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본

『자본론』 읽기 ③: 『자본론』의 핵심, 물신성 문제의 시작―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인서비1 2021. 12. 20. 20:39

『자본론』 읽기 ③: 『자본론』의 핵심, 물신성 문제의 시작―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

 
 성두현   2018년 10월 8일
 

[연재기사 다시보기]

『자본론』 읽기 ①: 상품의 두 요소와 상품에 체현되어 있는 노동의 이중성

『자본론』 읽기 ②: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자본론』 읽기 ④: 교환과정과 화폐물신성

『자본론』 읽기 ⑤: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가치의 척도, 유통수단)

『자본론』 읽기 ⑥: 화폐의 기능들 파헤치기(축장, 지불수단, 세계화폐)

『자본론』 읽기 ⑦: 화폐가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나 자본이 된다

『자본론』 읽기 ⑧: 자본주의 착취구조의 해명―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⑨: 노동시간(노동일)을 둘러싼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의 계급투쟁

『자본론』 읽기 ⑩: 제10장 노동일 제2~4절―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의 통렬한 고발장

『자본론』 읽기 ⑪: 표준노동일을 위한 투쟁―장기간에 걸친 노동자계급과 자본가계급 사 이의 다소 은폐된 내전

『자본론』 읽기 ⑫: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필요노동시간 단축에 의한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⑬: 매뉴팩쳐―분업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⑭: 기계와 대공업(1)―노동자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기계의 도입

『자본론』 읽기 ⑮: 기계와 대공업(2)―자본주의에서 기계는 노동자에게 적대적인 힘으로 작용한다.

『자본론』 읽기 ⑯: 기계와 대공업(3)―교육, 가족, 여성, 생태문제의 해결 방향을 담고 있는 보물창고

『자본론』 읽기 ⑰: 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

『자본론』 읽기 ⑱: 자본주의적 착취를 은폐, 왜곡하는 임금형태

『자본론』 읽기 ⑲: 단순재생산―“로마의 노예는 쇠사슬로 얽매여 있었지만, 임금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끈에 의해 그 소유자에게 얽매여 있다.”

『자본론』 읽기 ⑳: 확대재생산―“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인 자기노동에 기초한 소유가,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인 타인의 불불노동에 기초하는 더 많은 불불노동의 취득으로 전환된다.”

『자본론』 읽기 ㉑: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1)—자본가계급측의 부의 축적은 노동자 계급측의 빈궁, 노동의 고통, 노예상태의 축적이다

『자본론』 읽기 ㉒: 자본주의적 축적의 일반법칙(2)—자본주의적 축적에 대한 생생한 폭로

『자본론』 읽기 ㉓: 이른바 본원적 축적(1)—생산자와 생산수단 사이의 역사적 분리과정

『자본론』 읽기 ㉔: 이른바 본원적 축적(2)-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맑스는 제1장 제3절 가치형태 또는 교환가치 부분이 가장 어렵다고 했는데 실제로 이보다 더 어렵게 독자들에게 다가오는 곳이 제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이다. 그 이유는 제3절이 화폐형태의 발생기원을 밝히는 것이 직접적 목표라는 것을 맑스가 글의 도입부에서 분명히 밝히고 제4형태인 화폐형태에 이르기까지 제1, 2, 3형태를 치밀하게 분석해간 것에 반해 제4절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글의 맥락을 파악하는 데에 노력이 많이 들어간다. 또 다른 이유는 상품생산사회와 다른 생산형태를 대비시킨 부분을 제외하고는 글의 각각의 부분이 난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글의 각각의 부분을 그냥 따라가지 말고 ‘물신성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물신성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스스로 물어보며 답을 찾고, ‘상품생산사회가 아닌 생산형태에서는 물신성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앞에서 찾은 답을 확인해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가 제4절의 핵심이다. 그러면 먼저 맑스가 상품의 물신성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부터 파악해가자.

상품의 물신성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맑스는 글의 초입부에서 상품이 신비롭다고 하고 이 신비로운 성격은 상품형태 자체로부터 온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의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강조는 인용자, 『자본론』 Ⅰ, 93쪽)라고 말하고 있다. 즉, 상품형태의 신비로운 성격은, 상품형태가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라는 현상으로 뒤집혀 나타나게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종교세계와 대비하며 맑스는 물신숭배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문맥을 따라 풀어 표현하면 인간들이 생산하는 노동생산물인 상품이 스스로의 생명을 가진 자립적인 존재로 등장해 상품들 자신 사이에 관계를 맺고 인간과도 관계를 맺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맑스는 물론 상품 물신성의 다른 현상들(노동생산물을 생산하는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 노동시간에 의한 노동의 측량이 노동생산물의 가치량으로 표현되어야만 하는 것, 생산과정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생산과정을 지배하지 않는 것 등)도 언급하지만 상품 물신성이 지칭하는 것의 핵심은 상품형태가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게(현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상품 물신성, 물신숭배는 왜 발생하는가?

