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society

초기 맑스 원전 읽기

인서비1 2017. 5. 14. 21:10

초기 맑스 원전 읽기


정승욱
맑스주의연구회 <프로메테우스>


들어가며

많은 관악학우들은 맑스에 대해 알고 싶어하고 맑스주의에 대한 나름의 분명한
입장을 갖고 싶어한다. 학내 이데올로기적 지형에서 맑스주의가 여전히 강한
위세를 떨치고 있기도 하지만, 남한 사회에서 노동과 자본의 모순관계에 따른
다양하고 첨예한 갈등 양상은 중요한 사회 문제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으며
갈수록 사회 곳곳으로 확장되는 자본의 영향력에서 우리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삶과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맑스를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맑스주의의 철학적·사회과학적 영향력이 광범위하고 깊기 때문에
인문·사회학에 입문하거나 이 방면에 나름의 입지를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맑스주의를 일정정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맑스주의를 피해갈 수
없다. 그리고 중요한 것으로, 정치활동 내지 사회활동에 관심이 있고 그것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 또한 일정한 이데올로기적 관련성 속에서 활동하는 것이
현실이며 특히 '진보적'이라는 담론에 가치를 둘 때 진보적 실천의 이론과
이데올로기로서의 맑스주의의 기능은 여전히 강력하기 때문에 맑스를 피해갈 수
없다. 결국 맑스주의에 대한 관심은 우리 삶의 물질적 기반인 자본주의적 사회
자체로부터, 우리 자신의 지적 욕구와 맑스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학문들로부터,
그리고 실천 활동의 필요성 등 다방면으로부터 도출되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맑스에 대한 다양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맑스에 대한 접근이 너무
실용적이고 안일하며 이로 인해 '자의적으로 해석된 맑스주의'가 판을 치고 있으며
이것이 학문적 발전에도 실천 할동에도 해악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론적 깊이와 정확성에 대한 요구는 모든 진정한 이론 활동의 기초이며, 올바른
이론적 토대 위에 구축되지 못한 실천 활동은 혼란과 동요, 상황추수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맑스 원전에서부터 시작해서 맑스주의를 이해하려는 자세가 무엇보다도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원전을 읽어봄으로써 그 사상을 이해하려는 자세는
반드시 대중화되어야 한다. 요즘 여러 사상가의 이론이 숨돌릴 틈없이 소개되고
있다. 그런데 몇몇 해설 논문을 통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대충 문구 몇 개
암기하는 식으로 깊이있는 학습을 대체하는 경향이 난무하고 있다. 그 사상을
이해함에 있어 원전을 중요시하는 풍토를 학부 수준에서부터 일구어내야 한다.
맑스 원전을 한 번도 제대로 읽지 않고 맑스주의의 위기와 모순 및 난점을
이야기하는 우스꽝스런 모습을 경계해야 한다. 물론 원전을 읽지 않으면
맑스주의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진지한 태도의
중요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고전적인 맑스주의가 많은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 또한 이념적 혁신이 무엇보다도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근본적으로 파고드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알뛰세르가 {자본을 읽자}의
첫부분에서 이야기했던 꼼꼼한 독해의 정신을 갖추는 것이, 진짜로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학생들'이 모든 위대한 사상을 접하는 기본 태도이다.
이제부터는 초기 맑스의 원전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초기 맑스를 직접 읽고자 하는
분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새로운 개념을 획득해 내는 창조적인 (또는 징후적)
독해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맑스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 자체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가능한한 평이하게 핵심 내용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교재는 박종철 출판사에서 나온 저작 선집 1권이다. 그리고
특별히 유의할 사항은 다음이다.
(1) 저작의 난해함 때문에 결코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끈기와 인내를
갖고 반복해서 읽는 자세가 기본이다. "과학에는 탄탄한 대로가 없다. 오직 피로를
두려워 하지 않고 그 험난한 작은 길을 기어올라가는 자만이 과학의 빛나는 절정에
도달할 수 있다."([M. 라샤르트에게 보내는 맑스의 서한] 중에서)
(2) "맑스주의를 배운다는 것은 맑스주의적 교과서나 소책자나 노작에 서술되어
있는 지식의 총화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맑스주의 연구라는 것이 오직
맑스주의 노작이나 서적이나 소책자에 서술되어 있는 것을 파악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우리는 맑스주의 독경쟁이나 허풍선이를 얻을 뿐이다."(레닌) 현실과의
열린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맑스주의를 학습하고 실천적으로 맑스주의를 사고하는
개방적 사고가 필요한 것이다.
