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edu

[한겨레] 독일 이야기 :: 독일서 예습은 선생님 무시행위

인서비1 2009. 1. 15. 13:06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가 울리면 습관처럼 하시던 선생님 말씀이 생각난다.
“오늘 배운 것 복습하고, 내일 할 것 예습하는 거 잊지 마라! 예습을 철저히 하는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는 거 알지? 항상 명심하도록 해.”
“네!!!”

우리는 하든 안하든 언제나 대답은 큰소리로 열심히 했다. 선생님 말씀에 공감해서라기보다는, 수업이 끝났다는 즐거움 때문에 웬만큼 틀린 말이라도 대답을 빨리 복창해야 자유를 얻는 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의 당부대로 역시 우리들의 우등생은 언제나 선행학습을 철저히 해 온 학생이었다. 몇 안 되는, 수업시간마다 손을 높이 드는 사람은 이미 사전에 공부를 모두 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예습하지 않은 사람이 낄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왜 학교에서 배우지도 않은 내용을 해야 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으레 그 것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길이라 여겼고, 예습을 잘해오는 사람은 항상 수업시간을 독식했지만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들러리일 뿐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들은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라’는 말 때문에, 학생의 본분은 ‘예습, 복습’이라고 여길 정도로 머리에 못이 박혀 있었다. 독일 와서 큰아이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킬 때만 해도 내 머릿속에 박힌 못은 여전히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때만 해도 한국식 교육열에 불타고 있었던 젊은 엄마였던 나는, 큰아이 교육에 관한 문제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곤 할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더구나 파란 눈의 아이들이 장악한 학교에서 ‘어떻게 나약하기만한 아이를 주눅 들지 않게 적응시킬 수 있을까!’ 늘 고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 나름대로 답을 찾은 것이 독일어였다. ‘독일 아이들이 가장 확실히 잘할 것이라고 믿는 독일어조차도 앞서간다면, 감히 무시할 수 없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독일 와서도 계속 읽히고 있던 한국 동화책을 모두 독일 책으로 바꿨다. 또 정확하지 않은 내 발음으로 읽어주는 것 보다는, 차라리 스스로 보게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독일어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이는 의외로 얼마지 않아 동화책을 술술 읽어냈고, 그 후 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어마어마한 분량의 독서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입학한 초등학교는 내 예상을 전혀 벗어나 있었다. 독일 아이들은 아무도 책을 읽지 못했다. 그 때까지도 겨우 엄마가 읽어주는 수준이었고, 초등학교 1학년부터 ‘A, B, C, D…….'를 차례로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입학을 하고 얼마지 않아 선생님의 호출이 시작됐다. 아이가 1학년 수준에서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알고 있으니 월반을 시키라는 것이었다. 큰아이는 당시만 해도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한국학교 학년에 맞추느라 1년을 일찍 입학했었다. 때문에 다른 아이들보다 어린것도 걱정인데, 월반이라니, 겁이 덜컥 났다. 월반을 하지 않는 대신, ‘앞으로 절대 미리 공부시키지 않겠노라’ 선생님과 약속했지만, 그러고도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심심하면 한 번씩 월반이 거론되곤 했었다.

유치원 동안 읽었던 동화책의 두께가 초등학교 내내 영향을 미친 것이다. 물론 그 후에도 책을 읽는 습관은 버리지 않았지만 지금까지도 우리 아들은 예습을 하지 않는 것을 학교생활의 철칙으로 삼고 있다.

독일학교에서의 예습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선 예습을 해온 아이들은 다른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저하시키는 피해를 줄 뿐만 아니라 선생님을 무시하는 행위로 간주된다.

 

교사가 아이들의 생각을 유도하기 위한 질문을 던졌는데 누군가 앵무새처럼 대답해 버린다면, 생각할 기회를 박탈당한 다른 아이들이 바로 피해자라는 것이다. 또 학생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달할 의무가 있는 교사는 나름대로 자신의 수업에 대한 계획을 세워두고 있는데, 이미 공부해온 아이의 방해로 수업진행에 차질을 빗게 되는, ‘공무집행 방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그런 비슷한 뉘앙스의 문제로 받아들여진다.

김나지움 6학년 때였던가? 예습을 열심히 해오던 우리 아이 친구가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던 이야기가 내게 아주 재미있게 들렸었다. 그 친구는 많은 과목을 이미 집에서 미리 공부 하고 수업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넘치는 자신감에 선생님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납죽납죽 대답을 해대자, 참다못한 선생님에게 심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너 한 번만 더 미리 공부해 와서 수업을 방해하면 월반을 시켜버리겠다! 넌 그걸 원할지 모르지만 너 정도의 수준으로 월반을 하면 분명 수업을 따라가지 못하고 일 년 후 다시 낙제하게 될 것이니, 그런 악순환을 반복하지 않으려면 알아서 해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하는 훈계치고는 아주 현실적이고 섬뜩하기까지 하지만, 돌려서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독일 선생님이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이다.

듣고 보니 구구절절 맞는 이야긴데 우리는 왜 전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을까. 그것은 바로 상위권 몇 명만을 위한 학교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져 있었다는 소리다. 선생님에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예습을 해야만 수업을 이해한다고 믿었던 잘못된 교육풍토, 아직도 한국에서는 그런 악습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듣자니 지금은 선행학습이 더 심해졌다고 한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당시 학교에서 공부를 아주 잘하던 큰조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어이없었던 일이 있었다.

그 아이는 중학교까지는 항상 전교 수석을 자랑하던 수재였기 때문에 큰 어려움 없이 과학 고등학교에도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할 수 있었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 뒷바라지를 순진하게 해온 우리 시누이는 과학 고등학교에 들어온 대부분의 아이들이 선행학습으로 진도가 이미 저만큼 앞서 있다는 사실을 알고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항상 공부라면 전교에서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며 아이를 뒷바라지 하던 우리 시누이는 서울대학을 가지 못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했다. 그러나 학습 계획을 잘못 세웠기 때문에 아이는 1학년 내내 수업을 따라가느라 정신없이 보냈고, 내신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것은 포기 해야만 했다. 결국 내신 성적 때문에 원하던 서울대학은 원서도 내 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조카와 시누이는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할까’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정기 교육을 포기하면서까지 서울대를 고집해야 할 것인가’에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듯, 아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는 아니지만 정상적으로 대학에 입학했고, 지금은 나름대로 만족하면서 잘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야말로 선행학습을 잘못해서 목표를 이루지 못한 경우다.

 

이는 바로 우리나라 학교가 얼마나 본분을 잊고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다. 학교가 학생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학원에서 잘 배우고 있는지, 점검만 하면 임무를 다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 환경 속에서 어찌 교사의 권위를 제대로 세울 수 있으며, 어떻게 ‘교육의 질’을 논할 수 있을지 답답할 따름이다.

* 이 글은 코넷칼럼 ‘박성숙의 독일학교 이야기’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world.hani.co.kr/board/kc_german/41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