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본

물화비판과 물신주의 비판의 결합을 위하여

인서비1 2018. 5. 31. 14:32

아니타 샤리: 물화 비판과 물신주의 비판의 결합을 위하여


화폐 및 상품에게 자본의 성격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화폐로서의 본성도, 상품으로서의 본성도 아니고, 생활수단 및 생산수단으로서 기여하는 이들 상품의 소재적 사용가치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 화폐 및 상품, 이 생산수단 및 생활수단이 자립적 권력으로서 그들의 보유자 속에 인격화되어 모든 객관적 부를 박탈당한 노동력에 맞선다는 상황, 즉 노동의 실현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이 노동자 자신에게 소외되어서 오히려 스스로의 의사와 정신을 갖춘 물신(物神)으로 나타난다는 상황이 이러한 성격을 규정 짓는다. … 화폐와 마찬가지로 자본에서는 인간들의 일정한 사회적 생산관계가 사물의 인간에 대한 관계로서 나타나거나, 또는 일정한 사회적 관계가 사회에서 사물의 자연적 속성들로 나타난다.1)



샤리는 물화 비판의 규범적 측면을 강조하는 호네트의 인정이론적 탐구의 이점과 물화의 정치경제학적 차원 및 역사적으로 특수한 자본주의적 사회 형태의 병리성에 관한 맑스/루카치의 강조점을 종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안은 물화에 관한 진정한 정치적 비판을 위하여 물화의 현실에 내재하는 지배의 객관적 차원과 인정망각의 상호주관적 차원 간의 긴장을 변증법적으로 사유할 것을 우리에게 요청한다.


● Anita Chari, A Political Economy of the Senses: Neoliberalism, Reification, Critiqu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5)


1. 물화란 무엇인가?2)


샤리는 『철학 및 사회과학 백과사전』에서 물화 항목의 집필을 맡았는데, 이 표제어의 항목에서 그녀는 물화 개념의 세 가지 측면을 간략하게 다룬다. 첫째, 객관적 수준에서, 즉 상품 생산 및 유통에서 물화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구조. 둘째,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의 탈정치화(depoliticization)를 낳는 물화의 주관적 측면. 셋째, 물화의 인지적 차원.

그녀에 따르면, 물화의 개념(‘사물’[thing] 또는 ‘물건/대상’[object]에 관한 라틴어 res로부터 온, 그래서 객관화/대상화[objectification]의 의미도 갖게 되는]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관한 서구 맑스주의 비판의 어휘사전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갖는다. 물화는 개인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특징 짓는 사회경제적 구조를 향해 취하도록 구조적으로 강요된 비참여적으로, 탈정치화된, 주관적 태도를 나타낸다. 그것이 경제적 구조와 개인들이 경제적 구조에 관하여 취하는 경험적‧실천적 자세 사이의 연관성을 확립하는 한에서 이 용어는 사회과학철학에서 중심적인 용어이다.


1) 자본주의적 경제의 객관적 과정으로서 물화

물화 개념의 토대는 자본주의 사회를 특징짓는 객관적인 경제적 구조에 관한 분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칼 맑스는 상품 형태가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적인 구조적 원칙이라고 주장했다. 비록 상품이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단순히 유용한 대상으로서 나타날지라도, 사실상 상품은 보다 중요하게는 자본주의 사회 특유의 사회적 관계의 형태이다. 상품은 시장되는 교환되는 대상일 뿐 아니라 사용의 대상이기도 하다. 맑스는 물건(object)의 형태로 담겨 있는 사회적 관계의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물이자 사회적 관계라고 하는 상품의 이중적 속성이 상품 생산 및 유통, 그리고 그것이 필요로 하는 계급착취 사이의 관계를 알아차리는 것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 자본주의 생산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사회적 관계의 구조적 혼미화(structural obfuscation)는 일반적 상품 물신주의로 지칭된다.


2) 주관적 수준에서의 물화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경제적 관계의 구조적‧객관적 혼미화는 주관적(subjective) 수준에서의 물화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물화의 개념은 상품 형태에 고유하게 내재하는 사회적 관계의 구조적 혼미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주관적 경험에 미치는 그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상품 생산 및 유통에 관해 수동적이고 비참여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구조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다. 개인들은 인간의 욕구를 만족시키는 단순한 사물로서 나타나는 상품의 생산이 계급 착취와 경제적 관계의 탈정치화에 기초한 사회적 삶의 형태를 현실적으로 강제하는 그 방식을 일반적으로 지각하지 못한다.

헝가리 출신 맑스주의 철학자 게오르그 루카치(Georg Lukács)는 물화 개념의 주관적이고 정치적인 차원을 강조했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일 것이다. (마르크스에 관한) 그의 독해에서 물화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적인 구조에 대하여 취하는 비참여적이고 관람객적인 경험과 실천의 자세이다. 경제가 외관상으로 인간 의지와 무관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삶의 독립적, 자기-근거적, 자율적인 영역으로서 존재하는 사회에서, 개인들은 인간의 행위주체성이 이러한 구조들을 구성하는 그 방식을 지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구조는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 특수하고 인간 행위주체성을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된 것이라기보다는 반역사적이고 영구적인 것처럼 보인다. 물화가 사회경제적 형태와 관련되어 있는 한에서, 그 개념은 자본주의적 지배가 전형적으로 협소한 의미에서 ‘경제적’ 영역으로 이해되는 것을 초과하는 그 방식을 분절한다. 물화는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문제일 뿐 아니라 ‘경제적’ 문제 둘 다이다. 나아가, 물화의 개념은 탈정치화 자체가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중심적인 방식을 식별한다. 사회적 관계를 탈정치화하지 않고선,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의 재생산은 일어날 수 없다.


3) 물화에 관한 대안적 설명

마지막으로, 물화의 개념은 또한 특수한 종류의 합리성, 즉 도구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으로 사용되어 왔다. 도구적 합리성은 다른 형태의 인지를 배제하기 위한 목적 및 수단에 초점을 맞춘다. 물화를 도구적 합리성으로 해석하는 이론가들은 그 개념의 전술한 측면들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있었다. 물화의 이러한 용례는 인지와 사회경제적 구조 사이의 관계보다는 물화의 순수하게 인지적인(cognitive) 차원을 강조한다.

비판이론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한 두 명의 영향력 있는 이론가, 테오도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물화를 인지 형태로서 강조했다. 그들의 저작은 물화에 대한 초기 서구 맑스주의적 접근의 역사주의적 경향을 삼가고, 물화가 주로 사회경제적 구조화의 양식으로서 상품 형태에 특수하게 속박되지 않은 도구적 합리성의 형태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대안적 접근은 또한 그 기반이 되는 상품 생산 및 유통으로부터 물화의 분리를 강조하면서, 물화 개념에 관한 많은 현대적 논의를 특징 지어온 경향이 있다. 그러한 현대적 논의에서, 여러 이론가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의 비참여적이고 수동적인 주관적 자세와 경제적 구조 사이의 관계보다는 물화의 상호주관적이고 인지적인 차원에 초점을 맞추는 물화의 개념을 지지해온 경향이 있다.


2. 루카치: 물화와 자본주의적 주체성3)


『역사와 계급의식』 제4장 ‘사물화와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에서 루카치는 물화가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적인 사회적 병리학이라고 주장한다. 물화는 무엇보다도 우선 사회적 세계를 향해 그리고 그들 자신의 실천을 향해 개인들이 취하는 비참여적, 관객적인 자세이다. 물화는 사회적 대상들(객체들)에 대한 참여적 개입의 결여(Teilnahmslosigkeit, 초연함)로 특징 지어지며, 그로 인해 인간은 세계 안의 ‘사물’을 인간의 의식이 적극적으로 구성하기보다는 그에 단순히 순응하는 불활성의 대상들로서 파악한다. 더욱 구체적으로, 루카치에 따르면, 물화는 독특하게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의식 형태이다. 그것은 경제가 외관상으로 인간 의지와 무관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사회적 삶의 독립적, 자기-토대적, 자율적인 영역으로서 존재하는 사회에 대하여 개인들이 취하는 주관적인 자세이다. 경제의 독립성 및 객관성이 자본주의의 지배적인 사회 구조를 그 자체로 영속화하는 가상(appearance; Schein) 또는 환상(illusion)의 형태로서 기능하는 방식에 주의를 상기시킴으로써, 루카치는 주체들의 일상적 실천과 자본주의적 경제의 동학 사이의 무의식적 연관성을 명확히 한다. 그러므로 물화의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이 비록 외관상으로는 경제가 자율적이고 자기-영속적인 동학을 가진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것이 결국엔 인간 실천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것을 인식하는 데 실패하는 방식을 기술한다.