(3) 맑스 사상의 전체적인 형성 과정 속에서 각 저작을 독해할 수 있어야 하며,
맑스가 살았던 시대적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추어야 한다. 맑스주의란
단순히 맑스 개인의 천재적인 창조적 산물이 아니라, 역사적 시대적 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4) 맑스 저작 속에 스며 있는 맑스 개인의 독특한 개인적 성향에도 유의할 수
있어야 하며, 특히 맑스 저작의 논쟁적 성격에 유의해야 한다. 모든 논쟁적
저작에는 약간의 과장(즉 '막대구부리기')이 있다.
(5) 맑스는 자신의 저작이 가능한 한 '예술적 전일체'가 되게끔 하려고 힘썼다.
사상적 업적이외의 이러한 점에서도, 맑스 저작은의 시대초월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예술적 분위기가 넘쳐흐르는 맑스의 저서로부터 예술적
즐거움을 느끼면서 독해하면 좋겠다.


초기 저작 해설

[헤겔 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

맑스는 1835년 본 대학에 입학하고 보다 수준있는 공부를 위해 1년 후인 1836년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간다. 이 곳에서 맑스는 청년 헤겔학파의 주요 멤버가 되면서
헤겔 철학을 공부한다. 1842년 [라인 신문]의 편집자가 되어 급진적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활발한 언론 활동을 통해 억압적인 봉건 전제 군주제인 독일 정부를
비판하는 정치활동을 한다. 그러나 1843년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라인 신문]이
폐간되고 정부의 탄압을 피해 맑스는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맑스는
당시 프랑스에 많이 있었던 사회주의자들과 만나며 다양한 조류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과 접하게 된다. 그리고 청년 헤겔파였던 아놀드 루게와 함께 잡지
{독불연보} 발행에 참가한다. {헤겔법철학 비판을 위하여. 서설}(이하
[헤겔비서설])은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와 함께 {독불연보}에 실렸던 논문이다.
맑스의 사상 발전과 관련하여, 보통 [헤겔비서설]을 기점으로 해서 급진적
민주주의자에서 공산주의자로 맑스가 이행했다고 보는 관점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1845년 {포이에르바흐의 관한 테제}를 작성하기 전까지는 포이에르바흐의 영향을
받은 인간학적 문제설정으로부터 충분한 단절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헤겔시서설]의 맑스의 관점은 과학적 형태로 개진된 맑스주의적 자기 내용을 갖춘
공산주의로 보기는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겔비서설]은 인간해방의 역할을 담지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발견하고, 인간 해방에 복무하는 철학의 실천적 지위를 논하고 있으며, 헤겔
철학의 추상성에 대한 분명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헤겔비서설]은 중요한
이론적 지위를 점하고 있다.
[헤겔비 서설]은 청년 맑스 특유의 파괴력있는 급진적 사상, 억압적 독일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력, 화려하고 명쾌한 문필력으로 돋보이는 명작이나 상당히 독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체의 저작이다. 처음 두 페이지를 '장식'하는 종교비판은
두드러지게 인상적이어서 역사상 보기 드문 탁월한 문체로 씌어져 있는 부분으로
인정받고 있다.(그 유명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의 출처가 바로 이
부분이다.) 문체의 특이성에서 그 어떤 저작보다 두드러진 이 저작은 이런 이유로
그 난해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독자를 갖고 있다.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헤겔비서설]은 분명 이론·논리적
차원에서보다 사상적 차원에서 읽는 독자의 마음을 매료시키는 저작임에 분명하다.
그 까닭은 무엇보다 [헤겔비서설]이 20대 중반의 젊은이인 청년 맑스의 실천적
감수성을 명쾌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약간 과장하건데, 억압적인
독일에 대한 분노와 인간 해방에 대한 맑스의 열정은 당시 동시대인 중에서 거의
최고의 수준일 것이다. "독일의 상태에 전쟁을! 물론이다." "인간이 천대받고
예속되고 버림받으며 경멸받는 존재로 있는 모든 관계를 전복하라."
