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본

자본 물신주의

인서비1 2018. 5. 31. 14:29

환상 없는 허구: 객관적 망각으로서 자본 물신주의


크리스챤 로츠



초록: 이 논문에서 나는 물신주의 개념이 사회적 망각의 과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에, 일단 자본의 개념에 관한 세 가지 대중적인 신비화를 탐구했다. 나는 물신주의가 집단적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한에서, 우리가 물신주의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나는 총체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시하진 않고 있다. 왜냐하면 지젝이 상품 물신주의가 “상품 형태의 무의식”이라 주장했고, 제임슨은 소비사회의 “역사적 기억상실증”(historical amnesia)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상품 물신주의의 객관적 특성의 관념을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성찰이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이러한 입장들의 확장으로서 이해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첫째, 나의 성찰은 상품의 개념의 범위를 넘어서고, 물신주의의 개념을 자본의 개념과 다시 결속시킨다. 둘째, 그러한 성찰은 기억상실 및 물신주의의 문제를 마르크스의 방법과 다시 결부시킨다.


핵심어: 마르크스Marx, 상품 물신주의commodity fetishism, 자본capital, 부채debt, 추상abstraction



서론

수입의 형태와 수입의 원천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의 가장 물신주의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그 표면에 나타남으로써, 숨겨진 연관성과 이어주는 중간적인 연결고리로부터 분리된 그들의 실존의 형태이다. 따라서 토지는 지대의 원천이 되고, 자본은 이윤의 원천이 되며, 노동은 임금의 원천이 된다. 실제적 전도가 표현되고 있는 그 왜곡된(verdrehte) 형태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생산양식의 행위주체들의 관점에서 재생산된다. 그것은 일종의 환상 없는 허구, 통속의 종교이다.1)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연구자들의 세대는 루카치와 비판이론의 뒤를 따라서, 마르크스의 상품물신주의 개념을 통해 작업해왔다. 그러나 막대한 양의 비판적 지성의 에너지가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이 특별한 개념에 쓰였지만, 물신주의 개념은 그것이 『자본』의 1장에서 제시되고 있듯이, 주로 마르크스의 상품 물신주의와 관련해서만 논의되어 왔다. 너무도 많은 독자들이 마르크스가 상품 물신주의를 도입하고 있는, 오직 1장, 4절만을 읽는 것 같기 때문에, 이 개념의 두 가지 중요한 측면이 종종 간과되었다. [1] 마르크스는 물신주의 개념이 또한 다른 사회-경제적 범주들, 예컨대 화폐와 자본에 속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추가적으로 제3권에서 이자 및 부채의 개념이 가장 추상적이고 무의미한(emptiest) 형태라는 그의 주장까지, 『자본』의 전체 세 권에서 그가 물신주의를 다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물신주의로서 이자 및 부채는 또한 1861년과 1683년 사이의 초고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2] 물신주의 개념은, 그의 연구의 모든 국면에서 마르크스가 그의 분석에서 각 방법론적 단계에 담겨 있는 망각의 과정을 역전(파기)시키기를 시도하는 한에서, 직접적으로 『자본』에서의 그의 방법과 관련되며 얽혀 있다. 따라서, 『자본』의 목표 중 하나는 사회가 자본에 의해 사회가 특징으로 하는 기억상실증을 역전(파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기억상실증은 자본주의 사회 그 자체가 그 자체를 망각하는 한에서, 자기와 관련된 것이다. 따라서 물신주의는 주관적-객관적 개념이다. 물신주의는 ‘환각 없는 망각’이라는 그의 놀라운 문장을 갖고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주관적 관계이다.

물신주의 개념이 실제로 현존하는 사회적 망각의 과정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더욱 더 주장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나는 자본 개념에 관한 몇 몇의 대중적 신비화를 간략히 고찰하고자 한다. 나는 물신주의가 집단적일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한에서 [우리는] 물신주의적인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나는 여기서 총체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열지는 않고 있다. 왜냐하면 예컨대 [이미] 지젝이 상품물신주의가 ‘상품형태의 무의식’2)이라고 주장했고, 제임슨은 객관적 성질의 상품물신주의의 관념을 그가 소비사회의 ‘역사적 기억상실증’3)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자본


마르크스의 물신주의 개념을 더욱 상세히 다루기 전에, 자본에 관한 세 가지의 대중적인 오해를 간략하게 스케치하고자 한다. 특별히 이러한 오해들이 결국 자본이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조직화와 그것 자체에 대한 관계의 객관적 형태를 위한 조건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자본에 관한 물신화된 개념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자본과 노동


자본 개념에 관한 첫 번째 혼란은 자본이 어느 정도까지 화폐로부터 차별화되는지에 관한 문제로부터 비롯된다. 많은 대중적 논의 및 미디어에서, 자본은 경제에 투자된 화폐와 동일시된다. 비록 이러한 개념화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만일 우리가 자본을 단순히 다른 무엇인가를 구매하기 위해 사용되는 무엇인가로 나타낸다면, 자본은 오직 화폐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구매하는 데 사용되는 화폐이기 때문에, 이것은 여전히 자본으로서 (아직) 기능하지 않는 화폐이다. 따라서 자본은 무엇인가를 구매하기 위해 실제로는 사용되지 않는다. 출자금(investment money)이 노동력, 기계, 기술, 땅, 건물 등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투자 형태의 화폐의 궁극적인 목적은 물론 투자되었던 화폐의 금액을 축적하(늘리)는 것이다. 자본이 시장에서의 교환을 위해서 사용되는 한에서―예컨대, 그것이 노동력이나 교육을 구매하기 위해 사용될 때―그것이 무엇인가(이 경우에는 노동력)를 구입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화폐로서 기능하는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자본이 더 많은 화폐의 형태로 잉여가를 가진 그 소유자에게로 되돌아가기로 되어 있는 한에서, 자본으로서 화폐는 다르게 기능한다. 그러므로, 투자의 유일한 목적은 궁극적으로 더 많은 투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중요하게 구별을 실천하는데, 더욱 복잡한 모든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두 개의 다른 통화 형태들로서 그가 ‘화폐로서의 화폐’라고 부른 것과 ‘자본으로서의 화폐’라고 부른 것 사이에 구별을 도입한다. 후자의 통화는 자본으로서 화폐에 기초한 예컨대 우리의 사회에 사회적으로(그리고 역사적으로) 특수한 방향, 동학, 그리고 목적을 부여한다. 사회적 조직화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원칙으로서의 자본을 향한 전환과 더불어, 그것은 더 이상 시장 교환을 조절하는 소비가 아니다. 오히려, 소비(예컨대, 상품 구매)와 관련된 모든 시장 교환은 추정상 평등과 대칭에 기초한 교환이 아니라 대신에, 그것들이 물건의 구매와 소비가 부를 창조하는 도구로서 기능하는―예컨대, 그것들이 애초부터 비대칭적인―교환인, 그런 교환으로 이 모든 시장 교환을 바꾸는 새로운 지침을 수여받는다. 다른 말로 하면, 상품 및 화폐 교환의 형태에서의 소비는 잉여가치에 포괄되어 지고, 결과적으로 소비는 자본에 의존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다. 예컨대, 사람들은 너무 많은 소비가 존재한다고,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는 ‘소비 사회’라고 주장할 수 있다. 비록 이러한 관점이 총체적으로 부정확하지 않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그것이 자본의 기능이 되기 때문에, 너무 많은 소비가 존재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중요한 문제를 놓친다.

