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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조정권 시집 「산정묘지」-얼음과 만년설과 벼랑이 펼쳐지는 시

인서비1 2018. 1. 7. 20:34
[정윤수의 ‘서문이라도 읽자’]조정권 시집 「산정묘지」-얼음과 만년설과 벼랑이 펼쳐지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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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이므로 달리 서문은 없지만, 맨 앞에 ‘自序(자서·서문)를 대신하여’라는 부제가 딸린 ‘獨樂堂(독락당)’이 실려 있으니 서문에 해당한다. 시집이 ‘시의 집’이라면 이 시의 제목 ‘獨樂堂’은 이 시집의 당호인 셈이다. 

나는 높은 산을 무서워하지만, 그 산 오르는 사람을 더 무서워한다. 높은 산에 오르고 깊은 산에 스며드는 사람들, 강자들이다. 그런 사람들하고는 말을 잘 못하겠다. 그런 사람들 따라서 설악산에 갔었는데 무거운 침묵이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사람들 따라서 소백산에 갔었는데, 가파른 계곡 따라 오르느라 하마터면 그 산의 능선이 그토록 부드럽지 않았다면 실종됐을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 따라서 지리산에 갔었는데, 쉬는 틈마다 지리산의 형세와 역사를 아주 서사시풍으로 읊는 바람에 힘들었다. 강자들이다. 나는 그저 동네 공원에서 자전거 타는 사람, 천변을 산책하는 사람, 작은 운동장에서 동네 꼬마들하고 ‘뽈’ 차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게 내가 감당할 만한 크기다.

1990~2000년대 ‘정신주의’ 시를 이끈 조정권 시인(1949~2017).  /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0~2000년대 ‘정신주의’ 시를 이끈 조정권 시인(1949~2017). / 경향신문 자료사진


산에 대하여 시를 쓰는 사람들

산에 오르는 사람도 그렇지만 산에 대하여 시를 쓰는 사람도 무섭다. 하나같이 강자들이다. 산시(山詩)를 쓰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절대고독’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다. 현실적인 감각을 완벽하게 초월하는 사람들, 물리적인 시공간 너머를 투시하는 사람들, 극한의 점 하나에 집중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무섭고 그 환영을 좇아서 산을 오르는 사람들, 끝내 그곳에서 산의 시를 들려주는 사람들은 무섭다. 이를테면 고형렬 시인이 설악산을 추존하며 쓴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돌’의 다음 구절! 

모든 설악의 밤은 비밀을 지키고 있다 
입이 불에 데어 말할 수가 없다 때론 어떤 자들은
그것을 스스로의 우주의 저항이라 하지만 그들의 입은 달라붙어버렸다
화석이여 말문은 열지 마라 침묵을 지키자 
이 산속 가득한 나무들의 생애들이 알지 않느냐
뼈의 나뭇가지들 아래 뒹구는 불타버린 이빨, 등골 자국들
널려 있는 설악의 세계, 검은 화강암이 된 
죽음의 길바닥을 만든, 울퉁불퉁한 혀들을 밟는다
나는 캄캄한 밤하늘로 올라가 돌아오지 않는 빛의 영혼들을 본다
머리를 들어, 아 하늘 속에 떠 있는 수많은 돌들을 쳐다본다

이런 사람을 따라서 산을 오르느니 차라리 나는 연구실에 처박혀 음악을 듣고 있겠다. 이성부 시인이라면 또 모를까. ‘산의 시’ 하면 이성부다. 이성부 시인의 시집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는 내가 등산한다는 마음으로 읽는 시집이다. 고형렬이 광막한 겨울산을 오르며 우주적인 물음을 던진다면 이성부는 그 해답을 깊은 산중 여기저기를 천천히 걸으면서 하나씩 되새긴다. 한 걸음에 하나씩! 경이롭다. 시집의 특성상 ‘서문’이 있기 어려운데 대신 이성부 시인은 책 끝에 ‘시인의 말’을 통하여 자신이 산에 관하여, 그리고 산에 관하여 쓴 시에 관하여 정갈하게 들려주고 있어 읽을 만하다. 물론 백미는 시들이다. 어느 쪽이나 펼쳐도 실제로 산을 오르는 듯하며 심지어 산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적절한 질량의 깨달음을 즉각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산정, 그 너머로 멀리 떠난 시인 