[헤겔비서설]에서 표방된 맑스의 휴머니즘은 인간 맑스의 사상적 토대로서 평생
그의 실천적 품성을 특징짓는 것으로 남는다. 이후 포이에르바흐와의 단절 속에서
철학적 색채가 짙은 이론적 인간주의를 극복하고 좀 더 과학적인 용어를 채택하는
이론적 엄밀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휴머니즘은 맑스주의적 공산주의를 특징짓는
기본 사상적 내용으로 시대초월적인 보편성을 띠고 있다고 하겠다.
맑스주의에 내재해 있는 인간주의적 요소에 대한 재검토는 한편으로는 맑스에 대한
접근에 있어 이론주의적 편향을 극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휴머니즘의 결핍에
시달리는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점을 치유하는 사상적 방책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이는 남한 맑스주의 학계와 관련하여 일정한 비판을 담고 있다. 이것은
한때 유행했고 현재에도 어느 정도 유의미성이 있으나 분명한 편향이 존재하는
{이론}지 등의 맑스주의 전화 프로젝트 즉, 맑스주의의 혁신과 재구성의 과제를
맑스주의의 난점과 공백을 인식하고 그 모순의 작동에 의한 맑스주의의 전화로서
보는 관점은 주로 '이론적 지반' 위에서 맑스주의를 규정짓고 검토하는 '강단적
맑스주의'의 불가피한 오류라는 것이다. '맑스주의 전화의 문제설정'은 나름의
이론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 사상의 근간으로서 '강력한 혁명적 인간
정신'의 내용적 풍부함을 강단이라는 특성상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변적
맑스주의의 명확한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맑스주의적 인간주의 사상의 재검토에
있어 [헤겔비서설]은 분명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1) 계급적 성격과 결합된 인간주의: 계급 해방과 인간 해방의 결합.
[헤겔비서설]의 인간주의 사상은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이라는 과제와 맞물림으로써
'계급적 성격'을 획득하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는 인간 해방이라는
보편적 임무로 파악되고 있다. 맑스는 봉건 독일의 민주적 변혁에 대한 자신의
과제를 제대로 실행하기를 두려워하는 독일 부르주아 계급의 나약성을 당시의 정세
속에서 뚜렷하게 분석함으로써, 봉건 독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변혁의 과제 또한
'목숨을 건 도약'을 수행할 수 있는 지위에 있는 노동 계급의 임무로 규정짓고
있다. 그리고 혁명적 계급에는 그 지위와 상응하는 '수미일관함, 예리함, 용기'는
'혁명적 용맹성'이 있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2) 이성적 자기 각성을 통한 인간적 자기 권위의 획득: 종교적 권위에 맞선
인간중심주의.
"종교의 비판은 인간을 미몽에서 깨워 일으키는데, 이는 인간이 각성되고,
분별있는 인간으로서 사고하고 행동하고 자신의 현실을 형성하도록 하기
위해서이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그리고 그의 현실적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한,
종교는 단지 인간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환상적 태양일 뿐이다.", "종교의 비판은
인간은 인간에게 지고한 존재라는 가르침으로 끝난다."
계몽주의적 유물론의 무신론은 아마 맑스에 도착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고
보면 타당할 듯 싶다. 그런데 지금은 탈계몽 내지 탈근대의 시대인데, 그렇다면
계몽주의는 낡은 철학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것이다. 이성적 각성에 의한 인간적
주체의 완성을 향한 계몽주의적 기획은 과연 근대적 환상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성 자체의 폭력성과 억압성이 드러나는 '이성 일반에 대한 불신'의 시대
규정은 허무주의적 귀결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이성적 자기 신뢰를 상실한
인간이란 결국 인간 자체의 위기이며 이는 곧 '이성적 주체=이기적 인간'으로
변모하는 사회의 자본주의적 인간상의 위기를 반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인간의
이성적 자기 혁신을 통한 인간적 자기 권위 회복의 과제는 자본주의적 물신 숭배의
화폐 중심성이 인간 관계의 중심을 차지하는 이상 여전히 유효하다. 계몽주의
비판이 이성 일반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가는 것은 과도하다.