‘너무 많은’ 소비라는 사실 그 자체는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가 다른 종류의 소비, 즉 부를 발생시키고 그러므로 계급 권력, 억압, 불평등, 노동력과 대지의 착취에 기여하는 소비에 속한다는 것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가 시장에서 수행하는 모든 구매는, 비록 그것이 여전히 물건들을 소비하는 목적으로 구매되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그것이 자본에 포괄되자마자, 실제로는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에 기초하지 않는다. 소비의 모든 행위가 이제 (필수적으로) 부와 성장을 발생시키는 것, 예컨대 잉여가치를 발생시키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상품교환의 ‘표면’에 대해 언급했을 때 의도했던 것이다. 상품교환, 예컨대 소비와 더불어 시장교환은 단지 교환의 표면 아래에 숨겨져 있는 주요 부분인, 아이스버그의 (보이는)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화폐와 자본 사이의 구별을 명확히 하는 것은 상류계급을 부자와, 그리고 자본가를 화폐를 많이 가진 누군가와의 대중적인 동일시를 위해 중요하다. 비록 경험적으로 대부분의 경우에 이것이 옳을지라도, 부유한 사람이 그것을 유통 속으로 던져 넣지 않고 그의 돈을 모두 쓰거나 그의 돈을 저축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요점을 흐린다. 예컨대, 선물로 줄 수도 있고, 오로지 소비를 위해서만 사용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화폐는 자본으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로서만 기능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컨대, 전체 사회의 조직화가 자본에 의존하는 사회에서, 화폐는 구매가 자본 유통에 포괄되고, 은행이 저축된 화폐가 ‘일하도록’ 두는 한에서, 소비되거나 저축된 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으로서 기능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화폐적 관계는 본질적으로 자본 관계이다. 화폐 유통은 자본 순환에 포괄된다.


자본은 사물인가?


두 번째 혼란은 첫 번째 오해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자본을 자산, 인간, 화폐, 투자금 등과 같은 유형의 사물들의 형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로서 나타내는 것은 공적인 논의에서 뿐만 아니라 문헌에서도 공통적이다. 나는 왜 자본이 ‘사물’로서, ‘유형의’ 무엇인가로, 또는 누군가가 ‘가진’ ‘자산’으로서 개념화될 수 없는지를 더욱 자세하게 다른 곳에서 주장했다.4) 여기서 나는 유형의 사물 및 소유물로서 자본에 대해 생각하려는 시도가 그 본질을 신비화하고, 결국엔 두 가지 주요한 방식으로 자본 물신주의를 긍정한다는 것을 지적하기 원한다. 첫째, 자본이 우리가 ‘갖고 있는’ 또는 소유하는 무엇인가라는 가정은 자본이 유통 속에, 운동 속에, 그리고 수익화 과정(환류: returning) 속에 있을 경우에만 그것이 자본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한에서 자본이 관계이자 과정이라는 사실을 간과한다.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처음 자본을 도입했을 때, 그는 그것을 유통의 다른 형태, 즉 화폐가 더 많은 화폐의 형태로 그 자체에 결부되어 있는 유통으로서 소개한다. 자본은 이제 유통 및 수익 과정의 일부가 된 실제로 현존하는 물건들과 활동들의 형태를 제외한, 유동적 흐름 속에서 이러한 ‘그 이상’이다(Capital is this “more” in flux, but in the form of real existing things and activities that now become part of the circulation and return process). 둘째, 자본이 우리가 ‘갖고 있는’ 또는 ‘소유하는’ 무엇인가라는 가정은 동등하게 사회적 현실(사물과 활동을 포함한)의 형태로서 자본이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회적 조직화의 유형에 속한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적어도 보편적인 형태가 아니며, 다른 유형의 사회적 조직화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자본은 사물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사회 구성에 관련되는 특정의 사회적 생산관계이며, 이 생산관계가 사물에 표현되어 이 사물에 하나의 특수한 사회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을 뿐이다.5)


자본이 유형적(有形的)인 무엇인가라는, 그것이 화폐로서의 화폐라는, 또는 그것이 우리가 갖고 있고 소유하고 있는 무엇인가라는 가정은 자본을 모든 사회들에 존재하는 무엇인가로서 보편화하고 자연화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혼란은 화폐와 더 많은 화폐 사이의 관계로서 자본에 의해 내내 결정되는 사회적 조직화의 본질에 관한 오인 및 오해로 이어지는데, 그러한 조직화의 귀결은 (잠재적으로) 모든 것이 자본의 형태를 띨 수 있고, 그러므로 자본을 위한 사용가치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모든 것은 잉여가치 생산 및 증대의 일환이 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오직 그것이 자본과 관련되기 때문에 사회적 사물이라 간주되며,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자본이 주체가 된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주체는 자신과 연관된 무엇인가일뿐만 아니라, 그의 타자 안에서 자신과 연관된, 예컨대 자신에 외재적인 무엇인가를 통해 자신과 연관된 무엇인가이기도 하다. 따라서, 자본은 그 자체와 연관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추상적 노동의 생산물, 예컨대 화폐화된 노동의 화폐화된 생산물로서 상품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추상적 노동, 예컨대 교환가능해지고 화폐화된 노동을 통해서 그 자체와 연관되기 때문에, 자본은 주체이다. 마르크스는 『자본』 제3권의 결말에서 자본이 하나의 사물이라는 관념을 아주 명확히 거부한다.


