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history

거란의 침입-고려의 위기극복 거란의 1,2,3차 침입

인서비1 2014. 7. 4. 10:32

거란의 침입-고려의 위기극복 거란의 1,2,3차 침입 역사 세계사

2014/05/07 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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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은 10세기 말에 아율보기라는 인물이 거란 제국을 세우는데 이 나라가 요나라이다.

요나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지금의 두만강 유역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는 곳 까지 영토를 넓혔다.

송나라와 싸워 지금의 북경이 있는 하북지방을  차지 하며 송나라도 위협했다.

요나라는 6대 황제 성종이 즉위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고 고려는 언제 요나라의 침입을

받을지 몰라 불안해 하고 있었다.

 


(서희 동상)

요나라는 993년 8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려를 침입해 왔다.

거란의 1차 침입이다.

 

압록강을 넘어온 거란군의 장군은 소손녕으로 거란 왕의 사위였다.

 

거란군의 엄청난 숫자에 놀란 고려의 조정은 서경의 이북 땅을 떼어 주고 화해를 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이 때 서희가 반대하고 자신이 소손녕과 협상을 하겠다고 제안했다.

 

소손녕은 신라의 뒤를 이은 고려가 옛 고구려의 땅을 내놓아야한다고 했지만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기 때문에 요나라가 고구려의 땅을 내놓아야한다고 했다.

 

서희는 거란이 고려의 땅 전체를 탐내는 것이 아니고 고려와 송의 관계를 끊는 것이 목적인 것을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서희는 성공적으로 담판을 매듭지었다.

 

이렇게 서희의 외교술로 고려가 요나라 임금의 연호를 쓰는 대가로 압록강가의 강동6주를 받아내고

 

싸움도 없이 80만 대군을 되돌아가게 하면서 거란의 1차 침입을 잘 막아냈다.



(서희묘)

 

고려에 1차 침입 후 요나라의 성종은 송나라에 쳐들어가서 하북성을 빼앗고 엄청난 양의 조공을

 

약속 받고 돌아가는 등 갈수록 강해졌다.

 

그 때 고려는 강조가 목종을 몰아내고 현종을 왕위에 올리는 강조의 변이 있어났다.

 

거란의 1차 침입 후 고려는 송나라와의 관계를 끊지 않고 강동 6주에 요새를 쌓아 거란의

 

침입에 대비했다.

 

고려가 거란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한 요나라의 성종은 1010년 고려을 다시 침공했다.

 

거란의 2차 침입은 40만 대군이 고려로 쳐들어 왔으며 현종은 개경이 함락되어 멀리 나주로 피난을 갔다.

 

할 수 없이 현종은 요나라 임금에게 친히 인사를 하러 간다는 조건으로 거란과 강화를 맺었다.

 

그러나 거란은 퇴군하는 도중 흥화진과 애전의 싸움에서 고려 장수 양규장군의 결사대를 만나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거란의 2차 침입도 별 소득없이 끝났다.



(강감찬 동상)

 

거란은 1, 2차에 걸친 전쟁을 벌이고도 고려를 점령하지 못하자 강동 6주를 돌려 달라며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세 번째로 고려에 쳐들어왔다.

 

그러나 요나라도 이미 여러 해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남은 병력이 별로 없었고 많은 군사들을

 

한인(중국인)으로 채워야 했다.



(강감찬묘)

 

1018년 1월 요나라 성종의 사위인 소배압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 왔으며

 

이 때 맞서 싸운 고려의 장수는 강감찬이다.

 

거란은 흥화진(의주)을 거쳐야 고려로 들어올 수 있었는데 흥화진에는 이미 강감찬이 지형을

 

이용하여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흥화진 성의 동쪽에는 강물이 흐르고 있었는데 강감찬은 쇠가죽을 연결하여 강상류를 막아

 

놓고 군사들을 매복 시켰다.

 

거란군이 아무것도 모른 채 강을 건너려고 뛰어들었다가 강감찬이 막았다가  터놓은 강물에

 

군사들은 수장당하고 거란의 군사들이 당황하게 하여 고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낙성대)

 

흥화진에서 패하기 했지만 거란의 소배압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였다.

 

소배압은 개경까지 진군했고 고려는 개경의 백성을 모두 성안으로 피신시키고 성밖의 곡식은 모두

 

없애고 우물은 모조리 메워서 적군이 굶주림과 피로로 지치게 하는 청야전술을 이용했다.

 

청야전술로 시간을 끌 수록 거란이 불리하다고 느낀 소배압은 철수를 명령했고 압록강 근처인

 

귀주(서희의 담판으로 얻은 강동 6주의 한 곳)까지 퇴군했다.

 

(귀주대첩 기록화)

 

고려와 거란은 귀주 동쪽 벌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서로 팽팽하게 밀고 밀리는 싸움이 계속 되었는데 갑자기 거센 비바람 거란군 쪽으로 불기 시작했다.

 

고려군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거란군에게 화살을 퍼부어 살아서 돌아간 거란군이

 

수천에 불과했다.

 

이 싸움이 유명한 강감찬의 귀주대첩이다.

 

사람들이 가끔 귀주대첩을 강물에서 일어났다고 생각하는데 귀주는 들판에서 벌인 전투다.



(국사리 강감찬 사당)

 

고려의 명장 감감찬은 948년 11월 19일 고려 정종 때 태어났다.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큰 별이 어느 집에 떨어져서 가보니 그 집 부인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강감찬 이였고, 강감찬이 태어난 곳을 낙성대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에 작고 못생겼으나 재주가 뛰어나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부시랑이라는

 

벼슬에 올랐다.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아내서 거란이 이후 고려에 대한 침략 야욕을 버리게 하였고

 

고려에 평화를 가져다 주었다.

(고려 천리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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