이를테면 ‘나는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것보다 /밖에서 내가 풍경의 한 점이 되는 것을 좋아한다’는 구절, 또 ‘사람도 산속에서는 미물이나 다름없으므로 /또 한 번 작은 산이 백화산 가리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것도 하나의 질서라는 것을 알았다’는 구절,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손쉽게 오지 않는 법이다’라는 그야말로 단순한 진리들을 이 시집의 여기저기 골짜기에서 보게 된다. 얼핏 쉽게 쓴 시처럼 보이고 상식적인 잠언이 아닐까도 싶지만, 그것을 이성부 시인이 산하 곳곳의 산에서 얻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단호하고 무섭다. 


 조정권 시인의 대표작 「산정묘지」의 표지 이미지. / 경향신문 자료사진

조정권 시인의 대표작 「산정묘지」의 표지 이미지. /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리고 조정권의 시집이 있다. 현실의 산이든 초월적인 추상의 산이든, 어쨌거나 높은 곳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을 1991년에 느끼게 해준 시집 <산정묘지>, 그 중 맨 앞에 실린 ‘山頂墓地(산정묘지)1’을 다시 읽어본다.

겨울 산을 오르면서 나는 본다.
가장 높은 것들은 추운 곳에서
얼음처럼 빛나고,
얼어붙은 폭포의 단호한 침묵
가장 높은 정신은
추운 곳에서 살아 움직이며
허옇게 얼어터진 계곡과 계곡 사이
바위와 바위의 결빙을 노래한다. (후략)

그 무렵에 이 시집을 탐독하였다. 아니 조금 과장을 한다면, 범인을 쫓는 형사처럼 탐독에 탐문까지 하였다. 시집에 자주 출몰하는 언어의 뜻을 새겨보았고, 시인이 언급하는 불멸성의 작가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의외로 금세 시들해졌다.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어쩌면 나의 이성이 형성되어 가는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 나는 명징성을 추구하였으나 그것이 고도의 초월적인 추상적 명징성보다는 일그러진 현실을 비추는 명징성이었다. 나는 무엇인가를 늘 허기진 듯 탐미하였으나 그것이 장식이 될까봐 주저하였다. 그러던 중에 이 시집을 읽게 되었고 한순간 일별 후에 그대로 구매하여 탐독하다가 어느날 중간 쯤에 실린 ‘山頂墓地 7’에서 나는 주춤하고 만 것이다. 그 한 대목이다.

서재에 불상을 모신 쇼펜하워, 들길을 거닐며 공자를 가르치던 에머슨, 禪房(선방)에 들어앉은 레비 스트로스, 니체, 랭보. 
저 모든 유럽 탈출자들
그들 또한 지상을 탈출하지 못하고 결국 지상에 묻히지 않았는가
오, 그대들, 허공의 탈출자 

여기서, 멈춘 것이다. 물론 이 시집을 여러 번 읽었고 그 무렵에는 집히는대로 자주 읽었지만, 어느날 문득 이 대목을 읽다가 이 시집이 허공을 디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초월하고자 하였으나 그 ‘무엇’인가에 대한 시인의 이성이 그의 시어들처럼 차가운 견고함을 갖고는 있지 못하다고 여겼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 8일 새벽, 시인이 투병 중에 이 세상을 떠나 ‘햇발치는 드높음, 내게는 언제나 숨가쁨이여’라고 노래한 산정, 그 너머로 멀리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시절 우리에게 ‘얼음과 만년설과 아찔한 벼랑이 펼쳐지는’(유종호의 평) 시를 보여준 시인이 타계한 것이다. 향년 68세. 

시집이므로 달리 서문은 없지만, 맨 앞에 ‘自序(자서·서문)를 대신하여’라는 부제가 딸린 ‘獨樂堂(독락당)’이 실려 있으니 서문에 해당한다. 시집이 ‘시의 집’이라면 이 시의 제목 ‘獨樂堂’은 이 시집의 당호인 셈이다. 전문이 짧으니 그대로 인용한다. 

獨樂堂 對月樓(대월루)는 
벼랑꼭대기에 있지만
예부터 그리로 오르는 길이 없다.
누굴까, 저 까마득한 벼랑 끝에 은거하여
내려오는 길을 부숴버린 이.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11141537441&code=116#csidx0c6f925b731dbe2a6ae67f47b4f45b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