(3) 유물론적 인간 해방론: '인민의 환상적 행복인 종교의 지양은 인민의 현실적
행복의 요구'
(4) 이론의 인간주의적 근본지향성
"이론은 대인적으로 증명되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으며, 그것이 근본적으로
되자마자 대인적으로 증명된다. 근본적이라 함은 사태를 뿌리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에게 있어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
맑스에게 있어 인간주의란 '계급해방=인간해방'이라는 최종강령적 표현이나 자신의
근본 사상적 지표내지 유물론적 종교비판과 연관되는 측면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론적 방법으로서 인간주의는 그의 연구 방법의 특징을 드러내는 것으로 봐야
한다. 이는 인간과 무관한 초월적인 실체를 거부하는 맑스의 형이상학 비판에서도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만을 질문한다"라는
맑스의 유명한 명제는 실상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다루는 초월적 실체에 대한
학문인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와 이론적 탐구 영역을 인간주의적 지평내에 규정짓는
것과 관계되는 것이며, 인간의 진보에 대한 낙천적 믿음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외된 노동과 사적 소유]

맑스는 1844년 파리에 체류하면서 노동자 집회에 참여하거나 프루동, 바쿠닌 등의
사회주의자나 혁명가들과 교제하면서 실천 활동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시인
하이네와는 절친한 친구가 되어 거의 매일 만나는 등 여러 인물들과 나름의 동지적
우정관계를 확립하고 특히 8월경에는 엥겔스와 역사적인 만남을 갖고 평생
친구이자 동지로서 그와 협력관계를 맺는다. 이때의 중요 저작이 {경철초고}인데,
이 중 가장 유명한 단편이 바로 [소외된 노동과 사적 소유]이다.
[소외된 노동과 사적소유](이하 [소외된 노동])는 논리적 체계성에서 대단히
뛰어난 작품임으로 논리적 구조를 이해하면 독해가 훨씬 수월하다. 그런데 많은
독자들이 [소외된 노동과 사적소유]를 비롯한 {경철초고}의 여러 작품의 독해상의
난점 때문에 해설서를 뒤적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주의해야 한다. {경철초고}에
대한 연구물은 대부분 쓸데없이 현학적인 강단학자들의 논리성없는 사변적
중얼거림으로 가득하기 때문에 참고를 하지 않고 자신의 두뇌를 믿고 직접 읽는
것이 가장 많이 배울 수 있는 첩경이다.({경철초고}만큼 곡해가 많이 된 저작도
없을 것이다. 맑스의 뛰어난 상품성이 조악한 질의 사이비 맑스 논문을 양산했던
것이다.) 철학적 저서가 아니라 날카로운 논리적 분석에 근거한 문학적인 표현으로
자본주의의 인간소외상을 폭로한 글로서 대하면 한결 쉽게 독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외된 노동]은 알뛰세르의 그 유명한 '인식론적 단절' 테제의 유행 후 '소외론적
문제설정'으로 포이에르바흐적인 유물론의 영향력에 노출되어 있는 논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직 맑스가 자기 스스로의 과학적 언어를 제대로 획득하지 못한
시기의 작품인 것이다. 맑스 스스로도 {경철초고}의 다른 부분에서 포이에르바흐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맑스는 이 논문에서 유물 변증법의 기본적 방법론을 사용하고 있다. "운동의
연관을 개념적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사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소외된 노동]에 나타나는 유물변증법의 기본 방법틀이다. '개념적
파악'이란 헤겔 변증법의 핵심으로 현실 운동을 내적 필연적 본질적 연관 구조
속에서 파악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이러한 방법으로 파악된 소외된 노동은 네가지 측면이 있다.
(1)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노동자의 소외. 이는 곧 자연으로부터의 소외이기도
하다.
(2) 노동자의 생산 활동 내부로부터의 소외. 곧 노동의 소외이다. 앞의 것이
사물의 소외라면 뒤의 것은 노동자의 자기 소외이다.
(3) 인간의 유적 본질의 소외.
(4) 인간으로부터의 인간의 소외. 결국 자본과 노동의 대립.