자본은 생산된 물질적인 생산수단의 총계가 아니다. 자본은 자본으로 전환된 생산수단인데, 생산수단 그 자체가 자본이 아닌 것은 금‧은 자체가 화폐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자본은 사회구성원의 일정 분파가 독점하고 있는 생산수단, 즉 살아있는 노동력에서 자립하여 이 노동력과 대립하고 있는 노동력의 생산물이자 활동조건인데, 이것들이 이 대립을 통해 자본으로 인격화되고 있다. 자본은 노동자의 생산물이 독립적인 힘으로 전환된 것, 생산물이 자기의 생산자를 지배하고 구매하게 된 것일 뿐 아니라, 노동의 사회적 힘과 이 관련형태가 노동생산물의 속성으로서 생산자와 대립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적 생산과정의 요소들의 하나가 취하고 있는 언뜻 봐서는 매우 신비스러운 특정한 사회적 형태를 보게 된다.6)


이를 감안했을 때, ‘투자’를 위하여 소비된 자산 또는 화폐의 형태로 단순히 ‘존재하는’ 무엇인가로서 ‘표준화된’ 자본의 개념화에서, 왜, 자본이 실제로 무엇인지에 관한 신비화를 매개로 자본이 이해되는지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이러한 개념화에서 부와 자본은, 말하자면, 사회 안으로 받아들여진 기정사실로서 간주된다. 따라서 이러한 개념화에서 사회는 자본에 대해 외재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결국 자본은 사회적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상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마르크스를 좇아서 자본이 모든 창조적인 역량과 활동(노동력), 게다가 모든 자연적 사물들(자원, 대지, 자연), 또한 정신적 실재(인간 역량의 산물들)의 사회적 형태를 규정하는 무엇인가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본은 소비되는가?


자본에 관한 추가적인 오해와 신비화는 또 다른 깊은 혼란, 즉 투자의 형태로 자본은 경제에서 소비된다는 가정과 연관된다. 예컨대, 기업이 노동력 등을 구매하는 투자를 위해 사용되도록 자본을 소비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이, 모든 것이 자본을 위한 사용가치로서 자본에게 나타나기 때문에, 자본으로서의 화폐는 사용되지 않으며 소모되지도 않는다. 구매를 위해 사용된 화폐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고정된’ 형태든 ‘가변적’ 형태든 둘 중 하나를 취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본이다. 자본이 누군가가 ‘갖고 있는’ 무엇인가라는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닌가 뿐만 아니라 자본은 그 자신의 축적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가를 우리가 이해하기는 확실히 매우 어렵다. It is indeed very difficult for us to understand that it not only is it not the case that capital issomething that someone “has,” but also is it difficult to grasp that capital is never used for anything else than for its own accumulation. 따라서 자본은 소비되지 않는다! 사실상, 그것은 축적의 본질이다. 그가 그의 자본 개념을 소개할 때, 마르크스는 『자본』에서 자본 소비의 문제를 올바르게 소개했지만, 그의 주장의 보다 깊은 결론을 기각시키는 것은 쉽다.


유통 C-M-C에서는, 화폐는 끝에 가서 상품으로 전환하고, 이 상품은 사용가치로 소비된다. 따라서 화폐는 영원히 써버린 것이다. 이와는 달리, 반대의 유통형태인 M-C-M에서는, 구매자가 화폐를 지출하는 것은 판매자로서 화폐를 얻기 위해서다. 그가 상품을 구매할 때 화폐를 유통에 투입하지만, 그것은 [구매한 상품을 판매함으로써] 화폐를 다시 유통으로부터 끌어내기 위해서다. 그가 화폐를 손에서 내어놓는 것은 다시 그것을 손에 넣으려는 속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폐는 (자본의 형태로)7) 소비된 것이 아니라 투하된 것에 불과하다.8)


조금 더 뒤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다. 여기서 M′=M+ΔM이다. M′은 최초에 투하한 화폐액에 어떤 증가분을 더한 것과 같다. 이 증가분, 즉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을 나는 잉여가치(剩餘價値: surplus-value)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최초에 투하한 가치는 유통중에서 자신을 보존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치량을 증대시키고 잉여가치를 덧붙인다. 바꾸어 말해, 자기의 가치를 증식시킨다. 그리고 바로 이 운동이 이 가치를 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9)


만약 우리가 이를 철저하게 사유할 경우, 그렇다면 우리는 성장, 이윤, 이자의 형태로 된 모든 수익이 유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사실일 경우 비록 그것이 비축 및 저축의 형태는 아닐지라도, 자본은 현실적으로 결코 소비되지 않는 화폐의 형태라는 결론에 도달해야만 한다. 확실히, 끊임없이 운동 속에 있는 무엇인가이며, 이와 같이 우리 사회의 사회적 동학의 본질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조건에서 판독될 수 있다. 화폐는 오직 [1] 그것이 유통 속에 있는 한에서 그리고 [2] 그것이 원칙적으로 끝이 없는, 따라서 무한한 과정인 그 자체와 여전히 연관되어 있는 한에서만, 오직 자본으로서 기능할 뿐이다. 그것이 조우하는 유일한 한계는 시장의 하락세, 위기, 지연, 또는 노동 저항과 같은 관련된 노동이다.10) 자본이 그 자체의 그 고유한 운동 과정에서 꺼내지자마자, 그것은 현금의 형태로건 아니면 예금의 형태로건, 화폐로서 기능한다. 만일 자본이 토지, 기계, 조사, 또는 건물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다시 곧 자본으로 기능하는데, 사용된 모든 자원들이 이제 다시 잉여가치 생산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여기서 화폐가 이윤의 형태로 더 많은 화폐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기능하기 때문에 단순히 비합리적인 원칙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히려 자본은 원칙적으로 결코 소비되지 않으며 단지 축적할 뿐이다. 그러므로 자본 축적은 그것이 “복리 이자를 낳고”, 계속 증가하는 속도로 순환해야 하는 한에서, 역설적인 무엇인가이다. 자본을 그것을 파괴시켜야만 비로소 제한할 수 있는 것이다.11)

이러한 맥락에서, 데이비드 하비는 자본의 비합리적 본질에 관한 마르크스의 고찰에 대하여 현대적인 해석의 기축을 열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가 ‘자본잉여 흡수문제’라고 부른 것이다. 『자본이라는 수수께끼』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어떠한 한계와 장애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본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재투자해야 할 필요가 자본주의를 꾸준한 속도로(복률로, at a compound rate) 확장하도록 만든다. 이는 또한 재투자된 자본을 흡수할 새로운 활동영역을 찾아야 할 필요를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따라서 ‘자본잉여 흡수문제’(capital surplus absorption problem)가 발생한다. 새로운 투자기회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성장을 촉진하는 화폐의 능력에는 분명히 내재적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이는 국가들이 망가진 금융시스템을 구제하기 위해 어딘가에서 수조 달러를 만들어낸 2008년 금융위기 때 분명해졌다).12)


하비에 따르면, 계속 증가하는 잉여로서 자본은 그것이 시간이 흐르며 경제 안으로 이 화폐를 다시 모두 퍼붓기 더욱 어렵게 되기 때문에, 항상 위기에 처한다. 단기적인 축적이 (부채 확장으로서의 화폐에 기초하여) 여전히 금융 체계 안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감안하면, 최단 시간 안에 증식하려는 자본에게 방해물이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더욱더 자본은 금융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하비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는다.