루카치는 물화 비판을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위장된 인간들 사이의 관계의 형태로서 맑스가 이론화했던 ‘상품 물신주의’ 비판과 명시적으로 결부시킨다. 맑스의 선례를 취하면서, 루카치는 물화의 비참여적 태도가 자본주의에서 인간 의식의 특징을 나타낸다면, 이는 자본주의 사회적 삶 특유의 구조 그 자체에 관한 무엇인가를 갖는다. 『자본』에서, 맑스는 물신주의라는 아이디어를 가지고 이러한 문제의 현장을 나타내는데,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적 관계들이 어떻게―그 행위와 운동이 인간 행위주체성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으로서 간주되기에 이르는―‘사물들’의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상품은 그것들을 생산한 노동자들로부터 소외되고 분리된, 고유의 삶을 떠맡는다. 맑스에 따르면, 인간 필요의 대상을 생산하는 사회적 노동을 베일로 가리는 상품의 물신적 성격은 자본주의의 중심적인 구조적 특징이다.4) 전(前)자본주의 사회에서처럼, 노동에 외재적인 사회적 관계에 의해 더 이상 의미부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사회적 관계로서의 그 지위를 보이지 않게 만듦으로써, 자기-토대적(self-grounding) 형태를 띤다. 노동의 물신적 성격은 그것이 비(非)의식적인 사회적 지배의 성격을 띰으로써, 사회적 행위자들의 경험으로부터 스스로를 보이지 않게 하는 사회적 매개의 형태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하에서의 노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들에게 객관적인 형태의 강박을 행사하고, 노동의 사회적 관계는 소외된, 자기-불투명적(self-obscuring) 형태를 취한다. 유통에서 상품은 단순한 ‘물건들’이나 필요의 대상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상 상품으로서의 그 운동은 교환가치의 독립적인 논리를 뒤따른다.

비록 『자본』에서 맑스의 물신주의 분석이 자본주의 사회 형태의 동학이 자율적이고 외관상 자기-영속적이게 되는 방식을 폭로했을지라도, 그는 어떻게 개인들이 상품과 그들 자신의 노동을 결부시키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질문에 집중하지 않았고, 개인들의 주관적 자세 그 자체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결정적인 특징이 되는 방식을 다루지도 않았다. 물화에 관한 루카치의 에세이는 바로 이러한 빈틈을 다룬다. 만일 맑스의 요점이 상품 물신주의가 자본주의 동학으로부터 인간 활동의 혼미화가 수반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면, 루카치의 기여는 맑스의 분석이 자본주의의 동학을 자연화된 그리고 불변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주체를 전제로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물화를, 자본의 물신적 형태를 인간 행위주체성으로부터 자연적이고 독립적인 것으로서 받아들이는 의식의 특수한 형태로서 탐구함으로써, 맑스의 분석을 확장한다. 그는 이러한 비참여적, 관객적 형태의 주체성의 생산이 상품 생산으로서 자본주의의 생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러한 관객적 자세가 자체가 상품이 된다. 이 점을 설명하면서, 루카치는 그 자신의 기계화된 활동을 단지 수동적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주체에 관해, 관객성(spectatorship)이라는 충격적인 은유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그래서 여기에도 인격은 제 자신의 현존재―곧 낯선 체계 속에 끼워 맞추어진 한 파편으로서의 현존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에 어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없는 방관자가 된다.”5) 따라서 루카치는 현대 자본주의의 제도들과 자본주의적 사회적 삶의 부자유를 비판하기보다는 합법화하는 기형적이고 자기-제한적인 형태의 합리성 사이의 연관성을 명확히 드러낸다.

이러한 방식으로 문제를 정식화함으로써, 루카치는 물화의 구체적으로 정치적인 차원을,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물화가 자본주의적 사회 형태를 무정치적(apolitical)  지향성을 조장하는 방식을 드러낸다. 철학의 활동부터 산업노동까지, 루카치는 자본주의적 주체성의 일반화된 측면인 물화의 결정적인 특징은 인간 활동의 실천적 기반에 관한 오인(誤認, misrecognition)라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화는 겉보기에 불활성의‧불변의 사회적 세계에 관하여 관조와 수동성을 영존시킨다. 인간은 상품이나 사회에 반영된 그들 자신이나 그들 자신의 실천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들은 자본주의의 물신화된 과정을 인간적 자기-결정의 장애물로서 인정하지도 않는다. 개인들이 지배 구조를 그들 자신의 실천의 영역 너머에 있는 것으로 관계시키게 된 그 결과물은 인간 활동이 이러한 구조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을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루카치는 물화의 마법에 걸린 인간 존재가 사회변혁의 잠재적 장소를 지속적으로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3. 호네트의 물화: 인정이론적 재해석


루카치의 『역사와 계급의식』이 비판이론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근본적인 텍스트이긴 하지만, 물화 이론은 동시대의 논의에서 간과되어온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상례의 중요한 예외가 악셀 호네트의 최근 저작인 『물화: 인정이론적 탐구』인데, 그 책은 물화 비판을 동시대 사회철학이 사용 가능하도록 인정이론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호네트는 루카치 저작의 맑스주의적 지향성과 결과적으로 물화의 상호주관적 차원의 간과에서 비롯되고 있는 규범적 결함으로서 감지되어온 것에 대응한다. 물화 개념을 새로이 정식화하는 도전을 감당하기 위해, 호네트는 물화 개념을 인정이론의 용어로 번안하는데, 그러한 번안은 물화의 현상을 상호주관적 수준에 강조점을 둔다. 호네트의 해석틀에서, 물화는 사회적 세계 안에서의 타인들과 대상들에 관한 우리의 지식 및 참여에 전제된 선행하는 인정의 망각에 그 특징이 있다[“우리가 자연에 대해 단지 객관화하기만 하는 태도를 취한다고 해서 자연에 대한 인지적 관계의 실천적 조건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는 간접적 의미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의 비인지적 조건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객관화하는 태도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자연 환경세계의 구성요소들에 앞서 부여한 실존적 의미들로부터 고개를 돌린다면, 우리는 그들에 대한 우리의 선행하는 인정을 ‘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샤리는 두 가지 지점에서 호네트의 물화 비판의 재구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첫째, 자본주의의 사회적 형태로부터 호네트가 물화 비판을 분리시킨 것은 동시대의 정치적 가능성을 이론화하는 데 부적절한 몰역사적인(ahistorical) 인정 개념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샤리는 그 사회-경제적 기반에 관한 분석으로부터 물화의 규범적 측면을 분시시킴으로써,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지배에 관한 비판을 정초하기에는 상호주관성이 너무나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는 그런 상호주관적 현상으로 물화를 환원하면서, 호네트가 정치 이론을 위한 물화 개념의 비판적 잠재력의 상당 부분을 철회해 버렸다고 주장한다. 루카치의 이론에 맞서는 것으로 호네트의 이론을 제기하기보다는, 호네트의 작업이 루카치의 분석의 암묵적인 규범적 기반을 명확하게 하려는 노력으로 더욱 유효하게 이해될 수 있다고 샤리는 주장한다.


1) 물화 재해석의 기원: 고통의 현상학

샤리는 호네트 인정 이론의 구성에 관한 본격적인 제시를 피하고, 대신에 인정 이론이 어느 정도까지 자본주의 비판이―그 논쟁에서 사용된 좀 더 온건한 용어로 하자면, 분배를 향한 요구가―채워온 이론적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지를 명백히 밝히고자 하는, 낸시 프레이저와의 최근 논쟁에서 호네트가 자신의 인정 이론을 재진술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서, 오직 물화에 관한 논의와 관련 있는 기본적인 요점만을 간결하게 설명한다.

호네트의 인정 이론은 사회적 상호작용의 기저에 깔려 있는 도덕적 제약을 드러내고자 하며, 사회 구성들의 포함은 언제나 상호적 인정의 메커니즘을 통해 진행되며, 그에 따라 개인들은 어떤 특성들에 비추어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인정된 것으로 간주하도록 학습함으로써 사회 안으로 규범적으로 통합된다는 전제에 기초하고 있다. 호네트는 사회 이론이 어떻게 사회가 그들의 인격적 불가침성(personal integrity)을 조건 지우는지에 관한 주체들의 규범적 기대의 관점에서 사회적 불의를 파악할 수 있는 개념들을 요청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모욕(degradation)과 무시(disrespect)와 같은 사회적 인정의 박탈의 경험이 사회적으로 야기된 고통과 불의를 표현하는 중요한 개념으로 중심을 차지해야 한다”고 말한다.6) 호네트가 보기에, 사회적 투쟁을 위한 동기부여로서 사회적 무시의 중요성은 사회 이론적 타당성을 경험적 성과이지만, 그것은 또한 이러한 경험적 사례를 초월하는 인정의 규범적 원칙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것은 사회이론과 비판이론에서 오랫동안 사각지대가 되어온 불의와 무시에 관한 일상적 표현 사이의 매우 중요한 접촉점을 가리킨다. 호네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는 낸시 프레이저에게 현존하는 갈등 수준에 대한 단순 긍정이라는 위험이 등장한다는 지적을 전적으로 제외한다면, 일상적 불의 경험에 대한 접근을 체계적으로 가로막는 문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사회학적 반규범주의의 유산인 이러한 난점은 과거 프랑크푸르트학파에서도 확산된 것으로서 오늘날 비판적 사회이론을 혁신하려는 시도에서는 처음부터 나타나고 있다. 왜냐하면 주체들이 사회 질서를 스스로 평가하게 할 수 있는 규범적 관점을 범주적으로 해명하지 않는다면 비판적 사회이론이 항상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불만의 차원이 완전히 봉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적 원천에서 기원하는 귀속적 이익관심 이념이나 아무런 이론적 토대 없이 ‘새로운’ 사회운동과 결합하는 것은 향후 이런 문제점과 관련하여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이를 대신하여 필요한 것은 앞서 짧게 요약했던 다양한 영역에서의 연구에 맞서 비판적 사회이론의 근본 개념을 인정이론의 규범적 전제들로 변형시키는 작업이다. 왜냐하면 인정이론은 사회적 인정의 박탈, 모욕과 무시와 관련한 현상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불의 경험의 핵심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7)


루카치의 물화 개념에 관한 호네트의 재정식화는 호네트의 이론의 중심에 서 있는 무시의 현상학으로부터 그 선례를 취한다.

