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좋은글

길자네 / 장진숙

인서비1 2010. 1. 4. 12:30

길자네
                -장진숙-
 

길자네는 울 아버지 소학교적 동창생
갸름하고 흰 얼굴에 얇은 입술
눈썹 위 까만 사마귀점과
뾰족하게 솟은 콧날이 왠지
차갑게 느껴지던,
키가 훤칠하니 크고
가늘고 긴 허리가
버드나무 같았던 여자
딸 둘에 홀로된 손끝 야문 젊은 과부를
사내들 그냥 놓아둘 리 없지
울 아버지 친구인 몰락한 김가
팔난봉 백수 첩실이 되어 남매를 낳고
학교 앞 구멍가게 열어 근근히 살았다
김가는 식솔 따라 서울 가고, 날밤 새는
삯바느질로 딸년들 키워 시집 보낸 길자네
푼푼이 모은 몫돈도 믿었던 이웃에게
허망하게 떼이고 우렁이 껍질 되어
어린 아들과 학교 앞 조씨네 허름한 문간방
세 들어 산다더니, 나 고향 떠난 후 어쩌다
연줄처럼 팽팽하던 정신 그만
놓아버렸다는 소식 간간이 들리더니
오늘처럼 왼 종일 꽃비 내리던
십여 년 전 어느 봄날 아들 따라
서울에 산다며 나를 찾는
전화가 왔었다 "악아!"
정이 뚝뚝 떨어지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가끔씩 내게 고향 소식을 묻기도 하고
추적추적 비오는 가을날 고향엘 갔다가
우리 집에 들러 묵어왔다며
"악아! " "악아!" 반가운 소식들
정겹게 전해주던 길자네
두어 달 전 세상 떴다는 소식
오늘에야 들었네.
우리 큰 올케 자꾸만
아무래도 아버지를 그 여자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 같다며
의심의 눈초리 오래도록 거두지 않더니
뜻밖의 소식에 뭉클, 가슴이 저리다
"악아!" "악아!"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정이 뚝뚝 떨어지던
애틋한 목소리
진달래 빛 고운
그 여자 치맛자락이
성황산 너머 가물가물
사라지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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