금융위기와 화폐위기는 자본주의의 역사지리에서 오래도록 지속된 특징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위기의 빈도와 심도가 높아졌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해야만 한다. 국가-금융 연관은 세계적 자본축적의 지속적 성장을 위해, 이윤기회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금액과 형태 그리고 장소에 화폐자본을 모으고 분배하는 새롭고 혁신적인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는 압력을 받아왔다. 최근의 많은 금융혁신들은 이전에 존재했던 제도적 규제장치로 인한 장벽들을 극복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규제완화에 대한 압력이 대세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식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고삐 풀린 금융을 통제 불가능하도록 만들고 또한 위기를 일으킬 가능성을 더욱 높인다.13)


요컨대, 자본이 결코 소비되지 않고, 소모되지도 않으며, 오직 그 자체의 축적을 위해 축적할 뿐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에서, 어떤 것을 ‘위하여 사용되는’ 무엇인가로서 자본을 이해하는 통설은 그 자체로 자본에 관한 물신주의로 남아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언제나 복률로 성장하는 자본은, 그것이 파괴되지 않는 한, 자본가들의 수중에 남아 있다.


객관적 망각으로서 자본 물신주의


세 가지의 자본의 가장 물신화된 착상을 명확히 밝힌 후에, 나는 물신주의 문제의 객관적 측면, 즉 사회적 현실성의 측면과 마르크스의 방법의 측면 모두에서 망각의 과정으로서 물신주의의 문제로 나의 관심을 돌리고자 한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물신주의 개념의 중심성이 우리가 20세기 동안에 관찰했던 소비문화의 확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지적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미 마르크스는 노동이 동시에 소비라는 사실에 대해 사유했을지라도, 자본이 노동하는 개인의 자유 시간을 포함하여, 일상생활을 소비문화로 변형시키는 그 힘을 예견하진 못했다. 알다시피, 소비의 전환으로 인해 이전에만 해도 인간 삶에 대해 외재적인 영역들, 예컨대 건강, 여가, 교육이 자본주의에 합병되었다. 나아가 우리는 현재 마음과 두뇌가 전부 생산에 포섭되는 것을 목도하고 있다.14) 앞서의 인터뷰에서, 제임슨은 말한다.


그러나 또 하나의 혼란스럽고 의미심장한 요인을 지금의 논의에 끌어올 필요가 있습니다. 이 요인은 소비사회, 미디어사회, 다국적 사회, 탈산업 사회, ‘스펙타클 사회’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가장 근래의 자본이 지닌 독특한 동력입니다. 이것의 특징은 역사의 기억상실증, 즉 과거의 상상 가능한 미래의 억압인데, 이런 양상은 인간 역사상 그 어떤 다른 사회구성체에서보다도 훨씬 더 강렬합니다.15)


마르크스가 보기에, 상품 형태 또는 가치는 그 자체가 물신적이기 때문에, 제임슨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보다 마르크스의 물신주의에 관한 착상이 훨씬 광범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임슨의 의견은 우리에게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는 물신주의의 문제를 (역사적) 망각의 문제와 결부시킬 뿐만 아니라, 프로이트적 함의를 고려했을 때, 총체적인 망각과 억압의 과정으로서 기억상실증의 문제와도 결부시키기 때문이다. ‘역사적 기억상실증’에 관해 말하자면, 자본주의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구성의 과정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 자신에 관한 ‘의식’을 잃어버린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본주의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며, 자신을 오인하며, 따라서 스스로에게 물화된 것처럼 보인다. 주체이자 관계로서 파악된, 사회는 자신의 발생에 대해, 자신의 내부적인 작동들과 자신의 기원을 여전히 알지 못한다.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자본주의 자체의 기원은 그 결과물 속에서 사라진다.16)

어쨌든 제임슨이 염두에 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의식과 기억이 물질적 흔적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19세기의 기억 구성 이론에 대한 프로이트의 거부를 상기시킨다. 둘째,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사용한 언어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마르크스는 가치 형태가 실재추상(real abstraction)의 형태로 존재한다는 그의 주장(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고유한 사회성과 ‘관련성’을 ‘망각하는’)뿐만 아니라, 그의 변증법적 방법과 상품, 화폐, 자본 같은 사회적 범주들에 관한 내적인 관련성이 각각의 범주가 이미 다음의 더 높은 범주에 포함되고 그것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망각의 과정을 역전시키려는 시도라는 그의 주장에 관한 정확히 동일한 논점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먼저 프로이트를 간단히 살펴보자.

프로이트의 의식 이론은 그의 시대의 심리학 및 기억이 물질적 ‘흔적’의 형태로 작동한다는 그 가정, 곧 데카르트 이래로 계속해서 현대 철학사 전체에 흐르고 있는 관념에 대한 비판에 크게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전통에 맞서서, 프로이트는 「쾌락 원칙을 넘어서」에서 의식, 예컨대 앎은 어쨌거나 ‘존재하고’ 있는, 그렇지 않으면 지각과 재생적 상상력(reproductive imagination)이나 그 자체에 대해 접근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의식 및 정신적 행위를 구성하는 물질적 흔적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대신에 그는 의식이 앎 그 자체의 상실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의식이 그 조직의 과정을 설명하는 유일한 변별적 특성은 아니다. 정신분석학적 경험으로부터 얻은 인상을 바탕으로 우리는 <다른> 조직에서 발생하는 모든 흥분 과정이 그 속에 기억의 기초를 형성하는 영구적 흔적들을 남긴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기억의 흔적들은 의식화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실제로 그 흔적들은 그들을 남게 한 과정이 의식화된 적이 없을 때에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영속적일 경우가 많다.17)[강조는 저자]


프로이트의 주장은 현대 심리학의 중심적인 전제를 역전시킨 것을 기반으로 한다. 자기 자신과 의식에 관한 지식이 생리학적이고 ‘물질적인’ 흔적으로부터 단절하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선험적인 지식 이론뿐만 아니라 우리의 현대 이론에서도 설령 우리가 고도로 의심스러운 의식과 지식의 생리학적 기반에 관한 프로이트의 긍정을 발견할 수 있다 하더라도, 프로이트가 보기에 지식 일반 및 자신에 관한 지식은 정확히 우리가 의식의 구조적 불투명성(structural intransparence)라는 것으로 구성되는 한에서, 그의 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요하다. 의식은 스크린이다. 프로이트가 보기에, 기억 흔적은, 만일 있다면, 그 구성의 결과로 사라진다. 사실상 프로이트가 보기에 우리들 자신에 대한 접근을 우리에게 허용하고, 주체성과 자기연관성을 구성하는 것으로서 기억은 그것의 부재(absence)로 구성된다.