따라서, 호네트는 그가 루카치의 물화 개념의 경제주의라고 인지한 것으로부터 인정의 관점에서의 물화 분석으로 이론적 전환을 가져온다. 그러한 재정식화가 없다면, 물화가 어떻게 경험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지에 관한 이해하는 것뿐 아니라 물화 현상이 비판될 수 있는지의 규범적 규준에 관한 설명으로부터 분리되고 만다. 호네트의 설명으로, 심지어 자본주의적 경제의 제도들조차도 어느 정도 사회 구성원들에 의해 그것들에 가해지는 규범적 기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규범적 규준은 다만 자본주의에 관한 내재적 비판에 그 자신을 정초하고자 하는 이론을 피할 뿐이다. 호네트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더 나아가 [나는] 경제적 영역에서의 구조 변형 역시 관련자들의 규범적 기대로부터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적어도 이들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모든 다른 영역에서의 통합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적 시장 현상의 전개 과정 역시 그 토대가 되는 규범적 원칙에 대한 해석을 겨냥한 상징적으로 매개된 협상 과정의 형태 속에서만 진행된다.8)


그러므로 호네트는 자본주의 사회 형태에 관한 비판으로부터 물화의 문제계를 그가 결정적으로 분리키시는 데서 루카치와 첨예하게 엇갈린다.

호네트는 정확히 왜 물화가 지배의 형태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실천의 사회적 존재론에 의존하는 루카치의 논증 전략에서 근본적인 문제를 관찰한다. 물화는 기형적인, 병리적인 실천의 구조, 즉 다른 인간 존재와 객관적인 세계와 관련한 주체의 수동성을 가리키는 것을 의도한다. 이러한 (호네트의) 독해에서, 물화가 인간 활동의 특정한 존재론적 전제를 위반하는 한, 그것은 문제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그럼으로써 비판 받는다. 호네트는 루카치가 비-물화된 실천 형태, 즉 인간 존재와 세계 사이의 근본적이고, 근원적이며, 능동적인 상호작용 형태의 표준에 맞서 병리적이고, 물화된 실천을 평가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세계와 수동적으로, 또는 루카치가 부르듯이 관조적으로 관련을 맺는 한, 우리는 우리의 삶의 형태의 합리성에 적합한 형태의 실천으로부터 벗어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호네트는 루카치의 물화 비판이 그의 사회적 존재론적 비판에 의해 불충분하게 정당화된다고 주장한다. 물화된 형태의 실천은 그것들이 사회적 존재론의 특정한 기술적 요소와 모순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특정한 도덕적 원칙을 위반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비판받을 만하다.


2) 물화 재해석의 핵심: 인정 망각

호네트는 루카치의 주관적 차원의 물화 분석에서, 즉, 상품 물신주의 분석보다 사회적 세계에 주체들을 실천적으로 결부시키는 방식으로 변화에서 더욱 결실 있는 물화의 사회이론을 본다. 이 점과 관련하여 호네트가 루카치에서 정수를 뽑아내고 있는 핵심적인 지점은 ‘초연함’(Teilnahmslosigkeit)[“행위자가 행위결과에 의해 감정적으로 더 이상 감응되지 않고, 무관심하게 그저 방관하며 사건들을 스쳐 보내는 것”], 또는 참여적 개입의 결여이다. 이 용어는 그로 인해 주체들이 그들의 근본적으로 능동적인, 참여적인, 그리고 세계에 대한 공감적 관여의 시선을 잃어버리고, 대신에 실존적이거나 감정적인 연루 없이, 세계를 수동적으로 관조하면서, 초연한 관찰자로서 행동하는 상호작용의 형태를 나타낸다.9)

호네트는 (루카치의) 초연함에 관한 비판에는, 인간 행위주체성의 관념론적이고, 조물주적(demiurgic) 이론이 아니라, 오히려 현 상황에서, 결코 상품교환의 일반화에 의해 완전히 침식되지 않은, 세계 안에서 근절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중핵을 형성하는 상호주관적 실천의 규범적 기준에 기초한 물화 비판의 대안적이고, ‘비공식적인’ 판본이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순간에, “[루카치에 따르면] 물화하는 실천에 대조를 이루는 본보기가 되는 것은, 집단으로 확대된 주체에 의한 객체의 산출이 아니라, 주체의 다른 태도, 즉 상호주관적 태도이다.”10) 호네트가 보기에, 루카치의 논점의 이러한 ‘비공식적인’ 요소는 물화 비판을 총체화로부터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물화는 참여적인, 비-물화된 실천을 전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며, 그것은 “단지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있을 뿐이다.”[“물화라는 조건 아래에서 실천의 다른 형식, 그러니까 물화되지 않은 형식은 제거돼 버린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있다.”]11)

이러한 통찰로 무장하여, 호네트는 무관심하고, 관조적인 형태의 실천이 물화된 것으로 불분명하게 언급되지만 세계를 향한 인간 존재의 우선적이고, 관심 있고, 능동적인 자세를 결코 완벽히 제거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물화를 인정 이론적 관점에서 재해석할 것을 제안한다. 호네트는 우선적인 인정적 자세로서 이러한 자세, 즉 “인간의 자기관계 및 세계관계에서 지지하고 인정하는 자세가 발생적으로도 또한 범주적으로도, 다른 모든 태도들에 선행한다”고 주장한다.12) 호네트의 물화 비판은 단순히 인지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에 대하여 인간 존재의 세계에 대한 인정적이고, 공감적이며, 관심 있는 관계의 우선성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영감의 원천으로서 『계몽의 변증법』에서의 도발적인 문장을 가져와서, 호네트는 물화를 ‘인정 망각’으로서 새로이 사유할 것을 제안하는데, 그 표현은 인간 존재가 타인과 세계에 관한 지식의 기저를 이루는 돌봄과 인정의 선행하는 자세의 의식을 상실한 과정을 가리킨다. 호네트에 따르면, 이러한 인정의 우선성은 ‘발생적’인 동시에 ‘범주적’이다. 발달심리학과 사회화 연구의 통찰을 활용하여, 호네트는 어떻게 물화 비판이 사유 과정의 감정적 조건을 드러내는 학습 과정에 근거를 둘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단순한 인지에 대한 인정의 연대기적 우선성을 유년기의 중요한 타자들과의 정서적 관계의 경험에 위치시킨다.13) 호네트는 그가 주장한 인지에 대한 인정의 개념적 우선성이 루카치의 이론에서도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하이데거와 듀이에게 의지한다.

비록 호네트가 물화 현상을 식별하는 있어서 더 높은 수준의 경험적 특수성을 요구하면서, 루카치의 개념에 비하여 어쩌면 분석적으로 더욱 미묘한 물화 개념을 발전시켰을지라도, 호네트의 물화 이론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부재를 간과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 그의 이론은 더 이상 물화 비판을 루카치의 설명에서 사회적 지배 비판과 자기-결정의 모호함의 기초를 형성했던 자본주의에서의 사회-정치적 관계 비판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왜 호네트는 그런 작은 범위의 현상으로 한정된 채 남아 있고, 물화 현상과 자본주의 사회 구조 사이의 단단한 연관성을 절단하는, 그런 협소한 물화 개념을 루카치 이론으로부터 뽑아냈는가? 샤리는 이러한 문제가 주체 철학의 규범적 모델을 벗어나 비판이론의 방향을 재설정하려는 시도로서 상호주관성의 개념이 하버마스와 호네트에 의해 이론화되어온 방식을 특별히 주목하면서, 보다 넓게는 비판이론의 전통 내부의 물화 비판을 살펴봄으로써 답변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14) 다시 말해, 물화 비판에 관한 호네트의 재정식화는 비판이론에서 자본주의에 관한 구조적 비판에서 떠나 의사소통과 상호주관성을 향한 더 큰 패러다임 전환의 사례이다. 하지만, 상호주관성의 개념은 오직 이러한 대립에 의문을 제기하는 한에서만 유용하다. 샤리는 루카치의 물화 비판의 요소들이 하버마스와 호네트의 분석의 중심에 있는 상호주관성과 물질성 사이의 엄격한 이분법을 피하여 상호주관성을 이론화하는 보다 다각적인 방식을 나타낸다고 주장하는 쪽으로 나아간다.