맑스는 물신성, 물신숭배를 말한 후 곧바로 이것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 특유의 사회적 성격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다.

유용한 물건이 상품이 되는 것은 그것이 [서로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사적 개인의 노동생산물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적 개인들의 노동총계가 사회의 총노동을 형성한다. 생산자들은 자기들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기 때문에, 그들의 사적 노동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도 오직 이 교환 안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 그러므로 생산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사적 노동의 관계가 있는 그대로, 즉 자신들의 노동 자체에서의 개인들 사이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서 나타나게 된다.

(강조는 인용자, “그러므로 …… 나타나게 된다” 부분은 제2개역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어판에 있는 것이다, 『자본론』 Ⅰ, 93, 94쪽)

 

제2절에서 언급되었듯이 “독립적으로 행해지고 상호 의존하지 않는 사적 노동의 생산물만이 서로 상품으로 대면한다.”(『자본론』 Ⅰ, 53쪽) 이런 내용이 제4절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 그래서 생산자들은 자기의 노동생산물의 교환을 통해 비로소 사회적으로 접촉하게 된다. 때문에 생산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사적 노동의 관계가, 자신들의 노동 자체에서의 개인들 사이의 직접적인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게 되지 않고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물신성은 다른 생산 형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앞에서 상품 물신성이 무엇이고 이것이 어떤 이유로 발생하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물신성은 상품형태에서 나오기 때문에 상품의 모든 신비[즉,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 노동생산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상과 황당무계]는 다른 생산형태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맑스는 이 점을 상당히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들 내용들을 통해 이미 획득한 상품 물신성 개념을 확실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자본론』에서 맑스는 여러 가지 예를 들고 있는데 여기서는 이들 중 두 가지만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유럽의 중세의 경우 농노와 영주는 인격적 예속 관계에 있다. 이 인격적 예속 관계가 봉건적인 물질적 생산의 사회적 관계와 이에 의거하고 있는 생활의 여러 부분을 특징짓는다. 봉건적 생산관계에서 노동과 노동생산물은 부역과 공납의 모습을 갖는다. 이중 부역노동을 살펴보면 부역은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과 마찬가지로 시간에 의해 측정되지만, 어떤 농노도 자기의 영주를 위해 지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노동력의 일정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가령 주 6일 중 3일은 농노가 자신이 점유하고 있는 토지에서 일하고 3일은 영주의 직영지에서 일할 경우, 농노는 3일 동안 영주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지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처럼 유럽의 중세에서 개인들이 노동의 수행에서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그들 자신의 인격적 관계로 나타나며, 물건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로 위장되지 않는다.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경우 “자유인들의 연합체의 총생산물은 사회적 생산물이다. 이 생산물의 일부는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역할하여 사회에 남는다. 그러나 다른 일부는 연합체 구성원에 의해 생활수단으로 소비되며, 따라서 그들 사이에 분배되지 않으면 안 된다. …… 다만 상품생산과 대비하기 위해 각 생산자들에게 돌아가는 생활수단의 분배 몫은 각자의 노동시간에 의해 결정된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노동시간은 이중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간의 사회적 계획적 배분은 연합체의 다양한 욕망과 각종 노동기능 사이의 적절한 비율을 설정하고 유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시간은 각 개인이 공동노동에 참가한 정도를 재는 척도로 기능하며, 따라서 총생산물 중 개인적으로 소비되는 부분에 대한 그의 분배 몫의 척도가 된다. 개별생산자들이 노동이나 노동생산물과 관련해 맺게 되는 사회적 관계는 생산이나 분배에서 투명하고 단순하다.”(강조는 인용자, 『자본론』 Ⅰ, 101쪽)

물신성은 상품생산 형태 때문에 발생하는 객관적인 것으로서 커다란 위력을 발휘한다.

