칠레에선 구리 광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 조건을 확인했다. 안데스 산맥의 유적인 마추피추에 가는 길에선 농촌 오지 소작농들의 가난한 삶을 목격했다.
현실에 분노만 한 것이 아니었다. 게바라는 집단요양원에 사는 나환자들의 동지애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외롭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가장 고귀한 형태의 연대감과 총성심이 솟아나다니”라며 감탄을 쏟아냈다. 게바라는 현실과 인간,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발견하려고 애썼다.
게바라는 이렇게 여행을 하면서 본 것과 만난 사람, 느낀 점과 떠오르는 생각을 ‘모터사이클 다어어리(The Motorcycle Diaries)’라는 이름으로 정리했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이를 책으로 출간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으며 2004년에는 같은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다.
게바라는 20일 동안 미주 대륙을 여행한 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돌아왔다. 게바라는 이 여행에서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면서 가난과 굶주림, 그리고 질병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적었다. 돈이 없어 아픈 어린이를 치료받게 할 수도 없고, 계속되는 굶주림과 가혹한 삶 속에서 희망마저 포기한 중남미의 아버지들을 실제로 봤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식 앞에서 함께 가슴아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들을 돕는 게 자신의 진정한 사명이라는 확신하게 됐다. 그래서 의료의 세계를 떠나 무장 투쟁이라는 험악한 세계로 떠나는 길을 찾게 됐다.
2차 여행을 마친 게바라는 라틴아메리카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 라틴 아메리카를 ‘개별 국가의 집합’ 대신 통합적인 해방투쟁이 필요한 단일 구조체로 인식하게 됐다. 그는 공통의 라티노 문화를 공유하면서 정치적인 경계 없이 하나로 통합된 히스패닉 아메리카를 꿈꿨다. 1953년 6월 의대를 마치고 공식적으로 ‘의사 게바라’가 된 그의 가슴 속에는 이러한 꿈이 자라고 있었다. 의사는 이미 목표가 아닌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무장투쟁을 벌이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과테말라에서 개혁 무너뜨리는 쿠데타 목격하고 혁명가가 되다>
당시 과테말라의 개혁적인 정치인 하코보 아르벤스 대통령은 토지개혁에 나섰다. 당시 과테말라는 인구의 2%를 차지하는 지주들이 전체 농지의 70%를 차지하고 있었다. 주요 수출업종인 바나나 산업은 유나이티트 프루트 컴퍼니라는 미국 기업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르벤스 대통령은 지주들에게 연3% 이자가 붙는 25년짜리 채권을 지불하고 땅을 수용했다. 지주 출신인 아르벤스 대통령은 자신의 땅도 같은 조건으로 내놨다. 농지는 농민들에게 재분배됐다. 하지만 미국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당시 미국 기업은 과테말라의 전력과 철도를 독점하고 바나나 농장을 대거 보유하고 있었다. 미국은 자국 기업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중앙정보국(CIA)이 나서서 쿠데타를 사주했다. 아르벤스 대통령은 실각했고 개혁은 중단됐다. 수십 년이 지난 2011년 말 미국은 이 쿠데타 사주에 대해 아르벤스의 유족에게 사과했다.
마침 과테말라에서 이를 목격한 게바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정치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라틴 아메리카의 가난과 사회적 모순을 개혁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됐다. 게바라의 이데올로기는 책에서 본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확인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의사 게바라는 혁명가 게바라로 변신하게 됐다.
<게바라, 의사 생활하다 쿠바 망명객 ‘카스트로’를 만나다>
<게바라, 쿠바 의료 개혁의 기틀을 다지다>
쿠바의 보건의료 체계도 다졌다. 독특한 것은 자신이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대신 대학 시절 함께 모터사이클 여행을 다녔던 친구 그라나도를 쿠바로 초청해 임상연구소를 맡겼다. 아바나와 산티아고 대학의 의과대학을 대한 지원을 강화해 의사 양성에 힘을 쏟았다. 오늘날 쿠바의 인구 당 의사 비율과 영아사망률 등이 선진국 수준에 이른 것은 이러한 정권 초기의 노력에 힘입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게바라, 소련을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이라고 비난하다>
소련과 카스트로의 조치에 실망한 게바라는 공격을 퍼부었다. 특히 1965년 1월 알제리를 방문했다가 대중연설을 하면서 소련에 ‘제국주의적 착취의 공범’이라는 말까지 했다. 이 때문에 쿠바는 소련의 원조가 끊길 위기에 처하게 됐다. 카스트로는 게바라를 공직에서 물러나게 할 수밖에 없었다. 게바라는 1965년 4월 쿠바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 ‘쿠바에서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났다'는 내용의 편지만 남겼다.
<게바라에게 콩고와 볼리비아는 쿠바가 아니었다>
<게바라는 이미지 정치인에 불과할까>
하지만 과연 외모만으로 그렇게 오랫동안, 그 숱한 사람들이 게바라에 열광했을까? 그는 열정적으로 무장투쟁을 벌였지만 지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쿠바 무장투쟁 과정에서 격렬한 토론 끝에 “포로는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관철시켜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샤르트르는 자신의 동반자인 시본 드보부아르와 함께 쿠바 아바나에서 그를 만나 대화를 나눈 뒤 게바라를 “우리 시대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사실 샤르트르의 판단을 무조건 따를 수는 없다. 좌파에 경도돼 크메르 루지를 지지했다가 킬링필드, 즉 그들이 벌인 대규모 학살극이 폭로되자 반성문을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천하의 샤르트르도 착시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최소한 가장 가까이에서 게바라를 만나 직접 대화해본 인물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게바라는 프랑스어에도 능통했다. 샤르트르의 판단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이유다.
<게바라는 현장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다>
DA 300
모터사이클을 타고 주민들의 삶을 직접 돌아보고 함께 울며 분노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다졌기에 게바라의 철학은 굳고 강하다. 문제의 해답을 현장에서 찾았다. 책상머리 혁명가와 다른 점이다. 그는 의사라는 직업을 버리고 혁명에 뛰어들었다. 혁명을 호구지책으로 여기는 직업혁명가와 다른 점이다. 그래서 그는 중심이 분명했다. 정치적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위해 정치적 이익을 버렸다.
그는 그렇게 자신이 세운 원칙과 신념에 따라 말하고 행동했으며, 결국 죽음마저도 불사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상을 실현하려면 구호나 이미지가 아니라 행동과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소련과 쿠바 혁명의 동지들이 그를 멀리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권력가가 되면 본질적으로 혁명가를 멀리하려고 하니까 말이다.
결국 게바라는 자신이 활동했던 1950~60년대의 냉전 상황이 만든 시대의 산물이다. 그 상황 중 일부는 지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소련이 무너지고 쿠바가 위기에 시달려도 게바라에 열광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은 이유일 것이다. 게바라는 참으로 중독성이 강하다. 2017년까지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는 신화가 아니다. 현재 진행형인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한 다음 공감과 행동을 하든, 대처와 수습에 나서든 하는 것이 전 세계 정치인들의 임무일 것이다. 게바라 50주기가 주는 울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