3) 하버마스의 물화: 생활세계의 식민화

  하버마스는 생산 패러다임이 실패했던 곳에서 비판의 규범적 입지점을 정초하는 데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의사소통 행위의 관점에서 물화 비판을 재해석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서술은] 해방의 관점이 생산 패러다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호이해를 지향하는 행위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원할 수 있는 것과 공익의 관점에서 행해야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실천적으로 알아내고자 한다면, 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상호작용과정의 형식이다.15)


그러나 하버마스의 비판적 기획이 도구적 행위와 사회적 행위를 융합했다고 비난한 맑스적 ‘노동’(Arbeit) 개념과 자신의 상호주관적인 ‘상호작용’(interaction) 개념 사이의 엄격한 대립에 의존하고 있는 한에서, 샤리는 그의 상호주관성 개념이 그 물질적인 가능성의 조건에서 추상화되어 버렸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런 추상화가 하버마스, 그리고 이후의 호네트가 물화 비판을 이론화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특히 샤리는 하버마스가 경제와 국가의 차원과 같은 이른바 준-객관적인 행위조정 메커니즘을 체계(system)의 개념으로 제시한 것을 주목한다. 하버마스에서 체계통합은 규범과 가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화폐와 권력의 탈규범화되고 자율적인 ‘조종매체’(steering media)를 통해 조정된다. 체계에서,


[상호작용이 더 이상 규범과 가치를 통해서가 아니라 교환가치매체를 통해서 조정되면, 행위자들은 서로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객관화하는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이때 그들에게는] 행위조정의 메커니즘 자체가 외부적인 것으로 경험된다. 교환가치매체를 통해 진행되는 거래들은 언어적 상호이해의 상호주관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객관세계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으로, 유사자연(pseudonature)으로 된다.16)


인간의 상호주관적인 구성으로부터 명백히 독립적인, 체계는 자기-토대적인, 사물적(thingly) 성격을 지닌다.

비록 루카치가 막스 베버의 비관적인 현대성 진단에 도전하고, 그로 인해 물화와 단순하게 동일시되지 않는, 대안적인 합리화 이론을 암시한 것에 관해 그를 신뢰할지라도, 하버마스의 중심적인 비판점은 루카치가 합리화에 관한 너무나 획일적인 의념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하버마스는 루카치가 사회체적 합리화의 모든 과정을 상품 형태의 일반화 및 교환의 추상화의 관점에서 분석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루카치는 단 하나의 매체, 즉 교환가치만을 고려하고 물화를 ‘교환의 추상적 성격’으로 소급하기 때문에, 서구 합리주의의 모든 현상을 “전체 사회의 철저한 자본주의화 과정”의 징후로 해석한다.17)


그 고유한 규범적 토대를 설명하고자, 하버마스는 그 자체로 사회적 생활세계에, 심지어는 물화의 조건에서조차도 고유한 것으로서, 의사소통적 합리성이라는 규범적 척도를 충분히 파악하기 위해선 물화 비판이 의사소통 행위의 의념에 호소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루카치 물화 이론에 관한 하버마스의 재정식화의 요점은 경계 내부에 남아 있는 체계적 구성요소와 문화적 재생산, 사회통합, 사회회의 영역, 곧 생활세계의 영역으로 강제 진입하는 그 체계적 메커니즘을 구별하는 것이다.18) 하버마스에 따르면, 이러한 월경(越境)이 루카치가 제시한 것보다 더욱 구체적이고 더욱 차별화된 물화 의념을 나타내는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구성한다. 하버마스가 복합 사회(complex societies)의 기능적 요구로 상정하는 체계통합은 그 자체로 문제적이지 않으며, 그것이 물화의 형태를 구성하지도 않는다. (하버마스의 관점에선) 체계의 조종매체가 그들의 경계를 넘어 생활세계의 의사소통적 영역에 침투했을 경우에만 물화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체계와 생활세계로 구성된 하버마스의 사회 개념은 그런 총체적인 합리화 비판을 야기하지 않고서, 물화를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이해하는 것을 겨냥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체계적 구조가 상징적으로 매개된 생활세계에 침투하지 않는 한에서, 일정한 형태의―즉, ‘경제’와 ‘국가’의―체계통합은 모든 복합 사회에 필수적일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의 루카치 비평에도 불구하고, 하버마스는 명시적으로 물화의 문제계를 재해석하려는 자신의 시도가 근본적으로 맑스적인 자본주의 비판에 영향 받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접근이 중요한 방식으로, 특히 의사소통 행위가 언어적으로 매개된 상호작용의 구조에 내재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방식과 관련하여, 루카치의 그것과 갈라진다는 것을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화 비판은 생활세계를 식민화하는 체계적 구조에 대하여 근절할 수 없는 저항의 잠재성을 보유하고 있는, 의사소통 구조 그 자체에 뿌리를 두고 있다.


4. 두 가지의 상호주관성 개념


하버마스가 의사소통 행위이론의 관점에서 비판이론의 방향을 재설정한 것은 인정이론의 노선을 따라 호네트가 자신의 비판이론을 재작업하는 지평을 형성했다. 『권력 비판』(The Critique of Power)에서 호네트는 하버마스의 체계 개념을 탈규범화된 형태의 통합으로서 이의 제기하는데, 그에 따르면 하버마스의 입장은  규범적인 상호작용의 구조가 언제나 사회적‧정치적 제도들 속에 착근되어 있는 방식을 알 수 없도록 흐리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으로의 전회는 체계이론적 분석에 너무 많이 경도된 하버마스 이론에 내재하는 이원론을 피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자신의 의도와 달리, 호네트의 이론은 ‘체계’ 개념을 가지고 하버마스가 나타낸 현상의 현장을 ‘생활세계’, 즉 사회통합의 영역으로 환원함으로써 문제를 다루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개념적인 문제를 해명하기보다는 단순히 그것을 더 높은 수준으로 대체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호네트가 상품 동학에 관한 설명 없이, 생활세계를 참조하여 단지 인정의 망각으로서만 물화를 이론화하는 그 이상한 방식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물화 개념에 관한 호네트의 재해석은 순수한 상호주관성의 차원으로 물화 비판을 한정시킨다. 따라서 그는 그 개념의 비판적 중핵을 파악하지 못하는데, 그 개념의 본래 취지는 상호주관적 관계들이 비인간적 대상들 간의 관계들로 나타나고, 그리하여 인간 행위에 추상적 강박의 형태가 그 힘을 행사하는 그런 체계로서 자본주의의 특이성을 정확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동시대 정치 이론 안에서 물화 개념을 다시 살려 내기 위해, 물화의 규범적 논리를 드러내는 물화의 상호주관적 차원이 루카치의 텍스트에서보다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이론화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 점에선, 호네트가 확실히 옳았다. 그러나 루카치와 호네트 간의 (가상의) 논쟁에서 두 개의 경쟁적인 상호주관성 개념이 구별되어야만 한다는 사실 또한 명확해졌다. 한편으로, 호네트는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 모델 위에서 상호주관성을 이론화한다. 그의 이론에서 인정은 본질적으로 그 성격상 제도-외적인 것이다. 그 단어의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제도들은 인정의 장소 그 자체는 아니다. 인정은 개인들 간의 상호작용의 현장에서 일어난다. 장-필리페 데란티와 에마뉘엘 르노는 이러한 사실을 제도들이 인정의, 실제로는 주체화 그 자체의, 내재적이라기보다는 외재적인 조건으로서 이해되는 인정의 ‘표현적’ 개념이라 부른다.19) 제도들은 인정을 표현할 수도 있고, 부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문제를 바로 이런 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은 인정의 제도적 맥락을 인정에 관한 개인적 요구에 대해 구성적인 것이기보다는 보충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다. 호네트의 표현적 인정 이론이 인정 요구의 규범적 내용을 포착할지라도, 상호주관성이라는 상호작용론적 개념에 관한 의존은 사회 구조의 물질적 조건들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 다른 한편으로, 루카치의 이론에서 뽑아낼 수 있는 상호주관성 의념은, 그곳에선 제도들, 예컨대 자본이라는 제도가 어떤 의미에선 상호주관적 행위에 의해 구성되는 베일로 덮인 사회적 관계들의 형태로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도들은 단순히 인정의 구성에 외재적인 어떤 방식으로 인정을 표현하거나 부정하지 않으며, 이러한 상호주관성의 개념은 호네트의 이론이 전제로 하고 있는 상호작용 모델 안에서 이해될 수도 없다. 대신에 루카치는 상호작용을 더욱 두터운 의미로 이해하면서, 호네트의 모델에서 표현된 순수하게 인간 상호간의 상호주관성의 관점을 넘어서는데, 그의 상호작용 이해는 상호주관적 상호작용의 물질적 매개를 이론화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필경 탈규범화된 체계적 구조들이 사회적 관계들의 자기-불투명적 형태임을 드러냄으로써 그 비판이 계속 진행되는 한에서, 체계와 생활세계 사이의 엄격한 이분법은 루카치적 입장에서 명백히 배제되는데, 그러한 형태의 사회적 관계들은 어떤 의미에서 그것들이 인간 행위의 산물이고, 따라서 단순히 주어진 것도, 필연적이거나 객관적인 것도 아닌 한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

