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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야기]로봇에 세금을 매길 수 있을까

인서비1 2018. 1. 6. 20:42
[표지이야기]로봇에 세금을 매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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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4차 산업혁명 도래와 맞물려 논의… 기본소득 실험도 유럽에서 시도

약 70년 후인 2090년, 미래 도시는 4개의 계급으로 나누어진다. 가장 상층부에는 인공지능(AI) 플랫폼을 소유한 ‘플랫폼 소유주’가 있다. 그 아래는 ‘플랫폼 스타’라 불리는 정치엘리트와 소수의 창의적 전문가가 위치한다. 다음은 법인격을 지닌 고성능 인공지능 로봇인 ‘인공지성’ 계급이다. 가장 밑바닥 계급은 보통의 시민들이 속한 ‘프레카리아트’. 인간의 노동이 대부분 AI로 대체된 사회에서 임시계약직이나 프리랜서 형태의 단순노동에 종사하면 근근이 먹고 살아간다. 현재의 노동시장은 인공지성을 제외한 세 개의 계급으로 나눠져 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인공지성이 프레카리아트의 일자리 대다수를 대체한다. 인간과 로봇의 일자리 전쟁, 결과는 0.01% 대 99.9%의 초계급 사회다. 

 기아차 슬로바키아공장에 현대중공업이 설치한 산업용 로봇. / 경향신문 자료사진

기아차 슬로바키아공장에 현대중공업이 설치한 산업용 로봇. / 경향신문 자료사진


‘프레카리아트’ 계급으로 전락하는 시민

마치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할 법할 이런 미래도시 예측은 서울대 건설환경공학부 유기윤 교수 연구팀이 지난 1년간 일종의 문헌·추론 연구방법인 휴리스틱 방법론을 통해 도출한 시뮬레이션 결과다. 4차 산업혁명 전망에서 주로 언급되는, 인공지능(AI)과 가상현실(VR), 플랫폼이 지배하는 미래사회의 가장 ‘디스토피아적 청사진’인 셈이지만, 연구팀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부분의 시민이 프레카리아트 계급으로 진입할 것”이라며 “확률로 치자면 99.99% 이상”이라는 음울한 전망을 내놨다.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 ‘프레카리아트’의 미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프레카리아트(Precariat)란 영국의 경제학자 가이 스탠딩이 처음 주창한 개념으로, ‘불안정하다(Precario)’는 뜻의 이탈리아어와 플로레타리아트를 합성해 만든 말이다. 인간의 노동이 대부분 AI로 대체된 사회에서 임시계약직이나 프리랜서 형태의 단순노동에 종사하는 저임금 노동자를 지칭한다. 최근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한 ‘2017 아시아 미래포럼’ 참석차 방한한 가이 스탠딩 영국 런던대 교수는 “역사상 매우 특수한 계급”인 프레카리아트가 “문화·사회·경제·정치적 시민권을 잃어버린 데다, 어떤 정당도 이들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설명하며 “문제는 이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유기윤 교수팀이 전망한 미래 계급사회의 묵시록이 아니더라도, 4차 산업혁명으로 불리는 급격한 변화가 인간의 노동과 삶에 미치는 음울한 전망은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사피엔스> <호모데우스>의 저자인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지난 7월 한국 방문 당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우리가 조심하지 않으면 앞으로 역사상 가장 불평등한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인공지능은 수십억 명의 사람을 직장에서 내쫓아 전혀 쓸모가 없는 거대한 계급을 창조하고, 독재정권의 출현을 더 쉽게 해줄 수 있다”면서 “4차 산업혁명을 소수 자본주의 엘리트들이 전적으로 통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중요한 과제로 꼽았다. 

이런 비관론에 대응하는 해법도 다양하게 도출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로봇세’ 논의다. 흥미로운 점은 이 논의를 주도적으로 꺼내고 있는 것이 자본주의 최첨병이라고 불리는 미국 실리콘밸리라는 점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설립자인 빌 게이츠는 지난 2월 “로봇이 (인간과) 같은 일을 하게 된다면 우리는 비슷한 수준의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며 “로봇세를 도입해 이 재원을 자동화에 따라 실직한 노동자를 재교육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고 로봇세 논의에 불을 지폈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모터스 CEO,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도 로봇세 도입을 통해 마련한 재원으로 기본소득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로봇세란 쉽게 말해 일터에 로봇 등의 첨단시설을 도입하면 이에 비례해 세금을 물리자는 것이다. 첨단시설 도입으로 일자리가 사라지고 근로소득세 역시 줄어드는 만큼 이를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매겨야 한다는 것이다. 


로봇세, 실직한 노동자를 위해 써야 

아직까지는 해외에서도 로봇세를 도입한 나라는 없지만, 유럽의회는 관련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유럽의회는 올해 초 인공지능 로봇에 ‘전자인간’이라는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기술적·윤리적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는 ‘로봇시민법’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열린 전체회의에서 로봇세를 부과하는 방안은 통과되지 못했지만, ‘전자인간’이라는 법 인격을 부여해 로봇세를 징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어둔 셈이다. 

기본소득 실험도 4차 산업혁명의 도래와 맞물려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핀란드는 올해 1월부터 내년까지 2년간 실업자 2000명을 무작위로 선정해 본인의 의사와 상관 없이 매월 560유로(약 70만원)의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실험을 진행 중이다. 네덜란드 위트레흐트시 주민 250여명 역시 올해부터 2년간 매월 960유로(약 120만원)의 정액 급여를 받는 시범운영에 들어갔다.


4차 산업혁명의 개념이 처음 태동했던 독일에서 이뤄지고 있는 ‘노동 4.0’ 논의 역시 주목받고 있다. ‘노동 4.0’은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오는 유연한 노동환경에 대비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경제정책 플랫폼으로, 독일 정부는 2015년부터 노동조합과 전문가, 시민들이 참여하는 이 대화 플랫폼을 통해 논의한 노동정책 방향 과제를 ‘노동 4.0 백서’로 펴냈다. 기술의 급격한 진화 및 자본의 이익에 ‘고삐 풀린’ 채 휘둘리는 4차 산업혁명이나 기술 변화 거부가 아니라, 합의와 조정을 기반으로 새롭게 미래 노동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신호다. 

지난 8월 국회에서 열린 ‘일자리 변화와 기본소득 도입방향’ 토론회에서 4차 산업혁명과 일자리 변화를 주제로 발표한 정혁 정보통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노·사·정이 공동으로 디지털 사회의 ‘좋은 일자리’를 찾고자 노력하는 독일 사례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며 “4차 산업혁명이 요구하는 변화에 대한 정보와 지식의 투명한 공유, 변화 방향에 대한 사회적 대화, 교섭이 이뤄지기 위한 조건들을 노·사·정이 모두 고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11281059031&code=115#csidx818da31fdba62d28e46c0b1c5a8a86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