우리가 이제 마르크스에게 관심을 돌린다면, 그가 프로이트와 정확히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이다. 『자본』의 중심적인 단락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가 이미 X량의 상품 A=Y량의 상품 B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표현에서 본 바와 같이, 다른 물건의 가치량을 표현하는 물건은 이런 관계와는 독립적으로 자기의 성질 속에 내재하는 사회적 속성으로서 등가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이 잘못된 외관이 확립되는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이 과정은, 일반적 등가형태가 하나의 특정 상품의 현물형태와 동일시되어 화폐형태로 고정될 때, 완성되었다. 외관상으로 나타나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들이 자기들의 가치를 하나의 특정한 상품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그 특정 상품이 화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한 상품이 화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상품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의 가치를 그 상품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이렇게 이끌어 온 운동은 운동 그것의 결과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이리하여 상품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자기 자신의 가치모습을 [자신들의 외부에서 자신들과 나란히 존재하는] 하나의 상품체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상품체, 즉 금 또는 은은 지하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인간노동의 직접적 화신으로 된다. 여기에 화폐의 신비성이 있다. 〚상품 생산 사회에서는〛 사람들은 사회적 생산과정에서 순전히 원자론적으로 상호관련을 맺는다. 따라서 그들의 생산관계는 그들의 통제와 의식적인 개인적 행동으로부터 독립된 물적 모습을 취하게 된다. 이런 사실은 먼저 그들의 노동생산물이 일반적으로 상품형태를 취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화폐물신의 수수께끼는 상품물신의 수수께끼가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18)


이 복잡한 단락은 적어도 여기서 우리에게 중요한 세 가지 중심적인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첫째, 마르크스는 화폐 형태는 뒤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으면서, 유전학적으로 화폐 형태를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마르크스는 화폐가 모든 사회적 관계가 그 안에서 사라지는 ‘물건’(thing)이라 주장한다. 그리고 대신에 그것이 실제로 현존하는 ‘하나의’ 형태, 이제 모든 사회적 관계를 대행하는 상품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마르크스는 이러한 외재화되고 객관화된 사물이 앞서 말한 것의 결과로서, 그것에 의해 구성된 저 주체들의 통제를 넘어선 것으로서 나타난다고 주장한다.19) 이러한 사회적 망각의 과정은 사회가 ‘사물 같은’ 것으로, 그리고 그것 자체에 접근할 수 없음에도 ‘존재하는’ 그런 ‘자연적인’ 무언가로 스스로에 나타나는 그런 과정이다. 현실이 과정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대신에 주어진, 고정된, 자연적인, 그리고 움직일 수 없는 무언가로서 여겨질 때, 물신주의가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비판이론의 실증주의에 관한 전반적인 비판이 바로 이러한 가정에 기인한다. 프로이트의 입장과의 유사성은 명백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의식에 함유되어 있지만 억압되어 있는 구성의 과정을 가시화하려고 노력하듯이,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외관상으로) 사실상 더할 나위 없이 사물 같은 무언가로서 사회의 객관성 및 자신에 관한 지식에 함유되어 있는 (사회적) 구성의 과정을 가시화하고자 노력한다.

게다가, 여기서 마르크스는 『자본』의 제1장에서 논의했듯이 가치형태가 그 구성의 결과 속에서, 예컨대, 실제로 현존하는 가치의 형태, 즉 화폐 속에서 비가시적이게 되는 운동을 가리키고 있다. 그렇지만, 사회적 현실의 보편적인 플레이스홀더(placeholder)로서의 화폐로 이어지는 단계들은 그 결과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마르크스가 위의 인용문에서 진술하고 있듯이, 그 과정의 중간의 매개 단계들은 결과 속에서 자취를 감추며, 뒤에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유사한 정식화에서, 마르크스는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물건의 명칭은 그 물건의 성질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어떤 사람의 이름이 야곱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파운드, 탈러, 프랑, 두카트 따위의 화폐 명칭에는 가치관계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20)[강조는 저자]

우리가 시장의 지면에서 상품을 발견할 때, 그것들이 이미 가격표와 함께 오면서, 동시에 상품들이 그 특수한 사회적 형태에 의해 구성된다는 사실은 그것들의 외양(가상, appearance) 뒤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다시 말해, 화폐가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대신하면서, 그 증상이 하나의 증상인 것이 그 증상에서 망각되는 한에서, 그것은 마치 자본주의의 표면이 증상이나 다름없는 것처럼 보인다. 나아가, 마르크스는 이러한 기본적인 망각과 전치(轉置)의 과정은 화폐와 자본의 모든 수준에서 일어난다. 예컨대, 상품 유통, 가령 시장 관계와 관련하여 그는 망각의 과정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나 주어진 부르주아 사회 전체에서 가격으로서의 이러한 정립과 이것들의 유통 등은 피상적인 과정으로 나타나며, 그 아래의 심층에서는 개인들의 이러한 외견상의 평등과 자유가 사라지는 전혀 다른 과정들이 진행된다. 한편으로 교환 가치를 생산 체제 전체의 기반으로 전제하는 것은, 개인의 직접적인 생산물이 그를 위한 생산물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에서 비로소 그러한 것이 되며, 이것이 일반적이지만 외적인 형태를 취해야 한다는 개인에 대한 강제를 이미 내포하고 있다는 것, 개인은 교환 가치를 생산하는 개인으로만 실존을 가진다는 것, 요컨대 이미 자기의 자연적 실존의 완전한 부정이 내포되어 있고, 개인이 전적으로 사회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 이는 나아가 개인이 단순히 교환자들의 관계와는 다른 관계 속에 이미 정립되어 있는 분업 등을 전제로 한다는 것 등이 망각된다.21)