결국 맑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자본과 노동의 계급적 대립관계 속에서 노동자가
자신의 생산물을 착취당하고, 의식적 노동이 아니라 강제적인 노동을 하고, 자신의
인간적 유적 본질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맑스는 결론적으로 소외된
노동에 대한 분석에 근거하여 '노동자의 해방은 보편적 인간해방'이라고 주장한다.
'소외'의 개념은 특정한 대상이 자신에게 낯선 존재, 적대적인 존재로서 자신의
외부에서 자신을 지배하는 자신과 대립하는 힘 내지 관계로 전화하는 것을
가리킨다.
'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의 성격을 갖는 보편적 유적
생활을 할 줄 아는 인간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인간의 이론적 실천적인 목적의식적
대상성의 개념이 중요하다. "인간은 자신의 생활 활동 자체를 자신의 의지와
의식의 대상으로 삼는다. 인간은 의식적 생활 활동을 가진다. … 인간은 바로 유적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존재이며, 그 자신의 생활이 그의 대상이며, 그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인 것이다. 자유로운 의식적 활동이 인간의 유적 성격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적 성격은 인간의 노동, 생산, 생활 과정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노동(즉 '대상세계의 실천적 산출')이 인간의 유적 본질에 있어 중요한 개념이
된다.
한편, 이 저작에서 맑스는 '자연은 인간의 비유기적 몸'이라는 자연관을 표방하고
있다. 자연이 인간에게 생존을 위한 직접적인 생활 수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의 이론적 대상이자 예술의 대상으로서 인간 의식의 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고 맑스는 본다. "자연은 인간이 향유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준비해두어야
하는 인간의 정신적 생활수단이다."
이는 곧 '인간주의=자연주의'라는 초기 맑스의 사상의 표현이다.

{신성가족}

[헤겔비서설]에서 맑스는 이미 독일의 반동적 질서에 대한 투쟁을 오직 철학적
영역에만 국한시키고 있던 '이론적 정치적 당파'(청년 헤겔학파)을 노골적으로
비판했으나 상세한 비판을 보류하고 있었다. 1844년 파리시절 맑스와 엥겔스는
역사적 만남 이후 청년 헤겔학파에 대한 견해가 동일함을 확인하자 청년헤겔파 중
바우어 형제를 겨냥한 팜플렛을 쓰기로 합의한다. 이것이 {신성가족}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몫으로 30쪽 가량을 썼고, 맑스는 엥겔스가 독일로 떠난 후인
1844년 9월에서 11월까지 계속해서 글을 쓰면서 원래 계획보다 많은 분량으로 글을
완성한다.
{신성 가족}에서 중요한 부분은 [비판적 평주 제1번과 제2번] [프랑스 혁명에
맞서는 비판적 전투] [프랑스 유물론에 맞서는 비판적 전투]이다.
[비판적 평주 제1번]에서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기본 전제를 프루동의 {소유란
무엇인가}라는 저술을 옹호하는 형식으로 비판하고 있다.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신의 기본 전제인 사적 소유의 관계를 인간적이고 이성적인 관계로서 '가정'하고
있다. 그런데 맑스는 이 가정은 입증될 수 없는 것이며, 오히려 현실 속에서의
사적 소유의 운동은 비인간적이고 비이성적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모든
양심적인 경제학자는 이러한 사적 소유의 인간적 형상에 대한 가정과 사적 소유
사회의 비인간적 현실 사이의 모순을 깨닫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비판적 평주 제2번]은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변증법적으로 고찰하면서,
계급해방이라는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논증하고 있는 글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유산 계급은 사적 소유 세계의 양 형태로서 대립물을 형성하고
있고, 대립의 내부에서 한쪽은 '보수파'이고 다른 한쪽은 '파괴파'라고 한다.
이러한 사적 소유는 자기 내부의 대립적 관계로부터 자신의 운동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해체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하는데, 이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즉 계급의식적 프롤레타리아트)로서
정립함에 의해서만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반대편까지도 지양함으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프롤레타리아트 자신도, 그들을 조건짓는 대립물인 사적 소유도 소멸하게
하는 계급 철폐라고 맑스는 주장한다.
'계급 철폐' 즉 '보편적 인간해방'이라는 세계사적 역할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주어지는 이유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자신의 생활 조건을 지양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는데 자신의 상태 속에 집약되어 있는 현 사회의 모든
비인간적 생활조건을 지양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의 생활 조건을 지양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고 한다.
