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음악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장엄하고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브루크너

인서비1 2018. 1. 7. 21:07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장엄하고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브루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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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교재나 인터넷 검색 사이트와 블로그에 적혀 있듯이, 브루크너는 그저 ‘신앙심 깊은 종교음악가’로 축소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진짜 그때부터는 브루크너가 더없이 경건한, 그러나 한없이 지루한 음악가가 되고 만다. 

음악 애호가들이 쓰는 말 중에 ‘BMW’라는 표현이 있다. 독일의 유명한 자동차 브랜드가 아니고, 브루크너와 말러, 그리고 바그너라는 19세기 말 중부유럽의 거대한 산맥, 그 최정상 봉우리들의 머릿글자다. 

모름지기 음악을 좀 들었다 하면 BMW라는 거봉은 넘었다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일종의 호연지기인데,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수능이나 토플 같은 시험이 아니어서, 꼭 이 세 작곡가를 섭렵해야 어떤 경지에 이르는 것도 아니고, 심오한 고수들 중에는 바흐의 건반음악에 늘 전율을 느낀다는 사람이 있기도 해서, BMW가 어떤 리트머스 시험지 같은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마음 먹고 도전해볼 만한 거봉임에는 틀림없다. 

브루크너는 자신의 음악사상과 형식에 깊은 영향을 미친 바그너나 말러와는 달리, 특히 무엇보다 그 자신의 장대한 음악의 비범한 스케일과는 달리, 매우 제한되고 절제된 삶을 살았다. 그는 1824년 오스트리아 북부의 린츠 교외 안즈펠덴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베를린이나 바이마르에서 태어난 사람이 단지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선사받게 되는 정치적·문화적 유산의 대부분은 아예 모르고 자랐다는 뜻이다. 대부분 농민들이었고 구교도들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작은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였다. 작은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라면 얼핏 보기에 깊은 신앙심과 소박한 삶에 대한 만족 같은 느낌을 갖기 쉬운데, 실상은 유럽 사회에서 거의 최하층에 가까운 계층이라는 얘기다. 장차 브루크너가 될 소년 브루크너는 평생 꾸밈없고 검소한 생활태도를 견지했는데, 적어도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그것이 그가 노력하거나 신앙적으로 추구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 그렇게 검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골마을의 빈한한 여건 때문이었다.

경기필하모닉이 2013년 8월 제136회 정기연주회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을 연주하고 있다. / 경기필하모닉 제공

경기필하모닉이 2013년 8월 제136회 정기연주회에서 브루크너의 교향곡 8번을 연주하고 있다. / 경기필하모닉 제공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지도 못해서, 서양 근대음악의 작곡가라면 응당 알아야 할 대위법이나 소나타 등의 기본적인 양식에 대해서도 빈에 있는 교사로부터 근근이 배워야 했다. 주로 편지를 통한 교육이었고 1년에 두 번 정도 대도시 빈에 가서 한두 달 교습을 받았다. 그래도 그의 정신 속에 장래의 브루크너가 될 소질이 차고 넘칠 만큼 있어서, 청년 브루크너는 32살에 린츠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 및 합창단 지휘자가 되었고,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린츠에서 초연한 키츨러로부터 작곡 수련을 받았으며, 마침내 대담무쌍한 한 시대의 거장 바그너를 직접 만날 수도 있었다.

브루크너와 말러, 바그너라는 거봉들 

그는 1865년 바그너의 심오한 오페라, 남녀 두 주인공이 번갈아 가면서 10분이고 20분이고 사랑과 욕망과 죄의식과 초월의 주제를 밑도 끝도 없이 부르고 또 부르는 신작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을 보러 뮌헨까지 간 것이다. 그날의 만남 이후로 바그너를 한 번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패물을 팔고 적금을 깨서 그를 후원하듯이, 브루크너는 바그너 숭배자가 된다. 풍족한 가문 출신이라면 영지 하나쯤은 매각해서 바그너의 음악적 혁명과 혁명적 음악을 위해 희사했을 브루크너는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대신, 바그너의 음악사상을 바그너가 전혀 시도하지 않은 방식, 즉 바그너가 보기에는 ‘낡은’ 양식인 교향곡을 기도하는 심정으로 작곡하여 헌정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히틀러가 BMW 세 명의 작곡가 중에서 극도의 허무와 환멸로 가득찬 말러는 빼고, 바그너와 브루크너를 베토벤만큼이나 존경하고 사랑하여 늘 외우다시피 듣고, 군 열병식에서도 자주 틀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2차 대전의 패색이 짙을 무렵 베를린필의 대지휘자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의 건축가로 전쟁 말기에는 히틀러 문화정책의 거의 모든 것을 결정했던 알프레드 슈피어에게 듣고 싶은 곡이 있느냐고 물었다. 공식적으로 곧 패배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던 슈피어로서는 베를린 시민들에게 음악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푸르트뱅글러에게 ‘브루크너’를 연주해 달라고 했다. 푸르트뱅글러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고 있군요.”

