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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겨울 / 석기진

인서비1 2010. 1. 4. 11:32

그 해 겨울

 

                                                                      석기진


(1)

두릎 새순을 삶아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을 봄을 생각하며,
아직은 추운 겨울바람이 깝작대어도 나는 야 모르는척
삼신봉을 올랐네...
어제는 동학사에서, 남매탑에서,
오늘은 청학동에서, 삼성궁에서,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가라!'
유성팬으로 쓴 어느 사나이의 배낭을 쳐다보기도 하며
가끔은 예쁘게도 생긴 아가씨를 만나기도 하며
쓸쓸히 산천 구경을 다녔는데!
등산용 손수건으로 뱃사람처럼 이마를 질끈 동여매고,
늙은 검둥개를 쓰다듬으며 노인네가 손짓을 하였다.
자신의 산장에서 하룻밤이든 여러밤이든 쉬었다가라고 ...

(2)

낙엽송으로 기둥과 서까래를 했다.
황토 벽에 슬레이트 지붕을 이었다.
대나무로 마루를 깔고 벽을 치장했다...
정답게도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산장이 그만
산과 들과 바람과 또 새들과 모두 친하게 지내겠다는 표정을 지어서
이 염치불구한 나그네는 그만 며칠 묵어 볼 결심을 하고야 말았네...!

(3)

서울 어느 사장님이 사 준 송아지를 길러주고
한 대 들여 놨다는 텔레비전이 외로운 할아버지를위해
폼을 내며 방 안에 떡하니 앉아 있었다.
산나물을 뜯으러 갈 때도 마을을 내려 갈 때도
발발이가 뒤에서고 검둥이가 그 다음에 서고 그 누렁소가
제일 뒤에서 따라 다녔다고,
사장이 마을에서 소를 잡던 날
혼자 마당에 앉아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할아버지는 그만 이실직고를 하였네.
말린 고사리, 취나물에 고 향긋한 갓나물을 넣어
볶음밥을 지어 한 그릇씩 먹으며
봄이 되어 뒤 대나무 밭에 새초롬한 죽순이 돋으면
같이 뜯어 먹자 한다.
또 고로새 물맛은 가히 감로수 맛이라고 은근히 자랑을 한다.
나는 그저 입맛을 다실 따름이다.
나는 그저 군침을 삼킬 따름이다.

(4)

이 골, 저 골, 천지로 열린 주인 없는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든다.
토종벌을 길러 꿀을 따고 산나물을 뜯어 쌀을 판다...
20대에 마음의 병을 얻어 40년 간 방랑끝에 이렇게 정착한
할아버지의 얼굴에 묻은 웃음 한자락이 그만,
정답게도 바람에 한참을 펄럭이었다...
불일폭포에서 형제봉까지 또 섬진강을 내려다보고
돌아온 이 가슴 속에서도,
한참을 펄럭였다.
아, 아득히도 내 마음 속 아무런 생각들을 헤집고서는
펄럭이었다...

(5)

그 편안한 가운데, 비소로 나는 산천 구경을 다 끝내기로
마음을 먹고서는
그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 혼자서는 고요히도 지는 해를
오래,오래 바라보았네...
그리고 땅거미가 내렸고!
멀리 개짖는 소리가 몇 번 들렸고!
아궁이에 대나무가 '탕''탕''탕'
화약 터지는 소리를 내며 타 들어가서,
하늘의 별들이 놀라 잠시 소란스러웠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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