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history

고조선의 건국

인서비1 2014. 4. 20. 18:55


1. 고조선의 건국(고조선의 성립배경)
고조선은 단군왕검에 의해 B.C. 2333년에 건국되었다고 전해진다. 군왕검은 당시 지배자의 칭호였다. 고조선은 만주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후기에는 대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해갔다. 이런 고조선의 세력 범위는 청동기 시대를 특징짓는 유물인 비파형 동검과 미송리식 토기 등의 분포가 일치하는 것으로서 알 수 있다.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함께 군장이 지배하는 사회가 출현하여 세력이 강한 군장은 주변 여러 사회를 정복하여 점점 권력을 강화해 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세력이 바로 고조선이다.

[신화로서의 단군]

단군신화에 따르면 환인의 서자 환웅이 인간세상에 뜻을 두자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천부인삼개(天符印三個)를 주어 세상사람들을 다스리게 했다. 환웅은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신단수 밑에 내려와서 신시라 이르며 풍백, 우사, 운사를 거르니고 곡식, 생명, 병, 형벌, 선, 악 등 인간의 여러 가지 일을 맡아서 사람들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그러던중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고자 환웅을 찾아오니 굴에서 살며 쑥과 마늘 20개씩을 주어 백일동안 기도하면 사람이 된다고 하였다. 곰은 삼칠일 만에 여자의 몸으로 웅녀가 되고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환웅은 사람으로 잠시 변하여 웅녀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단군왕검이라고 하였다. 단군은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조선(고조선)이라 부르며 다스렸는데, 후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로 옮기고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로 다시 돌아와 산신이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 1천 9백 8세 였다. 우리의 조상인 옛 동의민족의 시조전승설이 단군신화인데 이것이 현재 알 수 있는 한국사상 가장 오래된 국가라는 조직체인 고조선의 건국신화로 정착했다. 단군왕검은 하늘의 후계자로서 종교와 정치를 함께 다스리는 지배자였는데 그때는 청동기 사회로 농경, 정치권력이 탄생하던 시기였다. 곰과 호랑이가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사람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단군이 하늘의 후손이기 때문에 인간의 지도자로서 탄생 역할과 제사장 역할을 둘다 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2. 고조선의 변천(단군조선->위만왕조->기자조선?)

단군조선 : BC 108년까지 요동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
《삼국유사》를 쓴 일연(一然)이 단군신화에 나오는 조선(朝鮮)을 위만조선(衛滿朝鮮)과 구분하려는 의도에서 ‘고조선’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그 뒤에는 이성계(李成桂)가 세운 조선과 구별하기 위해서 이 용어가 널리 쓰였다.
고조선이 처음 역사서에 등장한 시기는 기원전 7세기 초이다. 이 무렵에 저술된 《관자(管子)》에 ‘발조선(發朝鮮)’이 제(齊)나라와 교역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 《산해경(山海經)》에는 조선이 보하이만[渤海灣] 북쪽에 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기록에 나타난 조선은 대체로 랴오허[遼河]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성장한 여러 지역집단을 통칭한 것이다. 당시 이 일대에는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문화를 공동기반으로 하는 여러 지역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있었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 집단의 시조설화(始祖說話)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들어와 주(周)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燕)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더욱이 고조선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大夫) 예(禮)의 만류로 그만두기도 하였다. 이렇게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또 당시 중국인들이 교만하고 잔인하다고 표현할 정도로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그러나 BC 3세기 후반부터 연이 동방으로 진출하면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東胡族)을 원정한 다음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왔다. 이때 연은 요동지방에 요동군(遼東郡)을 설치하고 장새(障塞)를 쌓았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 만번한(滿潘汗:랴오둥의 어니하 및 그와 합류한 청하의 하류지역에서 동북으로 성수산을 잇는 선을 중심으로 한 지역 일대)을 경계로 연과 대치하였다.