노동 계급의 역사적 역할과 혁명적 계급화에 대한 맑스의 이러한 내용은 '고전적
정식화'의 한계 내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즉 '구조내 전체' 속에 있는 계급
관계의 복잡성과 자본-임노동 관계의 모순성이 갖는 '과잉결정성' 등을 사고할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이루어진 선구적 저작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평주 1번과 2번에서 취하는 맑스의 바우어 형제 비판의 핵심은 그들의
엘리트주의와 추상적 관념성에 있다. 바우어나 맑스 모두 헤겔의 제자로서
변증법의 구사에 능란한데, 맑스는 바우어의 변증법 남용에 반대하여 그들의
변증법의 추상성과 형이상학적 성격을 비판한다. 현실의 모순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변증법적인 추상적 도식으로 대체해서는 안된다. 이는 변증법을 자신이
처한 논리적 난점을 변증법적 모순구조를 이용한 언어적 궤변으로 탈피하는 데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극히 무책임하며 게으른 사변이다.
[프랑스 혁명에 맞서는 비판적 전투]에는 맑스주의 계급 국가론의 초기 정식이
드러난다. "자유주의 부르조아지는 … 입헌적 대의제 국가를 자신의 배타적인
권력의 공식적인 표현으로 그리고 자기의 특수 이해의 정치적 승인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에서 자코뱅파의 시대착오적 이념을 논증하고 있다. 자코뱅파의
로베스삐에르나 생쥐스뜨는 '정의와 덕의 규율에 의거해서 생활하는 자유로운
인민을 양성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이를 주장했는데, 이는 고대 그리이스적인
민주주의 공동체의 이념으로 부르조아 사회의 출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라고 맑스는 주장한다. "로베스삐에르, 생쥐스뜨와 그들의 당은 현실적
노예제의 기초 위에 근거한 고대의 실제적, 민주주의적 공동체를 해방된 노예제,
즉 부르주아 사회에 근거한 현대의 유심론적 민주주의적 대의제 국가와 혼동하였기
때문에 몰락하였다."
[프랑스 유물론에 맞서는 비판적 전투]는 맑스의 철학사에 대한 개입으로,
유물론적 노선의 구획긋기에 해당하는 작업을 맑스는 수행하고 있다. 이 구획에서
유물론 진영에 속한 철학자들과 그렇지 못한 철학자들이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지
못했던 구소련에서 어떠한 평가를 받았을까를 한 번 생각해 봄직하다. 이러한
유물론적 노선의 역사적 구획 설정 속에서 맑스가 하고자 했던 작업의 핵심은
유물론 사상이 '공산주의의 논리적 토대'라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주의와
일치하는 유물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는 포이에르바흐와 18세기 프랑스
유물론 양자를 가리키는 것이면서도 맑스 자신의 유물론의 성격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맑스는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이 스피노자주의의 후예라는 주장을 자신만만하게
반박하면서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의 이중의 기원을 논증하고(데카르트적
기원+로크적 원천), 형이상학에 맞선 유물론의 투쟁의 역사 속에서 유물론 학설이
인간주의의 학설로서, 그리고 공산주의의 논리적 토대로서 발전했다는 사실을
철학사에 대한 명료한 개관 속에서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본원적 선과 인간의 동등한 이지적 재능, 경험, 습관, 교육의 전능함,
외적 상황들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산업의 지대한 의의, 향유의 인정 등 등의
유물론적 학설로부터 유물론과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와의 필연적 연관을 통찰하는
데에는 결코 커다란 통찰력이 필요하지 않다."
그런데, 대부분의 독자들은 맑스 사후의 소위 "유물론과 관념론의 투쟁의 역사"는
과연 어떤 역사였는지 의심스러울 것이다. 전일적인 체계를 갖고 특권적인 과학적
세계관으로서 진리의 보증 역할을 하는 당파적 철학으로서의 유물론이란 환상이다.
실상 철학사에서 유물론이란 플라톤 이후 관념론적 질문들이 자신의 질문들에 대한
대립적 개념으로 불러낸 것에 불과하다. 맑스주의 철학의 근본적 성격을
재정초하는 작업('철학의 전화'내지 '비철학으로서의 철학')이 요구된다 하겠다.