루카치적인 상호주관성의 모델을 자원으로 하여 물화 비판을 재실현하려는 나의 시도가 오래전에 신용을 잃은 ‘초주관성’(transsubjectivity)의 관점을 복권시키려는, 지지할 수 없는 생산주의적 규범적 전제에 다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루카치에 의해 윤곽이 그려진 상호주관성의 ‘생산주의적’ 모델과 함께 물질성의 차원 역시 동시대의 논쟁에서 추방해온 비판이론의 의사소통적 전환의 바로 그 가정을 동요시키는 데 착수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자본주의적 제도들 안에 고유한 비-의식적인 결정 형태를 의식하게 만듦으로써, 인간의 자기-결정에 관해 사회적 제도들을 더욱 성찰적으로 만드는 것과 관계가 있는 무엇인가를 탈-물화된 실천이 갖게 될 것이라는 통찰을 취하기 위해,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주체성의 모델을 유사-헤겔주의적 희화화로 환원할―그에 따라 탈물화된 실천이 그야말로 마음과 세계가 일치하는 것으로서 이해되는―필요는 없다.  만일 물화 비판이 자본주의에서의 사회적 지배를 극복하는 쪽으로 방향 설정된 정치적 실천의 이론화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상호주관성과 사회적 제도들 사이의 관계를 재탐구하는 것에 기초해야만 한다.

 

5. 물화의 물질성


맑스가 관찰했던 상품 물신주의의 본질은 인간 존재들 사이의 관계가 사물들―상품들―사이의 관계의 형태를 취하고, 그로 인해  그 근본적인 기반―사회적 관계 그 자체―을 은폐하는 자율적 형태를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식화에서 주목해야 할 결정적인 것은 물신주의가 확실히 특정한 종류의 오인(misrecognition), 즉 사물들 사이의 관계로 가려진(masked) 사회적 관계에 관한 오인일지라도, 그것은 이러한 오인에 제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더 나아가, 비록 노동력의 상품화와 기계화를 통해서 이것이 진실일지라도, 사물처럼(thing-like) 보이게 나타나는 것은 단지 타인들만이 아니다. 보다 근본적으로, 사물처럼, 객관적이고 명백히 불변하는 것으로 보이게 나타나는 것은 사회적 관계 그 자체이다. 이 점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은 맑스가 그것을 물신주의로 이론화했듯이, 사회적 현실성 그 자체의 수준에서, 즉 상품 교환의 사회적 활동 안에서 이루어진다. 비록 물신이 추상화일지라도, 그것은 객관적 실존을 갖는다. 우리는 이 점을 알프레드 존-레텔의 진술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품 소유자가 교환관계에서 ‘행하는’ 것은, 그들이 그것에 관해 무엇을 생각하고 그것에 대하여 무어라고 말하는가에 상관없이, 실제적 유아론(practical solipsism)이다.”20) 또는 지젝이 유머러스하게 말했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들은 “이론상으론 아니지만 실천적으론 물신주의자들이다.”21) 이것이 바로 물화된 사회적 실천의 물질성의 핵심적 지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루카치는 물화의 현상을 주관성과 객관성의 상호구성적 차원의 관점에서 분석한다.22) 물화는 상호구성의 관계 속에서 자본의 물신적 형태를 지지하는 실천의 형태이다. 루카치는 노동 과정의 합리화, 추상화, 노동의 상품화에 관한 분석을 인간 의식이 점차적으로 관조적이고, 수동적이고, 자본주의의 역동성에 고유한 인간 행위주체성의 차원을 파악할 수 없게 되는 방식에 관한 이론과 연관시켰는데, 이러한 분석의 연관이 자본주의적 지배의 자율적 형태가 극복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샤리는 이를 호네트가 거시-사회적 배경의 지위를 다루는 방식, 예컨대 경제적 과정이 “규범적 차원뿐 아니라 사실적으로도 경제적 과정 자체는 여전히 규범적으로 구조화된 사회 질서 속에 ‘깊이 파묻혀’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 대조한다.23) 그의 인정이론으로, 호네트는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들의 규범적 질서의 결정적 차원을 파악하지만, 그는 그러한 관계들의 물질적 구성을 무시하는 대가를 치르면서 그렇게 한다. 이러한 지점이 동시대 정치이론에 대한 그의 물화 비판의 타당성에 영향을 미친다.


[보론] 실재추상24)


‘실재추상’(real abstraction)이라는 토픽은 상품 물신주의 및 물화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된다. 맑스가 강조했듯이, 이것이 종종 간과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 경제의 범주적 형태는 ‘객관적 사유의 형태’이다.


이런 형태들이야말로 바로 부르주아 경제학의 범주를 이룬다. 이 형태들이야말로 상품생산이라는, 일정한 역사적 성격을 지니는 이 사회적 생산양식의 생산관계에 대해서 사회적 타당성을 갖는 객관적 사유형태이다. 그러므로 상품세계의 모든 신비, 즉 상품생산의 기초 위에서 노동생산물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마법과 요술을 우리가 다른 생산양식으로 옮아가는 즉시 곧바로 사라져버린다.(MEW23, 90; CI, 169; 『자본』 I-1, 139)


따라서 사회적 현실과 이데올로기 사이의 단순한 관계로서 읽힐 수 있는 것은 맑스가 객관적 사유의 형태라고 지칭한 것을 고려할 때 더욱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헬무트 라이켈트가 우리에게 상기시켰듯이(Reichelt 2002, 145), 맑스가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상품 형태의 결과로서 상호주관적으로 확립된 사유의 형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유의 형태는 그 스스로 상품 형태 속에, 즉 교환과 화폐의 수준인 맑스의 논점의 수준으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여기서 중요한 세 가지 측면이 있다. [1] 그 범주는 교환에서의 추상화 행위로부터 나온다. [2] 이러한 행위는 보편적이다. [3] 추상화 그 자체는 객관적, 즉, 실재적(real)이다. 결과적으로, 물신주의 그 자체는 객관적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에서 가치(순수하고 보편적인 추상화로서)는 모든 사회적 관계들의 ‘전환’으로 이어지는, 사물들의 자연적 속성으로 나타난다. 이에 관해선 다음을 보라.


자본-이윤 혹은 더 엄밀하게는 자본-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즉 가치와 부 일반의 성분들과 그것들의 원천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이 경제적 삼위일체 정식〕에서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신비화, 사회적 관계의 물화, 물질적 생산관계와 그것의 역사적‧사회적 규정성의 직접적인 결합이 완성되어 있다. 그것은 마법에 걸려 전도되고 거꾸로 선 세계이며, 거기에서는 자본 씨(Monsieur le Capital)와 토지 부인(Madame la Terre)이 사회적 등장인물(동시에 직접적인 단순한 물적 존재)로서 괴상한 춤을 추고 있다. 이런 잘못된 외관과 기만, 각기 다른 부의 사회적 요소들 간의 독립화와 화석화, 물적 존재의 인격화와 생산관계의 물화(物化), 일상생활의 종교―이런 모든 것들을 해소하는 것이 바로 고전파 경제학의 위대한 공적이다. 왜냐하면 고전파 경제학은 이자를 이윤의 일부분으로 환원하고 지대를 평균이윤을 넘는 초과분으로 환원함으로서 이 양자가 잉여가치에서 합류하도록 하기 때문이고, 또 유통과정을 단순한 형태변화로 표현하고 직접적 생산과정에서 상품의 가치와 잉여가치를 노동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MEW25, 838; 『자본』 Ⅲ-2, 1107-1108)