 

위만왕조

위만왕조에 대해서는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조선왕 위만은 옛날 연나라 사람으로, 요동 일대로 망명하였다가 다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동쪽으로 도망하여 준왕(準王)의 외신(外臣)으로 있었다. 이후 차츰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의 오랑캐 및 옛 연·제 지역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왕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한다. 그때가 바로 혜제(惠帝:BC 194~BC 180) 때이다. 이처럼 위만왕조는 이전 준왕(準王) 단계의 통치체제를 이어받아 국호를 그대로 '조선'으로 하고, 위만을 중심으로 하는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인 세력을 함께 지배체제에 참여시켜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때는 위만조선을 중국인 이주자들이 지배하는 식민지정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 점은 위만왕조 정치구조의 연구 결과 그것이 조선 독자의 체제를 갖추고 있고, 또한 지배세력의 주요 부분이 토착인이라는 점에서 부정되고 있다.
위만 집권시기는 고조선의 역사상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위만은 중국 국경 밖의 오랑캐를 지켜 변경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는 외신(外臣)의 임무에 대한 대가로 군사적 위세와 재물을 얻어 주변지역을 침략하고, 진번과 임둔(臨屯) 등도 모두 복속하여 그 영역이 사방 수천 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뒤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右渠王) 때에 이르러서는 더욱 강성해져 남쪽의 진국(辰國)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러한 고조선의 세력확장에 대한 불만과 고조선이 흉노(匈奴)와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한(漢)은 마침내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고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끈질기게 저항하였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지배층의 분열이 나타났다. 결국 BC 108년 우거왕(右渠王)이 살해되고 왕검성(王儉城)이 함락되면서 멸망하였다.


기자조선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기자조선의 실체를 인정하였지만, 최근에는 이를 부정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먼저 문헌상으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기자는 기원전 1100년 전후의 인물인데, 기원전 3세기 이전에 쓰여진 《논어》 《죽서기년(竹書紀年)》 등에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은 없고 기자의 존재 자체만 언급하고 있다. 기자동래설이 사실이라면 이들 기록에 그에 관한 언급이 있을 법한데 그렇지 않다. 그런데 기자의 동래 사실을 전하는 사서들은 한결같이 모두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쓰여진 것들이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한 기자동래설은 기원전 3~2세기 무렵에 중국인들이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조작해낸 것이 아닌가 의심된다. 실제로 기자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면, 황하유역과 만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문화가 긴밀하게 관련되어야 함에도, 동북아시아의 청동기문화는 비파형(琵琶形)동검문화로 특징되듯이, 계통상으로 중국 황하유역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된다. 뿐만 아니라 기자가 조선에 와서 예의범절과 문화를 전하였다면, 은나라에서 사용된 갑골문(甲骨文)이 고조선지역에서 발견되어야 함에도 현재 발견된 예가 전혀 없다. 이처럼 기자동래설의 모순점이 밝혀지면서 이에 대한 여러 가지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3. 고조선의 위치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아직까지 학계의 통일된 정설은 없다. 다만 현재까지 발표된 다양한 견해들을 대략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고조선은 처음부터 망할 때까지 지금의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위치했다는 견해이다. 문헌상의 근거로는 〈사기〉 조선전에 조선과 연(燕)의 경계로 표시하고 있는 패수(浿水)를 청천강으로,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단군이 도읍으로 정한 아사달(阿斯達)을 평양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한의 무제에 의해 설치된 4군 중 낙랑군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일대에 다수 분포하고 있는 한식 유적·유물들을 통해 볼 때 지금의 평양 일대였고,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도성이었던 왕검성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의 도읍인 왕검성의 위치는 자연히 평양 일대라는 것이다. 그럴 경우 고조선의 영역은 현재의 평안남도 일대로 국한되는 셈이다. 이 견해는 낙랑군의 위치나 고조선 최후의 단계인 위만조선 도성이었던 왕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올바른 해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고조선 역사와 문화의 기원은 위만조선보다 훨씬 이전 시기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위만조선의 위치만으로는 전체 고조선의 위치를 논할 수 없다는 약점을 갖고 있다.