브루크너는 정결한 구도자답게 크고 작은 미사곡들을 많이 작곡하였으나, 역시 본령은 교향곡에 있다. 1865년의 교향곡 1번을 시작으로 9개의 교향곡을 남겼는데 4번, 7번, 8번, 9번이 걸작으로 꼽힌다. 특히 7번은 1883년에 사망한 바그너를 추모하는 마음이 짙게 배어 있는 곡으로, 그 2악장은 바그너가 수많은 쾌작들에서 공연장을 숭고함의 극치로 만들기 위해 기존의 튜바 악기를 개량한 일명 ‘바그너 튜바’가 장중하게 비탄의 정념을 이끈다.

“존재의 황홀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 

이 시기를 전후로 하여 브루크너의 꽤나 늦은 전성기가 펼쳐진다. 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저택과 연금을 받았고, 암스테르담 예술진흥협회의 회원으로 초빙되었으며, 누구라도 제 이름이 등재되기를 원하는 빈 악우협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을 지배하는 것은 ‘낭만주의’다. 여기서 낭만주의란 비 오는 날 덕수궁 돌담길을 우산도 안 쓰고 걸어가는, 그런 식의 포즈가 아니다. 이성적 질서와 제도적 규칙을 으뜸의 가치로 치는 근대 유럽의 쾌속의 근대성에서 비켜나 인간의 지혜로는 측량할 수도 없는 거대한 자연,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숭고한 힘에 대한 찬미, 그 범신론적 신비주의, 그 숭고와 초월의 욕망을 ‘끓어 넘치게 하는’ 무한한 정념에 대한 기도가 곧 19세기 중엽 독일계 예술가들의 낭만주의다. 기어코 세상은 한 번쯤 신생의 힘으로 인하여 뒤집어져야 하며 그것을 향한 영웅의 생애, 혹은 비극적 영웅의 심오한 발걸음을 그들은 찬미하였다. 

음악학자 에른스트 쿠르트가 브루크너의 교향곡에 대해서 ‘주제’나 ‘멜로디’를 찾기보다는 ‘끝없이 성장하고 진화하여 무한한 경지로 돌입해가는 에너지의 파동’을 느껴야 한다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음악학자 파울 베커도 “브루크너는 존재의 황홀을 추구하는 신비주의자”라고 말했다. 

오디오 앞에 앉은 감상자의 입장에서 이를 다르게 표현해 보면, 너무도 장중하고 광막한 풍경이라서 어디 눈을 둘 데 없을 만큼 지루하기도 한 음악이 브루크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브루크너는 동시대의 다른 예술가와 사상가들, 그들의 정념과 겹쳐서 들어야 비로소 그 대강을 어루만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어릴 때부터 교회 오르간을 연주했다거나 평생 진지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점에 주목하다 보면, 수많은 교재나 인터넷 검색 사이트와 블로그에 적혀 있듯이 브루크너는 그저 ‘신앙심 깊은 종교음악가’로 축소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진짜 그때부터는 브루크너가 더없이 경건한, 그러나 한없이 지루한 음악가가 되고 만다.

혹시 브루크너에게 세기말 세기초 유럽을 뒤흔들었던 문화와 사상의 검은 자아가 웅크리고 있지는 않은가, 이렇게 질문을 하는 순간, 그의 장려한 음악이 팽팽하게 긴장한다. 동시대의 사상가 게오르그 짐멜은 알프스에 대한 당대 사람들의 열렬한 애호에 대해 분석하면서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거대한 힘과 찬연한 우아함이 그 어디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강렬한 감정”이라고 쓴다. 같은 시기, 스위스 출신의 화가 호들러는 알프스 산맥, 특히 융프라우 설산과 아이거 빙벽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 니체는 또한 어떠한가. 그는 이미 20대 초반에 세속의 교수가 되었으나 곧 산정으로 올라갔다. 

신생의 힘을 향한 세기말의 정념! 브루크너의 음악세계, 특히 9번이 그러하지 않은가. 장엄하고 강력하면서도 위험한!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06051704181&code=116#csidx25c3e42bd865e93852ec91ae1c271b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