이러한 ‘거꾸로 뒤집혀진 세계’(topsy-turvy world)는 아래의 여덟 가지 측면에 주의함으로써 가장 잘 기술될 수 있다. [1] 물화는 사적 소유에 의해 지배되는 교환 사회에서,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교환되는 것을 통해, 즉 사물-매개된 관계로 이어지는 상품을 통해 매개된다(Elbe 2010, 231). [2] 사회적 권력 관계 및 종속 관계는, 그것들이 물건(object)과 같은 성격[Versachlichung]이 되는 한에서 더욱 객관적이게 된다. [3] 사회적 권력 관계는 전통적인 인격적 규범, 가치, 규준 등으로부터 분리되어진다. [4] 결정은 자본의 논리에 종속될 것이며, 정치적 권력은 도구적 합리성에 복종하게 된다. [5] 자본주의 체계에서 개인들은 사회적 성격 즉 실체들의 관계적 성격을 파괴하는 상품 형태로서, 원자화된 방식으로 서로를 관련시키기 시작한다. [6] 개인들의 삶 속에서 필수적인, 변하지 않는, 독립적인 힘으로서 상품의 형태를 취하는 실체의 자연과 같은 현상(appearance)은 상품의 생생한 ‘외양’(semblance)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의 이해관계를 숨긴다(MEW25, 839; 『자본』 Ⅲ-2, 1108).25) [7] 맑스가 이미 1845년에 깨달았던 것처럼, 사회적 관계는 형식화되고 전도되어 나타난다. 예컨대, 우리는 노동자로서 자유롭다고(형식적으로는 옳은) 우리가 믿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변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는 실제로는 서로에게 훨씬 더 의존적이다. [8] 자연은 무한한 착취의 대상이 된다. 이 시점에서, 마지막 요점을 언급하려 한다. 맑스의 분석의 결과로, 자연은 더 이상 외재적이지 않은 무엇인가로 바뀌고, 생산과정이 이제 더 이상 외부로부터 제한되지 않고, 내적인 법칙, 즉 자본의 법칙을 따라서 스스로를 재생산하기 때문에, 이제 무제한적으로 확장될 수 있다. 요점을 반복하자면(물신주의 특성에 관한 해석에서 종종 간과되기 때문에), 맑스의 주장은 “세계가 역전되는 것”이 가치가 자본을 통해 구성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신념과 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념은 사회적 행위주체들의 등 위에서, 교환의 객관적 행위를 통해, 객관적으로 확립된다.]  “노동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화일 뿐만 아니라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추상화이기도 하다.”(MEW 43, 51; McNally 2012, 123). 실재적 과정으로서 경제적 과정의 추상화를 확립하기 위해, 보편적 교환 가능성(exchangeability)을 통해 보편화는 또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발생한다는 것, 확실히 ‘매개’(MEW 42, 77) 또는 ‘사회적 행위’(MEW 23, 101; 『자본』 I-1, 152)가 교환 그 자체를 통해 이렇게 보편적으로 현존하는 추상화를 확립한다는 사실을 가정할 필요가 있다. 화폐의 도입을 통해, 모든 실체는 실재로 추상(really abstract)이 된다. “즉, 교환가치는 상품으로부터 독립적인 물질적 실존을 수여받는다.”(MEW 42, 80). 다르게 말하자면, 실체들의 보편적 (교환가치를 통한) 교환가능성은 사회적으로 실재(socially real)가 된다. 19세기 사례와 관련하여 루카치가 훌륭하게 진술했듯이,


[가치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이 갖는 독창성은 추상에 대한 그의 취급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사용 가치와 교환 가치의 점점 더 강하게 발전하는 연관과 관련된 노동의 변화는, 특정한 대상에 있어서의 구체적 노동을 추상적이고 가치를 창조하는 노동으로 변화하게 하고 사회적 필요 노동의 실재성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러한 과정을 관념론적 형이상학의 편견 없이 고찰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추상 과정이 사회적 실재성 내부에 있는 실재적 과정이라는 인식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는 이미 다른 문맥들 속에서 노동의 평균성이 노동의 사회성의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서도 자연 발생적이고 객관적으로 발생한다는 점과 그리고 노동의 평균성이 노동 대상의 존재론적 속성과 무관한 단순한 인식이 아니라, 노동의 증대하는 사회화의 경과 속에서 노동 자체의 새로운 존재 범주의 발생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그러한 노동의 사회화는 비로소 한참 뒤에 이론적으로 의식된다.] 또한 사회적으로 필요한(따라서 사실 자체에 의하여 ipso facto 추상적인) 노동은 하나의 실재성이자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의 한 계기이며, 이 계기에 의해서 실재적 대상 안에서 수행된 실재적 추상인데, 이러한 추상이 의식에 의해서 수행되느냐 아니냐와는 완전히 무관하다. 19세기에 수백만의 자립적인 수공업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필요 노동이라는 추상의 효력을 자신들의 파산으로 경험하였다. 즉 그들은 실제로 그들이 어떤 사회적 과정에 의해서 수행된 추상에 직면하고 있다는 구체적 결론을 이무 의심 없이 경험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추상은 사람을 치는 자동차와 같은 사실성의 존재론적 엄격성이다.(Lukacs 1984, 590; 『사회적 존재의 존재론』, 191)


아도르노는 그의 논문 「사회」에서 맑스가 ‘사회적 행위’(social deed)라고 부른 그것을 ‘사회의 기본적 사실’로서 해석한다. 이러한 ‘기본적 사실’은 그것의 실현이 ‘객관적 추상화’로 이어지고, 그것이 사회적 일관성, 사회적 종합, 사회적 관계의 형태를 확립하는 한에서, 하나의 원칙(principle)으로서 사회의 총체성을 구성하는 것, 바로 ‘교환’이다(Adorno, GS8, 13).26) 따라서, 사회적 적대는 이러한 원칙, 곧 그와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가시화되는 것을 통해 재생산된다. 실재적 추상화는 논리적으로 보편화(universalization), 텅 비어있음(emptiness), 물화, 합법성(lawfulness) 등과 같이, 그 모든 것들이 자본의 논리로부터 출현하고, 그 뿌리가 상품교환에 있는 개념들을 포함하고 있는, 아도르노가 그의 논문에서 분석한 그런 현상으로 이어진다. 예컨대, 도구적 사유는 상품 및 화폐 형태에 의해 도입된 신용 원칙의 (역전된) 주체적 표현이다. 따라서 ‘교환원칙과 냉담함’은 하나이자 동일한 현상(Adorno 2003a, 35)이고, 다음과 같은 주요한 원칙으로 이어진다. “교환가치의 교환원칙은 특수한 것에 대한 보편적인 것의 지배, 즉 그 강제적 구성원에 대한 사회의 지배와 함께, 모든 특수한 사회적 위계를 종합한다.”(Adorno 1993, 61; 『사회학 강의』, 75)27) 따라서, 경험, 사물, 사안의 특이성과 예외성은 모든 개인들을 경제적 범주의 기능과정을 통해 포괄하는 추상적 보편자에 의해 감추어지고 파괴된다(Adorno 2003b, 72). 이것은 거의 맑스가 『그룬트뤼세』에서 화폐에 관해 말한 것에 거의 근접한다. 맑스가 보기에, 화폐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외양(semblance)인 동시에 현실(reality)이다. “화폐는 본래 가치의 표현이다. 그러나 사회적 실천 속에서 모든 것이 역전된다. 그리고 모든 현실적 생산물이 […] 화폐의 표현이 된다(MEW 42, 122).

요약하자면, 화폐는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의 기호인 것처럼, 추상적인 무엇인가를 상징하거나 또는 표현하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맑스의 테제는 “화폐가 사회의 보편적인 관계이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폐가 없다면, 사회는 더 이상 현재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화폐는 이러한 형태의 지배 아래로 들어가는 실체들과의 모든 관련성을 규제하고 틀 짓는다. 그와 같이, 화폐는 정신적 관련성을 위한 칸트의 도식화 기능처럼 물질적으로 기능한다. 화폐 점유자로서, 개인은 그 자신을 구체적인 개인으로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추상적인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과 관련 맺을 수 있다(MEGA II.2, 53, 38). 인간성은 원래 소유의 주체로서, 개인 안에 보편적인 것으로서 이해되는 법적인 용어이다. 그러나 인간성은 법적 관계의 보편성이 화폐에 의해 구성되는 사회적 관계들의 보편성을 따라 함께 가는 한에서,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의 사물성으로서 화폐의 보편적 강제력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교환 관계가 이제 보편화되고 지구화되었기 때문에 자본주의에서 화폐와 더불어 우리는 잠재적으로 모든 곳에 갈 수 있고 모든 곳에 있을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 존재로서 우리들 자신을 생각할 수 있다.


6. 정치적 물화 비판을 향하여


하바마스, 호네트, 루카치의 물화 비판은 물화의 렌즈를 통해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 다양한 방식을 함의한다. 특히 샤리는 호네트의 물화 이론의 측면은 루카치의 이론을 거스르기보다는 그것과 함께 취해질 때 정치적 물화 비판을 사유하는 데 있어서 유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체계와 생활세계의 개념을 통한 하버마스의 물화의 재설정은 물화를 상호 이해에 이르는 쪽으로 지향된 의사소통에 의해 정당하게 관리되어야 할 상호주관적 관계에 침범하는 체계적 메커니즘의 효과로 이론화한다. 그래서 하버마스가 보기에, 물화는 단순히 생활세계의 투사(投射)가 아니다. 그렇지만, 체계와 생활세계로의 사회의 개념적 이분화 탓에, 루카치적 분석의 비판적 변증법적 성격은 상실된다. 그 규범성이 베일에 가려진 자율화된 구조로서 루카치가 체계를 이론화했던 것과 달리, 하버마스는 탈규범화된 구조로서 체계를 해석한다. 더 나아가, 그의 체계로서의 기능주의적 사회 이론과 더불어, 하버마스의 이론은 암묵적으로 현존하는 형태의 경제와 국가를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므로, 변혁적 정치를 제시할 수 없다. 경제와 국가를 ‘체계’의 범주 안으로 주저앉혀 버림으로써, 하버마스는 급진적 참여 민주주의, 즉 탈-자율화된 형태의 정치 개념을 정초할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을 양도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형태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하버마스의 관점에선 정치적 ‘체계’로서 사유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물화 개념의 정치-이론적 중요성에 관한 하버마스의 이해는 제한적이다. 그는 생활세계를 물화하는 체계적 구조를 변혁하기보다는, 물화의 형태에 맞서 동원되는 사회운동만을 생활세계가 침해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경계-방어 형태의 정치로서 이해할 뿐이다.

