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음악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어려서부터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고?

인서비1 2018. 1. 6. 17:22
[정윤수의 길 위에서 듣는 음악]어려서부터 클래식을 들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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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하게 예의를 차리라’는 말은 근세 초기의 집합적 열망을 응축한 바흐나 북구의 한숨 섞인 민족주의를 웅혼히 다룬 시벨리우스가 들었다면 코웃음칠 망언이다. 모든 권위를 거부한 쇤베르크가 들었다면 당장 혼찌검을 내줬을 것이다. 

“교육이 문제예요. 교육이.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듣고 자라야 되는데, 애들이 게임이다, 만화다, 또 가요나 들으면서 크니까, 인성교육도 안 되고 성정도 거칠어지고, 참 문제예요. 문제.”

나는 또 그런 얘긴가 싶으면서도 한편 여태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나, 하며 일부러 한숨을 쉬었다. 얘기를 하던 사람은 나의 한숨이 그의 한탄에 대한 응답인 줄 알고 몇 마디를 덧붙였다.

“클래식을 듣고 오페라를 감상하고 가곡 하나쯤은 부를 줄 알아야 되죠. 교양 있게 자라야지, 지금 우리나라가 이런 모양인 건 어려서부터 클래식을 듣지 않아서 그래요.”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그린 러시아의 작곡가 표도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의 초상

니콜라이 쿠즈네초프가 그린 러시아의 작곡가 표도르 일리치 차이콥스키(1840~1893)의 초상


이런 수준의 얘기를 더 이상 듣고 있을 수가 없어서, 나는 초면에 어느 정도는 ‘교양’ 있게, 반듯하게 ‘인성교육’ 받은 사람인 양 앉아 있다가 거칠게 말을 꺼냈다. 도대체 인성이란 무엇인가? 또한 교양이라면 무엇이며, 클래식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지고지순한 심판관이 돼 이 나라의 교육과 성장과 삶을 재단한단 말인가? 어디 한 번 살펴보자. 베토벤의 혁명적인 격렬함은 무엇이며, 오페라 <마농 레스코>의 처절한 에로티시즘은 무엇이며, ‘교양 시민사회’를 송두리째 발가벗긴 알반 베르크의 <룰루>는 또한 무엇인가? 너무 예민하고 독특한 사례라고? 그렇다면 브람스의 침울한 독일 민족주의는? 슈베르트의 병든 낭만주의는? 바그너의 왜곡된 영웅주의는?

그런 얘기를 한참이나 하다가 ‘클래식 교양 인성교육’을 토로하던 자를 포함해 무슨 평가 때문에 서로 다른 성향과 경로를 따라 모인 예닐곱 명이 떨떠름하게 찻잔이나 매만지고 있는 것을 보고서야, 나는 말을 거뒀다. 부르디외가 정확하게 파악했듯이, 이 나라에서 클래식은 ‘중상층 신분 상승 및 그 확인과 문화적 세습을 위한 서푼어치 장식물’로 전락해 있음을 나는 바로 그 회의에서 확인했던 것이다. 

연세대 성악과 “치마 입지 말라” 논란 

그랬는데, 며칠 전에는 한숨이 절로 터져나오는 뉴스를 통해 다시 한 번 이런 파탄난 인식을 확인하게 됐다. 3월 15일자 MBN 뉴스에 따르면 “여학생들에게 치마를 입지 말라고 강요하고, 터무니없는 인사 예절을 강요하는 곳”이 있다, 연세대 음대 성악과 학생들이 후배들에게 ‘군기’를 잡는다며 시대착오적인 명령과 강제를 한 것이다. 기사에 따르면 선배들은 “학생들 치마가 짧다며, 치마를 입지 말라고 강요하기도 하고, 선배를 만났을 땐 반드시 모자를 벗고 인사하라고” 했다. 이 자체도 문제이거니와 이것이 뉴스로 불거지게 되면 속마음이 어찌됐든 겉으로나마 ‘부주의했다’거나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고 하는 게 정상인데, 보도 화면에서 성악과 관계자는 “저희가 전공이 클래시컬 뮤직이잖아요. 조금 더 클래식하게 예의를 지키라는 뜻이에요. 근데 그걸 고깝게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에 문제가 있는 거지…”라고 말한다.

이럴 수가! 20세기 병영국가도 아니고, 21세기의 대명천지에 예술 전공 학과에서 발생한 일에 대해 책임 있는 관계자의 답변이 너무도 저열하고 천박해 도대체 이 나라 군사문화와 이 나라 클래식 교양문화 차별의 연쇄구조가 이렇게나 정교하고, 강제와 오만의 조잡한 심리상태로 뒤죽박죽되고 말았구나, 하는 자괴감이 몰려든다. 선배가 후배를 위압하는 문화가 당장 근절해야 할 구태이며 ‘클래식하게 예의를 지키라’는 얼토당토 않은 형편없는 근거 자체가 또한 파탄지경에 이른 인식 상태다. 다소 무리하나마 이 둘을 결합해보면, 이 나라에서 클래식은 서양 근대음악의 본질 그 자체에 대한 몰입과 해석과 재현이라기보다는 신분상승의 저열한 수단으로 곤두박질쳤음을 보여줄 뿐이다. ‘클래식하게 예의를 차리라’는 말은 근세 초기의 집합적 열망을 응축한 바흐나 북구의 한숨 섞인 민족주의를 웅혼히 다룬 시벨리우스가 들었다면 코웃음칠 망언이다. 모든 권위를 거부한 쇤베르크가 들었다면 당장 혼찌검을 내줬을 것이고, 그 어떤 고루한 질서도 단숨에 뭉개버린 말러가 들었다면 ‘파면’시켰을 것이다. 

