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문학,시

바다가 보이는 교실 9 - 첫 눈 (정일근)

인서비1 2017. 12. 7. 14:29


( 바다가 보이는 교실 9 )


- 첫 눈


                                                                                                   정일근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

첫눈이 오는구나

은유법도 문장성분도 잠시 덮어두고

저 넉넉한 평등의 나라로 가자

오늘은 첫눈 오는 날

산과 마을과 바다 위로 펼쳐지는

끝없는 백색의 화해와 평등이

내가 너희들에게 준 매운 손찌검을

너희들 가슴에 칼금을 그은 편애를

스스로 뉘우치게 하는구나

잠시 교과서를 덮어라

순결의 첫눈을 함께 맞으며

한 칠판 가득 적어놓은

법칙과 법칙으로 이어지는

죽은 모국어의 흰 뼈를 지우며

우리들 사이의 먼 거리를 하얗게 지우자

흰 눈발 위로 싱싱히 살아오는 모국어로

나는 너희들의 이름을

너희들은 나의 이름을

사랑과 용서로 힘차게 불러 껴안으며

한몸이 되자

한몸이 되어 달려나가자


*출전 : 『바다가 보이는 교실』(창작과비평사,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