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자본

[시인과 경제학자]김소월과 모리스 돕-노동의 철학과 사상을 통한 ‘좋은 사회’

인서비1 2018. 1. 6. 20:43
[시인과 경제학자]김소월과 모리스 돕-노동의 철학과 사상을 통한 ‘좋은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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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퐁피두 전 대통령은 취임 전에 ‘시와 정치는 양립할 수 있는가’라는 연설을 했다. 그는 “둘 모두 삶의 본질을 풀어낸다. 다만 정치인은 행동으로, 시인은 언어로 쓴다는 점만 다르다”고 말했다. 본래 정치경제학이었던 ‘경제학’도 당연히 거기에 들어간다.

김소월(김정식·1902∼1934)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와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를 쓴 시인으로, 그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달래꽃>의 지은이를 묻는 문제가 한국인 귀화 시험에 출제되었을 정도이니 말이다.

우리는 사랑의 정과 한, 그리고 민요의 가락으로 소월의 시와 삶을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노동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노동의 철학과 대지의 사상을 그에게서 떼어내면 안 된다. “공중에 떠다니는/ 저기 저 새여/ 네 몸에는 털 있고 깃이 있지// 밭에는 밭곡식/ 논에 물베/ 눌하게 익어서 수그러졌네// 초산 지나 적유령/ 넘어선다/ 짐 실은 저 나귀는 너 왜 넘니?” 소월은 여기에 <옷과 밥과 자유>라는 제목을 붙였다. 의식주가 해결될 때라야 나귀 같은 지상의 굴레를 벗어나 새처럼 날아가는 자유의 삶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김소월(왼쪽)/월간 문학사상, 모리스 돕(오른쪽)/캠브리지 트리티니 칼리지 예배당

김소월(왼쪽)/월간 문학사상, 모리스 돕(오른쪽)/캠브리지 트리티니 칼리지 예배당


영국의 경제학자인 모리스 돕(1900∼1976)은 경제사, 사회주의 경제학과 후진국 문제 등을 연구했다. 그의 사상은 삶에 청진기를 대고 현실 속의 노동과 저항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소월의 시와 같았다. 물질적 풍요만을 갈구하는 ‘위대한 사회’를 이상으로 보는 대신 행복하고 자유로운 ‘좋은 사회’를 추구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 사회의 여러 요소들을 ‘경제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으로 나누지 않았다. 특히 사회를 이해할 때에는 ‘시장의 교환’만 쳐다보면 안 된다고 말했다. 그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바뀐 주요 원인으로 시장과 화폐의 발전을 꼽는 당시의 이론을 논박했다. 시장경제가 발전해서 자연스럽게 봉건제도가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이 더 많은 수입을 올리고자 하는 욕구로 인해 노동력이 심하게 고갈되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여기에 대한 귀족들의 대응이 달라짐에 따라 사회가 자본주의로 변하는 정도가 달라지게 됐다고 했다. 결국 일하는 사람들이 사회를 바꿔간다는 말일테다. 돕이 19세의 나이로 노동운동에 관심을 두게 된 까닭으로 1차 대전 이후 그가 좇던 영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노동당으로 옮겨간 점을 꼽는다. 또한 당시 동료들은 군대의 출세만을 이상으로 생각했는데, 그는 여기에 심하게 갈등했었다. 학창시절 노동당원인 수위아저씨와 친해져 친구들보다 그와 대화를 주로 한 점을 통해 돕이 소월처럼 삶의 본질을 고민한 것도 엿볼 수 있다. 


소월은 일제 치하에서 수탈당하는 사람들과 사회의 고통에 아파했다. 그는 민족학교인 오산학교에서 김억과 조만식 아래 옷과 밥, 그리고 자유를 빼앗긴 사람들의 저항을 배웠다. “동이랴, 남북이랴,/ 내 몸은 떠가나니, 볼지어다”처럼 그는 현실을 예민하게 느꼈고, “나는 나아가리라/ 한 걸음 또 한 걸음”씩 걸어가고 “산경을 김매”고 일하면서 극복했다(<바라건대는 우리에게 보습대일 땅이 있었으면>).
 
소월과 돕은 자신과 주변의 신산한 삶을 통해 더 옳은 믿음을 찾고 새롭게 현실을 깨달아간 선구자들이다. 그들은 사회의 변화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땀에 있는 것이지 바깥에 있는 무언가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묘파했다.

<김연 (시인·경제학자)>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11271845371&code=114#csidx5d344f3550e4363b80a7879c8b3a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