에프게니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음반 표지사진.

에프게니 므라빈스키가 지휘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음반 표지사진.

그렇다면 차이콥스키는?

그의 음악은 동시대의 거인 도스토옙스키와 겹쳐서 들린다. 그의 소설에는 ‘모든 인간’이 다 들어 있다. 결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결하고도 완벽한 인간이 있는가 하면 파렴치범에 악한도 있다. 인간의 추악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삼소노프 같은 사람과 그 반대의 위엄 있는 고뇌를 보여주는 조시마 장로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공존한다. ‘나쁜 짓을 저질렀지만 비열한은 아니오!’라고 절규하는 맏형 드미트리, 세상의 모든 권위, 무엇보다 종교적 권위까지 박살내고자 한 혁명가인 둘째 이반, 첫눈보다 정결한 막내 알료샤 등 세 형제 이야기는 제정러시아의 근대를 향한 고통스러운 몸부림을 보여준다. 서구주의자였던 차이콥스키는 슬라브주의자인 도스토옙스키와는 반대 지점에 서서, 그러나 이 위대한 소설가의 고통스러운 문장만큼이나 격렬한 선율로 근대의 문턱을 막 넘고자 하는 격동기의 러시아를 들려준다. 차이콥스키는 독일계 관현악어법과 프랑스계 무대음악에 치중된 서구주의적 작품을 많이 썼다. 그는 밀폐된 공간에서 신경증 환자이자 동성애자로서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며 일생을 보냈지만, 연이은 유럽 순회 여행과 슬라브주의자들과의 마찰, 그리고 15년 동안 지속된 나데주다 폰 메크 부인과의 기이한 관계(일절 만나지 않고 오직 서신 교환으로 지속된)를 이어준 수많은 편지로 미뤄볼 때 그를 서구주의자로 보아도 무방하다.

내 음악이 ‘인성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서유럽을 풍미한 낭만주의에 완전히 경도된 것은 아니었다. 음악의 형식에서 서구의 격렬한 유행을 거침없이 실험하기는 했어도 그 내용만큼은 지극히 슬라브적인 것이었다. 작품 31, 일명 <슬라브 행진곡>은 원제가 <세르비아-러시아 행진곡(Serbo-Russian March)>으로, 1876년 러시아 음악협회로부터 의뢰받은 세르비아-투르크 전쟁에서 부상을 당한 병사들을 위로하는 자선연주회용 음악을 차이콥스키가 5일 만에 완성한 곡이다. 전투에 따른 부상으로 극심한 상처를 입은 부상병을 위로하는 장중하고 무거운 멜로디로 시작해 세르비아 민요와 당시 러시아 국가의 선율이 당당한 행진곡풍으로 배합되는 이 곡은 서구주의자 차이콥스키의 ‘슬라브 정신’을 보여준다. 또한 정통적인 관현악 기법으로 작곡한 <1812년 서곡>은 일부러 도시 전체를 불태워 텅비움으로써 극도의 추위와 원정의 고통에 시달린 나폴레옹 군대를 물리친 모스크바 시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러한 곡들로부터 서구주의자 차이콥스키의 내면을 충분히 읽을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탈리아 기상곡>은 음울한 대지를 떠나 약동하는 지중해로 떠난 차이콥스키의 해방감을 즉각적으로 보여준다. 서주에 울리는 관악기들은 마치 신성한 대양의 기운에 감염된 차이콥스키의 마음을 뒤흔드는 듯하다. 관악이 잦아들고 현들의 선율이 흐르면, 그것은 자작나무가 도열한 백색 대지의 것이 아니라 남부 유럽의 매혹적이고 애잔한 선율이다. 그 애잔함도 다시 울려퍼지는 관악기에 의하여 마음껏 비상한다. 1877년, 차이콥스키가 비서 안토니나와 결혼하고 스위스에서 요양을 한 뒤, 건강을 회복해 이탈리아 일대를 여행하면서 얻은 기운과 감흥이 담긴 곡이다. 그러나 그의 여정의 종착역은 언제나 러시아였다. 

“나는 지금 거대한 자연 한가운데 있고 이국 풍물이 인상적이지만, 러시아에 대한 그리움이 뼈에 사무친다. 고향의 광활한 평원과 초원, 숲을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마구 뛰어오른다. 오, 내 사랑하는 조국이여, 땅이 경련을 일으킨 것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돌덩이의 괴물 같은 산악보다 그대 러시아는 수백 배 아름답고 우아하다.” 

이렇게 그의 생애와 그의 음악과 그의 사상이 어떤 시대적 공기 속에서 일렁거렸는가를 두루 살펴볼 때, 차이콥스키는 ‘인성교육’이나 ‘클래식하게 예의를 차리는’ 저열한 언어의 대상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기보다는 바로 그러한 설익은 문화 귀족주의나 조잡한 문화속물주의를 오히려 배격한 음악가였다.
 
차이콥스키, 그가 맨 앞에 언급한 대화나 뉴스들을 접했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내 음악이 ‘인성교육’을 위한 것이라고? 내 선율이 ‘클래식하게 예의를 차리는’ 곡이라고? 그는 틀림없이 6번 교향곡 ‘비창’의 4악장처럼 끝없이 한숨 짓고, 한숨 짓고, 그러고 남은 마지막 기력을 모아서, 또 한숨을 지었을 것이다.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03211444041&code=116#csidxa77f188d1987e0e8956002b1ef93c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