유물론 철학의 무조건적인 계급적 성격이 환상인 것 만큼이나 관념론 철학의
부르조아적 성격 또한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유물론/관념론이라는 설정을
포기하는 것은 철학적 영역에서의 계급투쟁의 지반을 포기하는 것이며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양관계의 정세적 유동성(경계선은 실재하나 끊임없이 변동한다.)과
불균형성 내지 비대칭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독일이데올로기}

맑스와 엥겔스의 공동 저술이다.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이데올로기}를 1845년
가을부터 1846년 5월경까지 공동 집필하였다. 이 두 권으로 된 저서에서 그들은
자신의 유물론적 역사 파악을 설명하였고 포이에르바하, 바우어, 슈티르너 및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의 관념론적 역사 철학과 대결하였다. 이 책의 출판은 그
당시 검열 상황에 부딪혀 좌절되기도 하였지만, 또한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비판된
철학적 경향들과 그 경향들의 대표자들에 대한 출판업자들의 호의 때문에 좌절된
것이기도 하다. 1권 1장의 [포이에르바하]편이 가장 중요하다. 이 부분은 유물론적
역사 파악의 꽤 자세한 서술이 담겨 있다. 극히 중요한 몇가지만 간단히
살펴보자.
(1) 청년헤겔학파 비판
청년헤겔파 운동이란 헤겔 철학에 대한 의존성 속에서 세계를 뒤흔들 듯한 허상의
운동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독일의 철학적 지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왜소한
지방적 편협성에 사로잡혀 있다고 맑스는 질타한다. 청년헤겔파의 철학적 비판은
종교적 비판에 대한 논박에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즉 세계에 대한 실제적 비판
대신에, 세계에 대한 종교의 지배를 전제하고 모든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법적
관계와 관념을 종교적 혹은 신학적 영역 아래에 포섭하고 종교의 비판으로 현실에
대한 비판을 대신하는 식이다. 맑스는 이미 [헤겔비서설]에서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세계에 대한 의식의 지배를 믿는다는 점에서 청년헤겔파는 노년헤겔학파와
동일하다. 노년헤겔학파가 현존 세계에서의 개념과 관념의 지배를 정통이라고
찬양하는 반면에 다른쪽은 그 지배를 찬탈이라고 하여 반대할 뿐이다. 세계의
억압적 관계를 산출하는 잘못된 관념을 새로운 관념으로 대체하여 인간해방을
달성하려는 관념론적 문제해결로 빠지는 청년헤겔학파가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자'라고 맑스는 주장한다. "의식을 바꾸라는 이러한 요구는 현존하는
것을 달리 해석하라는, 즉 다른 해석을 통하여 현존하는 것을 인정하라는 요구로
치닫는다."
결국 맑스는 "현실적 해방은 현실적 세계 속에서가 아니면, 그리고 현실적
수단들을 가지지 않고서는 관철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해방은 역사적
행위이지 사상 속의 행위가 결코 아니라고" 유물론적 관점을 주장하고 있다.
(2) 유물론적 역사관
맑스는 출발점이 되는 전제들이 자의적인 전제들로서 독단이 아닌 현실적 전제가
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러한 전제에 속하는 것은 1. 인간 자신의 생존을 위한
물질적 생활 자체의 생산 2. 새로운 욕구의 창출 3. 인간 자체의 재생산을 위한
가족 관계의 형성 4. 지속적 생산을 위한 특정한 사회적 인간 관계의 형성이다.
이러한 근원적, 역사적 관계들의 네 측면이 고찰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이 의식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한다. ('사회적 존재'의 '사회적 의식'에 대한 선차성)
인간 의식의 특정한 발전 단계에서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분리에 따라 현존하는
실천 의식과는 다른 관념적으로 자립적인 순수한 의식이라는 관념이 생겨난다.