마르크스가 여기서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수요와 공급뿐만 아니라 구매와 판매 같은 상품 유통 및 일상생활의 시장 관계의 표면에서, 평등한 개인들이 공식적으로 자유로운 개인들로서 서로 조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상, 시장 관계는 단지 외관상으로 그들의 교환 관계를 통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개인들 사이의 개별적인 거래로 이루어질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개인들은 시장 관계의 근저에 있는 관계들에 의해 구성되지만, 교환 관계의 하부에서 망각되고 전치된다. 개인들은 이미 특수한 개인들로서 결정되고, 생산 관계와 소비 관계의 조건들뿐만 아니라 생산 관계와 소비 관계에 의해 구성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의 물신주의와 객관적인 자기망각은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구성되는 특수한 형태, 즉 추상노동과 임금형태로까지 소급될 수 있다. “그리하여 임금형태는 노동일이 필요노동과 잉여노동으로, 또 지불받는 노동과 지불받지 않는 노동으로 분할된다는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22)[강조는 저자]

마르크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사실상 우리가 『자본』 세 권 전체를 고려한다면, 물신주의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지 않는다. 대신에, 마르크스는 그것의 더욱 더 추상적인 예시화로 분석한다. 즉 상품물신주의는 사회적 구성의 모든 수준에서 객관적으로 그 자신을 재생산하는데, 그것은 왜 마르크스가 이미 1장에서 보편적인 가치 형태의 어떤 하나의(a)—특정한(the) 것이 아니더라도—구성적인 계기로서 물신주의를 주제화했는지를 설명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물신주의를 경제적으로 보편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구성적인 것으로 논의했으나,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한 문화적 독해뿐만이 아니라 경제적 독해는 역시나 그 전반적인 요점을 놓치는 경향이 있다. 이 글의 첫 번째 절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은 만질 수 있는 무언가의 형태 내지는 한 다발의 화폐로서 외부로부터 사회에 진입하는 어떤 ‘사물’이 아니다. 오히려 화폐가 모든 사회적 관계들을 떠맡는 특수한 방식이 바로 자본인 한에서, 자본은 실제로 현존하는 형태이며, 모든 사회적 관계들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와 그것의 ‘가장 순수한’ 표현은 이자(interest)이다. 이자(따라서, 부채)에서 ‘절대적 앎’(absolute knowing)은 그 가장 추상적인 형태와 정체성으로 정립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자본』을 독해함으로써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고립되고 아무 관계없는 ‘사실들’이나 이미 정해진 화폐, 자본, 임금, 이자, 그리고 부채와 같은 것들로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사실은 동일한 사회적 형태, 즉 자본형태가 잉여가치의 형태로 모든 것을 자본 자신에 대한 자기연관성으로 현실화한 것임을 이해하도록 요청 받는다. 우리의 사회는 이러한 범주들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된다. 다른 모든 사회적 범주들이 이자 및 부채에 포함되며, 마르크스의 변증법의 과제는 자본주의적인 사회적 조직화가 수미일관으로 이루어진 전체임을 이해하도록 우리를 돕기 위하여 그러한 범주들의 체계적인 내부 구성을 가시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에게 부채는 객관적인 망각이 구성되는 최고의 형태이며, 우리의 사회가 그것이 아닌 것처럼 스스로에 나타나는 가장 휘황찬란한 방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자 및 부채를 분리된 ‘현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가장 순수하고 따라서 자본의 가장 객관적인 현실화로 그것들을 고려하기를 요청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부채(및 그것의 금융화)는 처음부터 자본의 일부에, 즉 그것의 미래로의 확장에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회적 망각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이며, 자연적이고 사물 같은 무언가로 진행되고 있는 이러한 망각의 과정의 가장 객관적인 현실화로 돌아가 보자.


순수한 추상으로서의 부채


마르크스가 1861년에서 1863년 사이에 『자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성했던 『수입과 그 원천들』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례적인 수고(手敲)에서, 그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세 가지 기본적인 물신주의와 그가 ‘통속의 종교’(religion of the vulgar)라고 부르는 것을 지적한다. 세 가지 기본적인 물신주의는 첫째로, 토지가 지대의 원천이고, 둘째로, 노동은 임금의 원천이며, 셋째로 자본은 노동을 취득하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이 출간된 지 거의 150년을 헤아리는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여전히 이러한 삼중적인 통속의 종교를 대체로 추종하는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한에서, 내가 이 논문의 첫 번째 절에서 논의했던 것을 고려할 때, 마르크스가 염두에 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해질 것이다. 예컨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잉여가치 생산과 그들의 노동을 더욱 교환가능하고 수익성 있게 만드는 시장 메커니즘에 대한 보상으로서가 아니라) 여전히 그들의 노동과 노동의 생산물, 또는 그들의 노동의 ‘중요성’에 대한, 또는 그들의 노동에서 표현된 ‘책임’에 대한 보상으로 임금을 받는다고 믿고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여기서 이자 낳는 자본을 물신주의의 가장 완성된 형태로 규정할 뿐만 아니라, 이자에서 ‘과거의 기억’23)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더 이상 어떠한 ‘그 기원의 상흔’24)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규정하는 한에서, 물신주의 개념을 망각이라는 개념에 아주 근접하게 위치시키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수고 역시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모든 사회적 범주들이 그 안에 담긴 어떤 사회적 내용을 보여주는 반면에, 이자에서는 모든 내용이 제거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자본은 스스로에 대해 이자라는 순수하고 추상적인 관계로서의 형태로 실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강조했듯이, 화폐를 주고 더 많이 되돌려 받는 사람은 생산과정에서부터 이자 낳는 자본의 법적 소유자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기반으로 한다. 다시 말해서, 이자 낳는 자본으로부터 산업자본의 분리, 그리고 후자의 몫이 언제나 전자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왜 이자가 이윤이 아니라 사람들이 어쨌든 이자 낳는 자본을 대리한다면 그 누구와도 ‘공유하는’ 무언가로서, 즉 대부분의 경우에 은행과—비가시적이긴 하지만—금융화된 형태의 자본으로 나타나는지를 설명한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노동과 교환관계가 유동자본(circulating capital)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모든 자본주의적 관계들이 (복리) 이자에서 절정에 이르며, 투기적으로 표현되고, 그 구성성분으로 포함되어 있다. 자본은 이자에서 자기 자신의 원천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얼마나 많은 투기꾼들이 그들의 모니터 뒤에 앉아서 하루 동안 얼마간의 돈을 벌었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것인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M-M′에서…우리는 자본의 공허한 형태, 생산과정의 왜곡(perversion, Verkehrung)과 물상화(reification, Versachlichung)를 갖게 된다.”25) 이자의 부정적인 실존은 부채이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결국엔 언제나 기존에 있었던 것의 최상의 수익으로 지불되기 위한 잉여이며, 궁극적으로는 현실적으로 증가된 생산성에 기초하고 있거나, 거의 모든 경우에서처럼 기대된 생산성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독신자뿐만 아니라 가계 역시, 그리고 국가26)조차도 채무 상태에 있으며, 이러한 채무의 형태와 이자 형태로 된 자본 사이의 연관성은 채무 그 자체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리하여 자본의 실제 증식과정과 관련된 것은 모두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자본은 스스로 증식하는 존재라는 생각(표상)이 굳어진다.”27)[강조는 저자] 그러나 적어도 생산성 증가, 축출(expulsions), 탈취(dispossessions), 또는 시장의 확장의 형태로 잉여가치가 발생하고, 그 전반적인 과정이 자본의 유통을 법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이들의 수중에 놓여 있는 한에서, 누군가의 부채는 모든 경우에 다른 누군가의 상금인 것이다.

