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음악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기차에서 듣는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

인서비1 2018. 1. 6. 17:44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기차에서 듣는 베토벤 후기 현악사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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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게 상심한 자가 한밤중에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급하게 써내려간 일기와 다를 바 없는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그런 음악은 울어야만 하는 곡이고, 부다페스트 현악사중주단의 현들은, 특히 바이얼린은, 눈물로 젖어 있는 소리를 냈다. 

잠결에 바이얼린 소리를 듣는다. 여러 일로 잠이 부족했던 까닭에 더하여 봄볕이 차창을 쓰다듬는 탓에 나주행 KTX에 앉자마자 자주 잠에 빠져들었다. 

흔들리는 기차에서의 토막잠, 비몽과 사몽의 희미한 틈 사이로 바이얼린 소리가, 또 비올라 소리가, 이윽고 첼로 소리가 스며든다. 기차의 미세한 흔들림에 맞춰 적절히 잇따르는 일렁거리는 현악 소리, 그리고 따스한 봄볕이 잠결을 어루만지고 있었으니 피곤한 몸은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면서, 중간의 몇 번, 공주라든가 정읍이라든가 익산 등의 정차 안내 방송조차 일정한 리듬을 타기 시작하여, 이윽고 조는 듯 마는 듯 한 끝에 나주역에 내렸다. 그러기를 4월의 목요일마다 네 번을 하면서, 시간으로는 짧지만 거리로는 꽤 먼 여정 동안 오로지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를 듣는 데 할애했다. 

아예 외우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어떤 음악들은 도대체 왜 이런 거지, 하는 순간에 이미 몸 속으로 들어와 버려서 애써 잊으려 해도 몸이 그 음들을 기억해서 부지불식간에 입 밖으로 선율이 새어나오기도 하는데, 어떤 음악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듣고 또 들었으나 좀처럼 기억의 골짜기, 그 적절한 자리들을 찾아 정착하는 데 매번 실패하는 음악이 있다. 브루크너의 교향곡들, 바흐의 수많은 칸타타들, 그리고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가 내게는 그러했다. 그 음악이 그 음악 같은, 그 소리가 그 소리 같은, 그러나 스피커 앞에 정좌하고 두 눈 부릅뜨고 들으면 틀림없이 다른 것임에 틀림없는 음악들, 그래서 아예 4월의 매주 목요일, 나주까지 오가는 기차 안에서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를 집중적으로 들음으로써 엇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그 난해한 곡들을 아예 외우기로 작정한 것이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를 연주하는 세계적인 현악단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마지막 4중주'.

베토벤의 '후기 현악4중주'를 연주하는 세계적인 현악단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마지막 4중주'.


엇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른, 그 난해한 곡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인간의 위대성은 인간이 자기의 운명을 마치 아틀라스가 하늘을 자기 어깨에다 받쳐들고 있었듯 ‘받쳐들고 있다’는 데 있다. 베토벤의 주인공은 형이상학적 중량을 들어올리는 역도선수이다.” 바로 그런 ‘무거운’ 음악을 통째로 외우기로 하였으나 부분의 경악스러운 절규와 비통한 한숨 정도를 기억하는 정도로 그쳤다. 

“그래야만 하는가?” 베토벤이 후기 현악사중주 135번을 쓰면서 악보 구석에 남긴 메모다. 되묻건대, 그의 후기 현악사중주곡들을 집중적으로 들어야만 하는가? 베토벤은 한마디를 더 남겨 놓았다. “그래야만 한다.”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곡들은 집중적으로 들을 만한 가치가 있고,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아예 통째로 외울 필요가 있다.

1822년 11월 9일, 첼로 연주 실력이 뛰어났던 러시아의 니콜라우스 갈리친 공작이 베토벤에게 편지를 쓴다. 몇 편의 현악사중주를 작곡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우선 그에게 감사 표시를 하자. 그가 아니었다면 베토벤이 작품번호 127, 130, 132 등 세 편의 현악사중주곡을 작곡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내친 김에 베토벤은 작품번호 131과 135를 더 작곡했고, 130번의 마지막 악장으로 작곡했다가 따로 떼어내서 작품번호 133으로 분리 독립시킨 ‘대푸가’(Große Fuge)까지 결산해냈다. 이로써 수수께끼와도 같은 그의 후기 현악사중주곡들이 완성된다. 이 ‘대푸가’를 나는 몇 해 전 음악전문가 김창남 교수에게 들려준 적이 있는데, 마치 감전되어 튀어오르는 것처럼 4명의 연주자가 서로의 악기로 울부짖는 이 곡을 듣고 그는 “바로 엊그제 발표된 21세기 현대음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는 소감을 말했다. 