정치적 물화 이론으로서 호네트의 물화 이론이 함의하는 바는 모호하다. 한편으로, 하버마스의 분석에 중심적이었던 ‘체계적’ 합리화에 관한 분석으로부터 호네트가 떠난 것은 정치적 물화 비판을 위해 유익한 방향이었다. 호네트는 하버마스의 설명의 핵심에 있는 탈규범화된 체계적 구조에 관한 기능주의적 의념을 거부한다. 그로 인해 호네트의 이론은 생활세계에서 행위주체들의 반사적인 경계-방어에 단순히 국한되지 않는 물화에 관한 다원화된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대신에, ‘인정 망각’의 다양한 사례들의 구체적인 원인 및 장소는, 각각의 경우에 어떻게 그러한 망각이 체계적으로 가능한지를 탐구하기 위해선, 개별적으로 탐구되어야만 한다. 호네트에 따르면, “만약 모든 물화의 핵심이 ‘인정 망각’에 있다면, 물화의 사회적 원인은, 그러한 망각을 체계적으로 가능하게 하고 항구화하는 실천과 메커니즘에서 찾아질 수 있어야 한다.”28) 그러한 경우에, 호네트의 이론은 사회의 일반적인 구조화 원칙과 그에 상응하는 동시에 상호적으로 구성적인, 물화의 상호주관적 현상 사이의 관계에 관한 분석―사실상, 루카치가 시도했던 것과 유사한 기획―을 배제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텍스트의 많은 지점에서, 인정 망각은 주로 인지적 과정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그래서 “선행하는 인정의 사실성이 인지과정에서 망각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요구된다.29) 그러한 순간에, 호네트는 그것들을 구성하는 구조와 더불어 사회적 관계들의 매개에 관한 설명을 배제하면서, 단지 물화 현상을 정서적인 상호주관적 관계의 영역으로 환원할 뿐인 것 같다. 심지어 호네트 자신의 이론적 궤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사회적 실천의 탈-물화된 형태의 규범을 위한 기반으로서 인간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타자들과 정서적으로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에 관한 그 초점은 호네트 초기의 ‘인정 투쟁’의 정치적 함의를 결여하고 있다. 물화에 관한 호네트의 작업에서, 초연함의 개념으로 그 윤곽이 그려지고 있는 참여적 개입의 결핍은 인간 존재의 우선적으로, 능동적이고, 인정적인 자세가 단지 망각되어 왔다는 것을 나타내지만, 이러한 망각이 사회이론이나 정치이론에서 어떻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는 전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물신주의 비판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물화 개념이 동시대 민주주의적 정치를 조명할 수 있는 개념적 힘을 유지하는지의 여부를 반드시 물어야만 한다.

이 문제에 관한 진지한 고려는 널리 인정되고 있듯이 그동안 충분하게 이론화되지 못했고, 단지 루카치의 설명에서도 암시만 되고 있었던 물화 비판의 매우 중요한 규범적 차원을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에서, 호네트의 접근의 강점을 무시할 수 없다. 나아가 호네트가 그랬듯이, ‘초연함’이라는 개념의 전면화는 정치이론에서 정치적 실천의 규범적 기준으로서 탈-물화의 중요성을 사유하려는 시도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화의 특징인 참여적 개입의 결핍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러한 접근은 그 잠재적인 변혁의 관점에서 사회적‧경제적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의 논리로―또는 호네트의 용어대로라면, 인정의 규범적 논리로―그것들을 번역하면서, 자율화된 사회적 과정의 개입 지점을 탐구하는 비판으로 얼마든지 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전도유망한 탐구 노선은 호네트의 연구에서 추구되지 않았다. 그의 분석은 규범적 물화의 논리의 가능성을 나타냈지만, 정치적 물화 비판은 하버마스적 의미에서 ‘체계’로 자본주의를 환원하지 않고서, 인정 이론의 규범적 수준과 자본주의 구조에 관한 사회-이론적 분석 사이의 번역 지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호네트가 어쨌든 자본주의의 구조를 말하는 범위에서, 그는 자본의 가치증식 과정에 관해, 예컨대 심지어 “흡사 ‘익명적’인 것처럼 보이는 경제적 가치증식 과정이 얼마만큼이나 규범적 규칙을 통해 관철되고 있는가 [하는 점을 너무나 명백하게 알게 해준다]”라고 주장하면서, 다소 문제적인 이해를 가지고 처리하는 경향이 있다.30) 이러한 이해로 인해 호네트는 자본주의 가치증식 과정을 그것의 인정질서로 환원한다는 비난―예컨대, 낸시 프레이저에 의해―에 처하고 말았다. 프레이저의 비판은 호네트가 자본주의의 인정 질서에 어떤 외부성(exteriority)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단지 그것의 인정 질서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그 여부에 관한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호네트는 자신의 기획을 ‘도덕적 일원론’의 일종에 이끌린 것으로 기술해왔는데, 그것은 규범적으로 실질적인 가치가 있는 사회이론은 “제도화된 사회 영역 속에서 항상 희망적 개선에 대한 전망을 열어주는 규범적 통합의 원리”를 발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31) 다시 말해 『인정투쟁』에서 호네트가 주장했듯이, 인정은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문법’이다. 그러므로 계급투쟁의 관점, 또는 반자본주의 관점에서 ‘재분배’에 관해 요구하는 투쟁조차도, 재분배에 대한 요구의 기반으로서 인정에 관한 도덕적 논리를 전제한다. 호네트에 따르면, 맑스주의 이론은 그 과학적 주장을 확보하기 위해 자본의 동학에 관한 메타-정치 이론에 인정의 논리를 희생시키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맑스주의 이론이 “이러한 (자본의 가치증식의) 과정에 도덕적 분배 요구를 내재화시키”기 위해 “동일한 과정을 가치 매개적 소통에 아주 강하게 종속된 것으로 이해”해야만 하는 한에서, 이는 자기-모순적이라고 호네트는 주장한다.32) 이러한 의미에서, 호네트의 테제가 보통 말하기를 청년 맑스에 의해 만들어진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 사이의 구별을 거부하는, 그런 정치적 해방의 구조를 인정이 나타낸다고 말하는 것으로 번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를 위해, 호네트는 위에서 제기된 그 망설임과는 반대로 오늘날 정치를 이론화하는 것에 대해 인정이론적 물화 개념이 갖고 있는 타당성에 관해, 이러한 방식으로 재번역된 물화 이론만이 정치의 내재적 논리의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호네트는 그의 자본주의적 인정 질서 이론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인정한다.


물론 [이런 식의 개념이] 오늘날 자본주의의 발전 동학을 설명하는 데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런 개념들은 주체들이 특정한 인정 기대를 갖고 이러한 과정들을 대한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발전 과정과 관련된 규범적 제한들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혀줄 것이다.33)


따라서 인정이론적 접근은 규범적 사회이론의 관점에서 제시된 ‘정치의 자율성’(the autonomy of politics)에 관한 단언으로 보인다.34)

결국 샤리는 호네트가 물신주의 비판으로부터 물화 비판을 분리시킴으로써, 현존하는 사회-경제적 관계들의 구조를 변혁하기 위해 투쟁하는 정치 운동의 차원을 고려하지 않고 정치를 인정의 논리에 제한하면서, 물화 이론이 오늘날 해방적인 정치 투쟁의 폭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경제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문제적인 분리를 강화하고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지배의 물질적 구조를 생활세계 개념 안으로 완벽하게 흡수하여, 순수하게 정화된 상호주관성의 개념을 가지고 작업하는 호네트 자신의 경향에 저항한다면야, 샤리는 물화의 사회적 메커니즘에 관한 호네트의 다원화된 이해가 탈-물화의 정치를 내포하는 유익한 방식을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다양한 물화의 경험으로 시작하는 호네트의 다원화된 물화 설명은 물화의 경험이 오직 엄밀한 의미의 그러한 총체성의 분석의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 루카치적 설명을 확장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진정한 정치적 물화 비판은 탈-물화된 실천의 구조를 정확히 서술하기 위해 이러한 두 계기들 사이의 이행을 더욱 적절하게 이론화할 것이다.