은행자본과 이자에 관해 논의하고 있는 『자본』 제3권의 한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제 우리는 하나의 마이너스(음의 수치)가 자본으로 나타나는—이자 낳는 자본 일반이 모든 전도된 형태(예를 들어 은행가들의 사고방식에서는 채무가 상품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과 같이)들의 어머니이듯이[Mutter all verrückten Formen]—국채라는 자본과 대립되는 노동력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여기에서 임금은 이자로 이해되고 따라서 노동력은 이런 이자를 낳는 자본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연감 임금=50파운드스털링이고 이자율이 5%라고 한다면, 연간 노동력은 1,000파운드스털링의 자본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에서는 자본의 가치증식이 노동력의 착취로부터 설명되는 대신에, 거꾸로 노동생산성이 노동력 그 자체가 이 신비한 물건이 이자 낳는 자본이라는 사실로부터 설명됨으로써, 자본주의적 사고방식(표상)의 전도된 성격이 그 글에 이르게 된다.28)


여기선 두 가지가 중요하다. 첫째, 이자 및 부채가 소위 자본이라는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 한에서, 그것들은 그것들을 가지고 ‘거래하는’ 이들에게, 구매되고 판매되어야 할 무언가로, 즉 재생산과정 전체의 시작점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의당 그러하듯이, 과정 전체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둘째, 노동력은 오늘날 우리가 ‘인적 자본’이라고 부르는 경향이 있는, 즉 그것이 사회에서 유통되는 자본(그리고 그것의 복리 성장률)으로서의 이자가 아니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 즉, 오히려 그것이 실제로 ‘자본’인 ‘사람들’이라고 우리가 믿는 경향이 있는 어떤 신비화로서 스스로를 나타내 보인다. 마르크스와 더불어, 인간존재의 창조적 역량이라는 자본의 원천이 자본 그 자체로 변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는 그러한 믿음에서 자본 물신주의가 더욱 추상적인 형태 속에서는 좀처럼 나타날 수 없는 지점이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결국 마르크스가 이미 알고 있었듯이,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서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계속 증가중인 복리 이자율과 증가중인 부채는 물론 노동-역량, 생산성, 그리고 미래로 투사된 경제성장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현재 상황을 미래로 확장할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이 위기 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는 한에서,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을 앞서서 살아간다. 그가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듯이,


이런 모든 증권들은 사실상 미래의 생산에 대한 축적된 청구권[법률적 권리]을 대표할 뿐이다. 그들의 화폐가치 또는 자본가치는 국채의 경우처럼 자본을 전혀 대표하지 않거나 또는 그들이 대표하는 현실적 자본의 가치와는 무관하게 결정된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지배하는 모든 나라에서는 거액의 이른바 이자 낳는 자본(또는 화폐적 자본)은 이런 형태로 존재한다. 그리고 화폐자본의 축적은 그 대부분이 생산에 대한 이런 청구권의 축적, 이런 청구권의 시장가격(환상적인 자본가치)의 축적을 의미할 뿐이다.29)


결론


이자 및 부채가 물신주의의 가장 추상적인 형태이며 우리들 자신의 역사적 기억상실증이라는 주장은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 2015)에서 잘 재현되고 있다. 헐리우드가 2008년 미국 주택위기[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역자]를 다루는 이 영화에서, 주요 등장인물들 가운데 한 명은 2008년 금융위기 전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시장에 반대로 투자하는[Big Short, 즉 가치가 하락하는 쪽에 집중 투자하는-역자] 배우 크리스챤 베일(Christian Bale)이 연기한 마이클 버리(Michael Burry)라는 이름의 투자자인데, 결국 그의 투자금의 가치는 489%까지 증가하기에 이른다. 영화는 펀드 매니저이기도 한 마이클 버리의 주요 활동이, 초기 계산 및 보고를 제외하고는, 1929년 (주식시장) 폭락 이후 우리의 현대적 체계가 가장 거대한 위기로 변모하기를 기다리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아주 잘 보여준다. 그 펀드 매니저는 전화를 걸면서 그의 책상 뒤에 앉아 있거나, 아니면 그의 작은 사무실에서 놀고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의 궁극적인 승리를 이끌어내는 노동은 미미한 수준의 일상적 활동으로 점점 축소되며, 시장이 붕괴할 것이라는 원래의 가정을 제외하고는 다른 내용이라고는 어떤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경우에, 생산성이 높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체계가 붕괴하기를 기다리는 것과 동일하다. 영화의 결말 부분에서 구식 칠판에 써진 것으로 비춰지고 있는 ‘489%’라는 숫자는 버리의 활동과 그가 대표하는 체계만큼이나 공허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는 실재적(real)이다. 현실에 관한 우리의 개념화의 측면과, 사회적 현실 그 자체의 측면 모두에서, 우리의 세계에 관한 물신주의는 사람들의 고통을 포함하여, 실제로 현존하는 세계가 몰락하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실재적인 승리를 나타내는 추상적인 숫자로 이러한 몰락이 표현되는 것도 지켜보고 있는 관객의 경악적인 반응을 통해서 잘 재현되고 있다.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양자가 동일한 과정을 재현한다는 사실이다. 성공하는 것과 실패하는 것은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어쩌면 마이클 버리라는 인물이 무(無)를 사회 그 자체에 관한 신화적 개념화에 포획된 허구적 투사로 치환함으로써, 자신을 망각해온 사회의 연극적인 화신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가 이것으로 돈을 벌었다는 고무된 감정과 결합된, 사회적 형태로서의 자본의 공허함은 우리들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의 전부이다. 두려운 마음으로 가득한 채, 우리 자신의 몰락을 우리는 즐기고 있다. 끝내는 영웅과 자본과 성공, 그리고 모든 이들이 침몰하고 만다. 예상과 달리 결국 영화 <빅쇼트>는 고전적인 헐리우드 영화인 것이다.








* Christian Lotz, Fiction without Fantasy: Capital Fetishism as Objective Forgetting,” Continental Thought & Theory: A journal of intellectual freedomVolume. 1, Issue. 2: Debt and Value, pp. 364-382.