200년 전쯤에 작곡된 이 ‘현대음악’을 포함하여 베토벤의 후기 현악사중주들은 당대의 실내악 관습을 완전히 뛰어넘는, 아니 그 시대의 사교적인 관습을, 의례적인 규칙이나 일반적인 상식 자체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으로 격렬하게 망명을 떠나는, 극한의 미학적 조울증으로 가득찬 음악이다. 각 곡들의 악장 수와 그 배열은 뒤죽박죽이고 악장들의 연주시간 또한 들쭉날쭉하며 그 정도 했으면 종지부를 찍어도 좋을 만하다 싶은데도 끈질기게 몇 분을 더 한숨을 쉬는가 하면, 뭐라도 더 있겠지 싶은데 갑작스럽게 종결을 지어버리는 심미적 신경증까지 도드라진다. 작품번호 131은 모두 7악장으로 되어 있는데, 악장 사이의 휴지부 없이 진행된다.

부다페스트 현안4중주단의 베토벤 앨범 표지 사진

부다페스트 현안4중주단의 베토벤 앨범 표지 사진

엊그제 발표된 21세기 현대음악인 듯

갈리친 공작이 작곡 의뢰를 하였으나, 내 생각에, 베토벤은 이 곡들을 점잖은 사교 살롱이나 어엿한 공연장에서 연주되는 것 자체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하다. 물론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작곡된 것만은 아니다. 거의 모든 작품이 초연되었는데, 아예 작품번호 130번에서 종결 악장을 떼어내 작품번호 133 ‘대푸가’로 분리했듯이, 초연 이후 베토벤은 주변의 비평과 권유를 받아들여 많은 부분을 몇 번이고 퇴고를 했다.

그렇기는 해도 오로지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으며 어쩌면 자기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 내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감정과 형이상학적 고뇌를 일기 쓰듯이 오선지에 음표로 써내려간 곡들이다. 작품 번호 135번의 메모가 바로 그 증거다. 후기 현악사중주들의 종지부이자 베토벤 음악생애의 최종 결산이 되기도 하는 이 작품은, 의외로 4악장의 고전 형식이며 그 도입부터 상쾌하게 진행된다. 그러나 그의 후기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2악장이 그렇듯이 점점 침울해진다. 마지막 4악장의 구석에 ‘그래야만 하는가?’(Muß es sein), ‘그래야만 한다’(Es muß sein)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또한 이 악장의 표제는 ‘힘겹게 내린 결심’(Der schwere gefasste Entschluß)이다. 

토마스 만은 소설 <파우스트 박사>의 앞부분에서 베토벤의 후기 대표작인 피아노 소나타 32번의 2악장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어떤 순간이 한 극단적인 고비가 오자, 그 빈약한 모티브는 외롭고 쓸쓸히 아찔한 심연 저 위에서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경과는 창백한 숭고함을 자아내는 과정이었으며, 거기에 이어 곧바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위축된 근심스런 마음과 불안과 놀람이 뒤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이 끝날 때, 그리고 끝나가는 사이에, 원통함과 고집과 집착, 그리고 도도함 끝에 전혀 뜻밖의 감동적인 부드러움과 다정함이 생겼다. 파란과 곡절을 거친 끝에 그 모티브는 작별을 고하고, 그리고 작별을 고하면서 그 자체가 완전한 작별로, 작별의 신호와 인사로 변한다.”


이 대목은 현악사중주곡들에도, 특히 135번과 132번에도 적용된다. 기차를 타고 나주를 오가면서 나는 한참 고심 끝에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음반을 듣고 또 들었다. 이 곡들의 빛나는 명반들, 그러니까 부쉬 사중주단,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 이탈리아노 사중주단, 라살 사중주단 등의 음반을 꺼내서 135번의 4악장과 132번의 1악장을 하룻밤 내내 들어본 후, 마침내 부다페스트 사중주단의 음반을 선택하였고, 그것으로 4월의 목요일을 내내 들었던 것이다.
 
크게 상심한 자가 한밤중에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급하게 써내려간 일기와 다를 바 없는 베토벤의 현악사중주, 그런 음악은 울어야만 하는 곡이고, 부다페스트 현악사중주단의 현들은, 특히 바이얼린은, 눈물로 젖어 있는 소리를 냈다.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05021447161&code=116#csidx156699be7ea9c9e9e253b213efc8e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