현실적 의식과 자립적인 순수한 의식의 모순관계는 결국 분업의 발전에 따른
귀결이다. 이러한 분업의 결과 향유와 노동, 생산과 소비가 상이한 개인들에게
귀속될 계급적 분열의 가능성까지 생겨난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할이라는
불균등한 노동은 불균등한 노동생산물의 분배를 낳고, 이는 분업과 사적 소유가
결국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분업과 더불어 개인들의 공동이해와 특수이해 사이의 모순이 주어지고,
이러한 모순으로 말미암아 공동이해를 환상적으로 표현하는 현실의 개인 및 전체
이해와 분리된 국가(즉 정치 권력)가 등장한다. 따라서 특수한 정치적 이해를 가진
계급은 자신을 보편적 계급으로 표상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정치권력을
장악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업은 인간의 '소외'이기도 하다.(물론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에서는 철학의 지양의 관점과 새로운 역사 과학의 형성의 관점에
뚜렷하게 서 있기 때문에 철학적 용어 사용을 회피한다. 이는 청년헤겔파의
지긋지긋한 사변적 철학에 대한 정당한 거부이다.) 즉 분업은 '인간 자신의 활동은
인간에 대해 대립하는 낯선 힘, 인간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인간을 굴복시키는
힘으로 전화'(소외의 의미에 대해서는 [소외된 노동]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음)하게 한다. "노동이 배분되자마자, 모든 개인들은 그들에게 강요되는, 그들이
벗어날 수 없는 특정한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소외의 극복을 위해서는 두가지 실제적인 전제 즉 1. 현실에 대해 혁명을
일으킬 수 있는 의식을 자신의 존재지반에서부터 느껴나가는 광범위한 무산자
대중의 존재와 2. 생산력의 거대한 상승과 보편적 발전, 세계적 교류가 필요하다.
실제적 전제와 현실적 과정에 주목하는 이러한 관점은 맑스의 공산주의관을
특징짓는 것이다. 즉 목적론적 관점 내지 공상적 유토피아적 계획에 대한 거부가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 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나온다."
이외에도 {독일 이데올로기}에는 많은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지만 독해가 어려운
저작은 아니기 때문에 일일이 정리하지는 않겠다. 단지 이 저작의 독해에 있어
어려운 점이란 다른 일반적인 저작처럼 완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맥이 매우 산만하게 느껴지고 따라서 전체적인 정리가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이는 흔히들 아는 것처럼 이 저작이 정식으로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원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여러 부분이 유실되었으며
원고의 정확한 순서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여러 출판사에서 나온 {독일
이데올로기} 책의 편집이 모두 다르다. 이 저작을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문단마다 개요를 정리하고 이 개요들로 전체의 논리적 흐름을 재구성하는
방법이다. 두레 출판사에서는 이런 식으로 편집을 했지만 그다지 만족할만한
수준이 못되므로 직접 개요를 작성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오며

쉽게 맑스주의를 이해할만한 해설서는 많지만 정확히 맑스주의의 핵심을 짚고 있는
해설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에 있어서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맑스
원전을 성실히 독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계속 강조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해 주었으면 한다. 이 글은 초기 맑스의 원전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쓰여진 글이지만 이후의 저작들을 이해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몇마디만 하면서 글을 맺고자 한다.
맑스는 청년헤겔학파의 수제자에서 시작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기초하고
정치경제학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남겨놓음으로써 모든 활동을 마쳤다. 그만큼
인식상의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뜻이다. 이러한 맑스의 문제의식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것이 맑스주의를 정확히 이해하는 데에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흔히들 몇 개의 저작들, 예를 들자면 {경철수고},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 {자본론} 등을 읽고서 맑스주의에 대해서 좀
알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하면 맑스주의는 그 내부에 수많은 모순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대학시절, [라인신문]시절, 파리시절,
브뤼셀시절, 망명시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런던시절로 구분될 수 있는 시기별로
맑스의 인식상의 변화를 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시기의 상황과 주요한
논쟁, 그리고 맑스의 실천적인 활동들을 정확히 평가하면서 갈수록 그전과
달라지는 인식상의 변화를 파악하는데 많은 노력을 투자하면 맑스주의의 진면목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몇 편의 저작을 단편적으로 읽고서 맑스가 정식화한 몇 개의 테제에만 얽매이다가,
한편으로는 아예 맑스주의를 버리거나 반대로 교조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 글이 독자들로 하여금 아마추어적인 자세를 버리고 이번 겨울방학에
깊이있는 독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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