1) Karl Marx, “Addenda. Revenue and its Sources. Vulgar Political Economy”, Theories of Surplus Value, Works 1861-1863, online: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63/theories-surplus-value/add3.htm;

Karl Marx, 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Manuskript 1861-1863), in Marx, Karl and Engels, Friedrich, Gesamtausgabe (MEGA), Zweite Abteilung, Band 3, Teil 4, Berlin: Dietz Verlag 1979, II/3.4, p. 1450 (translation altered).

2) Slavoj Žižek, The Sublime Object of Ideology(London: Verso 2010), p. 9[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42쪽].

3) Frederic, Jameson, Conversations on Cultural Marxism, ed. Ian Buchana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p. 15[프레드릭 제임슨, 『문화적 맑스주의와 제임슨』, 신현욱 옮김, 창비, 2014, 43쪽(번역 수정)]. 

4) Christian Lotz, “Is Capital a Thing? Remarks on Piketty’s Concept of Capital”, Critical Sociology, 41:2 (2015), pp. 375~383.

5) Karl Marx,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3, tr. David Fernbach (London: Penguin, 1981), p. 953[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Ⅲ[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1034쪽];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erke, vol.25, (Berlin: Dietz 1952-2015), p. 822[카를 마르크스, 『자본 Ⅲ-2』,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10, 1088쪽].

6) Ibid., p. 953[1034쪽].

7) 괄호 안의 서술은 저자가 추가한 것이다.

8) Karl Marx,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1, tr. Ben Fowkes, (London Penguin 1976), p. 249[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Ⅰ[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194쪽];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erke, vol. 23, (Berlin: Dietz 1952-2015), p. 165[카를 마르크스, 『자본 Ⅰ-1』,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230~231쪽].

9) Karl Marx,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1, tr. Ben Fowkes, (London: Penguin 1976/2015), p. 250[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Ⅰ[상]』,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197쪽];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erke, vol. 23, (Berlin: Dietz 1952-2015), p. 166[카를 마르크스, 『자본 Ⅰ-1』,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1088쪽].

10) 이러한 과정에 대해선, David Harvey, The Enigma of Capita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를 보라[데이비드 하비, 『자본이라는 수수께끼』, 이강국 옮김, 창비, 2012].

11) 이에 관해선, Karl Marx, Grundrisse. Foundations of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tr. Martin Nicolaus (London: Penguin, 1995), p. 750을 보라[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Ⅲ』, 김호균 옮김, 그린비, 2007, 16~17쪽].

12) David Harvey, The Enigma of Capita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 45[하비, 『자본이라는 수수께끼』, 72쪽].

13) Ibid., p. 54[84쪽].

14) 이에 관해 더 자세한 내용은, Christian Lotz, The Capitalist Schema. Time, Money, and the Culture of Abstraction, Lexington Books 2014를 보라.

15) Frederic Jameson, Conversations on Cultural Marxism, ed. Ian Buchanan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7), p. 15[제임슨, 『문화적 맑스주의와 제임슨』, 43쪽(번역수정)].

16)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생각은 또한 『역사와 계급의식』에서 나타난 루카치의 주체성 이론을 강화한다. 그렇지만 이 글을 위해 여기서 보다 심층적인 연관성 및 체계적인 쟁점을 밝히긴 어려울 것 같다. 

17) Sigmund Freud, Beyond the Pleasure Principle, tr. James Strachey (New York: Dover, 2015), p. 19[지그문트 프로이트, 「쾌락 원칙을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2003, 293쪽].

18) Karl Marx,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1, tr. Ben Fowkes, (London: Penguin 1976), p. 187[마르크스, 『자본론 Ⅰ[상]』, 121쪽];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erke, vol. 23, (Berlin: Dietz 1952-2015), p. 107[마르크스, 『자본 Ⅰ-1』, 159쪽].

19) 이에 관한 더 자세한 내용은, Christian Lotz, The Capitalist Schema. Time, Money, and the Culture of Abstraction, Lexington Books 2014를 보라.

20) Karl Marx,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1, tr. Ben Fowkes, (London: Penguin 1976), p. 195[마르크스, 『자본론 Ⅰ[상]』, 131쪽];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erke, vol. 23, (Berlin: Dietz 1952-2015), p. 115[마르크스, 『자본 Ⅰ-1』, 168쪽].

21) Karl Marx, Grundrisse. Foundations of the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tr. Martin Nicolaus (London: Penguin, 1995), pp. 247~248[칼 맑스,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Ⅰ』, 김호균 옮김, 그린비, 2007, 243~244쪽].

22) Karl Marx,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1, tr. Ben Fowkes, (London: Penguin 1976), p. 680[카를 마르크스, 『자본 Ⅰ[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15, 733쪽];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erke, vol. 23, (Berlin: Dietz 1952-2015), p. 561[카를 마르크스, 『자본 Ⅰ-2』, 강신준 옮김, 도서출판 길, 2008, 741쪽].

23) Karl Marx, “Addenda. Revenue and its Sources. Vulgar Political Economy”, Theories of Surplus Value, Works 1861-1863, online: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63/theories-surplus-value/add3.htm;

Karl Marx, 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 (Manuskript 1861-1863), in Marx, Karl and Engels, Friedrich, Gesamtausgabe (MEGA), Zweite Abteilung, Band 3, Teil 4, Berlin: Dietz Verlag 1979, II/3.4, p. 1454.

24) Ibid., p. 1454 (translation altered).

25) Ibid., p. 1460 (translation altered).

26) 이 지점에서, 국민국가가 ‘빚을 질’ 수 있는지 없는지 사실 여부는 열린 질문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27) Karl Marx,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3, tr. David Fernbach (London: Penguin, 1981), p. 597[마르크스, 『자본론 Ⅲ[하]』, 599쪽](translation altered);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erke, vol.25, (Berlin: Dietz 1952-2015), p. 484[마르크스, 『자본 Ⅲ-2』, 639쪽].

28) Karl Marx,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3, tr. David Fernbach (London: Penguin, 1981/2010), p. 596[마르크스, 『자본론 Ⅲ[하]』, 598쪽](translation altered);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erke, vol.25, (Berlin: Dietz 1952-2015), p. 483[마르크스, 『자본 Ⅲ-2』, 638쪽].

29) Karl Marx, Capital.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Vol. 3, tr. David Fernbach London: Penguin 1981), p. 599[마르크스, 『자본론 Ⅲ[하]』, 602쪽]; Karl Marx and Friedrich Engels, Werke, vol.24, (Berlin: Dietz 1952-2015), p. 323[마르크스, 『자본 Ⅲ-2』, 6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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