물신성은 상품생산 형태 때문에 발생하는 객관적인 것이다. 단순하게 주관적인 이데올로기나 허위의식이 아니다. 물신성은 환상임에 틀림없지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환상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이데올로기나 허위의식처럼 그 허구성이 폭로되면 그 영향력이 약화되거나 소멸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상품형태가 존재하면 물신성 현상은 지속된다. 환상은 오직 상품생산형태라는 현실 자체가 바뀌어야 제거될 수 있다. 다음의 구절은 이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노동생산물은, 그것이 가치인 한, 그 생산에 지출된 인간노동의 물적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후일의 과학적 발견은, 인류의 발전사에 획기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생산물 자체의 객관적 성격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환상을 결코 없애 버리지는 못한다. 이 특수한 생산형태[상품생산]에서만 타당한 것[즉 서로 독립한 사적 노동들의 독특한 사회적 성격은 사적 노동들이 인간노동으로서 동등하다는 데에 있으며, 그 사회적 성격이 노동생산물에서 가치라는 존재형태를 취한다는 사실]을 상품생산의 관계에 파묻힌 사람들은 [위의 과학적 발견 이전에나 이후에나 마찬가지로] 절대적 타당성―마치 과학에 의해 공기의 구성요소들이 발견된 뒤에도 공기 그 자체는 아무런 변화 없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의 절대적 타당성―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자본론』 Ⅰ, 95, 96쪽)

따라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사회에서 물신성은 커다란 위력을 발휘하며 사람들의 의식, 노동자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이들의 의식이 각성되는 것을 가로막고 노동자들이 이 질서에 순응하게 만든다. 때문에 물신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사태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과학의 도움(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물신성을 깨기 위해서는 과학의 도움이 필요하다」를 참조하기 바란다)과 물신성을 만들어내는 현실자체를 바꾸어내려는 의식적, 실천적 노력이 필요하다.

부르주아 경제학의 한계

맑스는 제4절 말미에서 부르주아 경제학의 한계를 폭로하고 있다. 맑스에 의하면 부르주아 경제학은 어째서 노동이 가치로 표현되며, 어째서 노동시간에 의한 노동의 측량이 노동생산물의 가치량으로 표현되는가라는 질문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고전 경제학의 근본적인 결함의 하나는 상품[특히 상품가치]의 분석으로부터 [가치를 교환가치로 되게 하는] 가치형태를 찾아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다. 그런데 이들 모두는, 부르주아 경제학이 전형적으로 물신성에 빠져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상품생산형태를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바라보아 이들을 분석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맑스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생산과정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생산과정을 지배하지 않는 사회구성에 속하고 있다는 도장이 분명히 찍혀있는] 그러한 형태들도 경제학자의 부르주아적 의식에서는 생산적 노동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자명한 자연적 필연성으로 나타난다.

(강조는 인용자, 『자본론』 Ⅰ, 103, 104쪽)

즉, 생산적 노동이 어떠한 생산형태에서도 반드시 필요하듯이 상품형태도 그러한 것으로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생각하는 것이다.

스미스와 리카도와 같은 고전파경제학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들조차도 가치형태를 전혀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또는 상품 자체의 성질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고 있다. 그 이유는 고전파 경제학이 가치량의 분석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좀 더 깊은 곳에 있다. 노동생산물의 가치형태는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의 가장 추상적인,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고, 바로 이 형태에 의해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은 사회적 생산의 특수한 한 종류가 되며 역사적 과도기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만약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사회적 생산의 영원한 자연적 형태라고 잘못 본다면, 필연적으로 가치형태, 따라서 상품형태, 그리고 그것이 더욱 발전한 화폐형태나 자본형태 등의 특수성까지도 간과하게 된다.

(강조는 인용자, 『자본론』Ⅰ, 103, 104쪽)

물신성이 중요한 이유

물신성 문제를 다루는 제4절은 매우 어렵다. 그러함에도 물신성 문제는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그 이유는 첫째 물신성 문제는 제1장 제4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품물신성은 화폐물신성, 자본물신성, …… 삼위일체(3권 제48장에서 다룸. 1,006~1,011쪽에서는 『자본론』 전체가 다룬 물신성 문제를 요약·정리까지 하고 있다)로 발전한다. 『자본론』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물신성 문제는 『자본론』의 핵심이다. 『자본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신성 문제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맑스 이후 많은 후대의 사회주의자들이 물신성 문제의 중요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현재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둘째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본주의에 의해 고통 받으면서도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의식에 쉽게 이르지 못하는 현상의 이유를 알려면 물신성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이에 대해서는 필자의 글, 「자본주의와 물신성」을 참조하기 바란다). 물신성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와 제대로 투쟁할 수 없다. 새로운 사회주의노동운동의 실천을 위해서는 물신성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자본론』을 읽으면서 이 점을 놓쳐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물신성은 상품명, 브랜드에 대한 집착, 물질만능주의, 배금주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려고 한다. 물신성을 이런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자본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런 오류가 국내외에서 많은 사람들에 의해 범해지고 있다. 이것은 『자본론』을 읽지만 잘못 읽는 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상으로 『자본론』 제1장 상품의 주요 주제들을 다 다루었다. 다시 한 번 이후의 공부를 위해 제1장에서 다룬 주요 개념을 확실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가는 정리 작업을 할 것을 부탁드리며 글을 마친다.

사회주의자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