샤리는, 반자본주의 투쟁을 분배에 관한 투쟁으로 파악하고, 그로 인해 그러한 투쟁의 요구를 분배적 정의의 관점에서 주로 제기된 요구로 해석함으로써 그 투쟁의 변혁적 잠재성을 오인하는 경향이 있는, 『분배냐, 인정이냐?』에서의 프레이저와 호네트의 논쟁의 한계를 정치적 물화 비판의 아이디어로 넘어서기를 추구한다. 예컨대, 신자유주의적 지구화에 맞선 반자본주의 투쟁은 비록 그것이 확실히 사회적 무시의 감정에 의해 동기 부여되고 있다고 할지라도, 기존의 제도와 제도화된 합법화 및 분배의 원칙 안에서의 사회적 인정에 관한 요구를 넘어서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브라질에서의 무토지 [농업]노동자 운동(the landless [Rural] workers’ movement: MTS)을 예로 들자면, 그러한 운동은 무토지 가족이 사용하기 위해 5만 제곱킬로미터 이상의 토지를 몰수하면서, 추방된 유랑 농민 인구에 의한 대규모 토지 점유를 조직해왔다. 이러한 운동의 논리는 사회적 인정 요구로 환원될 수 없다. 물론 인정이 명백히 그 투쟁의 중요한 차원이긴 하지만. 인정에 관한 요구를 넘어, 점유된 토지에 민주적으로 조직된 농업 생산자 농촌 협동조합을 세우면서, 무토지 노동자들은 사유 재산 제도 그 자체에 맞서 투쟁했다. 이러한 운동에서 나타나는 정치화의 구조는 자본주의 지배 분석에서 그러한 구조들을 탈-물화된 정치적 형태로 바꿀 수 있는 상호주관적 형태의 실천으로의 번안을 끌어낸다. 마찬가지로, 볼리비아, 인도 및 세계 다른 지역에서의 공공 용수의 민영화 및 상품화에 맞선 ‘물 전쟁’(Water Wars)은 오늘날 많은 정치적 투쟁들이 단지 인정의 논리 안에서만 충분히 파악될 수 없고, 그것들이 분배에 관한 요구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더욱 더 다른 예이다. 이러한 것들은 물화에 맞선 투쟁들이며, 그것들은 현 상황에서 민주주의적 투쟁을 이론화하는 데 있어서 물화의 상호주관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을 모두 고려하는 물화 비판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1) 칼 마르크스, 「직접적 생산과정의 제결과」, 『경제학 노트』, 김호균 옮김, 이론과실천, 1988, 75-77.

2) Anita Chari, “Reification,” in Encyclopedia of Philosophy and the Social Sciences, ed. Byron Kaldis. (London: Sage, 2013), pp.803-804.

3) 이하의 내용은 Anita Chari, “Toward a political critique of reification: Lukács, Honneth and the aims of critical theory,” Philosophy and Social Criticism 36/5(2010), pp.587–606을 재구성한 것이다. 

4) Moishe Postone, Time, Labor, and Social Domination: A Reinterpretation of Marx’s Critical Theory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part II, ch. 4, pp. 123–83.

5) Luká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p. 90[한글판: 189]. cf.“이 무기력은 노동과정의 합리화와 기계화가 점차 증가함에 따라 노동자의 작업이 점점 더 그 활동성을 잃어 정관적 태도(靜觀的: kontemlative Haltung)가 됨으로써 더욱 심화된다.”[한글판: 188]

6) Axel Honneth, ‘Redistribution as Recognition’, in Redistribution or Recognition? (New York: Verso, 2003), p. 132[한글판: 204-205].

7) ibid., p. 134[한글판: 206-207].

8) Axel Honneth, ‘The Point of Recognition’, in Redistribution or Recognition? (New York: Verso, 2003), pp. 250–1[한글판: 375].

9) Honneth, Reification, p. 24[한글판: 28].

10) ibid., p. 27[한글판: 31-32].

11) ibid., p. 31[한글판: 39].

12) ibid., p. 36[한글판: 43].

13) ibid., pp. 41–6[한글판: 50-55].

14) 세일라 벤하비브, 『비판, 규범, 유토피아』, 정대성 옮김, 울력, 2008.

15) Jürgen Habermas, ‘Excursus on the Obsolescence of the Production Paradigm’, in The Philosophical Discourse of Modernity: Twelve Lectures (Cambridge, MA: MIT Press, 1987), p. 82[한글판: 109].

16) ibid., p. 358[한글판: 520].

17) ibid., p. 360[한글판: 523].

18) Habermas, The 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vol. 2, p. 374.

19) Jean-Philippe Deranty and Emmanuel Renault, ‘Politicizing Honneth’s Ethics of Recognition’, in Thesis Eleven 88 (February 2007): 99–100.

20) Alfred Sohn-Rethel, Geistige Und Kõrperliche Arbeit: Zur Epistemologie Der Abendlãn- dischen Geschichte (Weinheim: VCH, 1989), p. 37[한글판: 61]

21) Slavoj Žiž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 (London: Verso, 1989), p. 31[한글판: 66].

22) Lukács, History and Class Consciousness, p. 84. [cf.“상품구조의 본질은, 사람들 간의 관계가 사물의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 이로부터 일종의 ‘유령적 대상성’(spectral objectivity; gespenstige Gegenständlichkeit)이 성립되며 이것이 대상성의 근본적인 지반인 인간들 간의 관계를 겉보기에는 완전히 완결적이고 합리적인 듯이 보이는 엄역한 자기법칙성으로써 숨긴다는 사실에 기초를 둔다. … 상품의 물신성에서 비롯된 대상성형식 및 이에 부속되는 주체의 태도라는 근본문제에만 집중하겠다. …다 알다시피 상품유통 및 이에 상응하여 주체적‧객관적 측면에서 이루어지는 상품관계는 사회의 매우 원시적인 발전단계에서도 이미 존재하기는 하였다. …상품형식이 모든 생의 표현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형식, 곧 지배적 형식이 된 사회와 상품형식이 다만 삽화적으로 등장할 뿐인 사회, 이 둘의 구별은 실로 질적인 구별이다. 왜냐하면 비교되는 두 사회의 주체적‧객체적 현상 전반은 질적 차이에 따라서 서로 다른 대상성형식을 띠기 때문이다.”, 180-1]

23) Honneth, ‘The Point of Recognition’, p. 256[한글판: 383].

24) Christian Lotz, The Capitalist Schema: Time, Money, and the Culture of Abstraction, Lexington Books, Lanham MD, 2014, pp.51-54.

25) “그럼에도 고전파 경제학의 가장 훌륭한 대변인조차도―이것은 부르주아적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자신들이 비판적으로 해소한 외관의 세계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사로잡혀 있고, 따라서 모두 많든 적든 불철저와 불완전함과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빠져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현실의 생산담당자들이 이 자본 이자,토지-지대, 노동-임금이라는 소외되고 불합리한 형태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 역시 아주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 속에서 활동하고 있고 매일 관계를 맺고 있는 외관상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마찬가지로 당연히 속류경제학―즉 현실의 생산담당자들의 일상적인 생각을 교육적인〔어느 정도는 교의적이기도 한〕형태로 옮긴 것이면서, 이들 관념 속에 몇 가지 조리 있는 질서를 도입한 속류 경제학―은 일체의 내적 연관을 소거해버린 바로 이 삼위일체 정식 속에서야말로 자신의 천박한 교만을 받쳐주는 숭고한 토대(모든 의혹을 날려버리는)를 발견한다. 이 정식은 동시에 지배계급의 이익과도 일치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배계급의 수입원에 대한 자연적 필연성과 영속적인 정당성을 선언하고 그것을 하나의 교의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26) “사회, 조직화된 사회는 사회적으로 조직된 인간 사이의 기능적 연관관계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의 존재로서, 교환에 의해 규정되는 연관관계입니다. 사회를 원래부터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교환관계입니다. 교환관계를 통해서 사회는 사회에 특별한 의미에서 개념적으로 기초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실재적으로도 기초가 만들어집니다. 교환관계는 사회의 개념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을 잠재적으로 결합시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은 조심스럽게 표현한다면, 교환관계는 확실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사회들에 뒤이어 나타날 사회들의 전제조건까지도 표현합니다. 더 이상 교환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 하는 논의는 자본주의적 사회들에 뒤이어 나타날 사회들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을 것임이 확실합니다. … 오히려 이러한 추상화는 교환의 진행 자체, 즉 근본적인 사회적 사실의 특별한 형식입니다. 교환의 진행 자체에 의해서 사회적 조직화와 같은 것이 산출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점이 사회에 관한 이론의 중심점이라고 생각합니다.”(『사회학 강의』, 70-71)

27) “교환 가치의 추상성은, 모든 사회적인 계층에 앞서서, 특수한 것에 대한 일반적인 것의 지배, 강제적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에 대한 사회의 지배와 함께 간다.”(『사회학 강의』, 75)

28) Honneth, Reification, p. 79[한글판: 95].

29) ibid., p. 58[한글판: 69].

30) Honneth, ‘The Point of Recognition’, p. 254[한글판: 380]

31) ibid[한글판: 381].

32) ibid[한글판: 379].

33) ibid., p. 250[한글판: 374].

34) 이 점에 관해선, Étienne Balibar, ‘Three Concepts of Politics: Emancipation, Transformation, Civility’, in Politics and the Other Scene, trans. C. Jones, J. Swenson and C. Turner (London: Verso, 2002), pp. 1–39[한글판: 『대중들의 공포』, 제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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