다음은 현재의 중국 랴오닝 성[遼寧省] 일대에 위치했다는 견해이다. 이는 중국의 고문헌에 나타나는 강이나 산 등의 위치 비정에 의해 패수를 다링 강[大凌河]으로, 열수를 랴오허 강[遼河]으로 본 결과 나타난 견해이다. 또한 여기에 청동기문화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가 뒷받침되기도 했다. 고조선 전기의 문화는 비파형동검 문화이며 비파형동검은 랴오허 강을 중심으로 한 랴오닝 성 일대에 밀집하여 분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고조선의 영역은 남만주 일대와 한반도 서북부를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이럴 경우 평양 일대임이 분명한 낙랑군의 위치와 맞지 않는 점과, 과연 청동기 전기에 이처럼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는 영역국가가 발생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점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이동설이 있다. 이 견해는 고조선의 전기 단계에는 현재의 랴오닝 성 일대에 고조선의 중심이 위치했으나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공 이후 서쪽 영토 2,000리를 빼앗기고 그 중심지가 평양 일대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BC 4세기 이전 고조선의 중심지는 랴오닝 성 일대였으나, 위만조선의 도성인 왕검성이나 낙랑군의 치소(治所)인 조선현의 위치는 평양 일대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도 앞의 두 견해와 마찬가지로 고고학적 연구성과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비파형동검 문화가 랴오닝 성 일대를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는 것에 비해 그 후신이라고 볼 수 있는 세형동검 중심지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서북지방이라는 점이다. 이동설은 몇 가지 세부적으로 보완되어야 할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고조선의 위치문제에 관해서는 가장 합리적인 설명으로 간주되고 있다.
 
 
 
4. 고조선의 국가형성과 사회성격
[국가형성]
고조선은 청동기문화의 발전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애초부터 국가의 형태를 띠고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남만주와 한반도 서북지방에 걸쳐 분포하던 여러 세력집단들이 청동기문화의 난숙과 철기문화의 보급이라는 과정 속에서 이합집산과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국가를 형성했던 것이다.
고조선이 비록 국가형태를 갖추지는 못했지만 주변세력에게 하나의 구분되는 집단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BC 7세기경이었던 것 같다. 중국측 자료인 〈관자 管子〉·〈산해경 山海經〉 등에는 이미 조선이라는 세력의 존재가 나타나고 있다. 이 단계는 비파형동검 문화의 발전기로서 랴오닝 성 일대의 각 지역 집단 사이 또는 집단 내에서 경제적 우열의 차이가 발생한 것이 인정되지만 계급분열과 이를 공고히 하는 장치인 국가의 발생은 아직 눈에 띄지 않는다. 국가의 발생은 이보다 훨씬 뒤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 '범금8조'(犯禁八條) 단계에 가서야 확인된다. 범금8조는 〈한서〉 지리지에 낙랑조선의 사실로서 기록되어 있다. 8개의 조항 중 3가지만 전해지고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다른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임을 당한다. 둘째,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보상한다. 셋째, 도둑질한 자는 남자일 경우에는 피해자의 노(奴)로 삼고 여자일 경우에는 비(婢)로 삼는다. 스스로 배상하고자 하는 경우에는 사람당 50만의 돈을 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사회에 이미 노예의 처지에 빠진 사람들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며 아울러 사유재산이 발생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범금8조가 반영하고 있는 사회상은 사유재산의 발생에 기초한 계급분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으며, 범금8조는 노예의 지속적인 공급을 보장하고 노예소유자들의 계급지배를 공고히 해주는 법이라고 볼 수 있다. 범금8조가 구체적으로 어느 시기의 고조선 사회의 형편을 보여주는 것인지는 불명확하다. 대체로 BC 1000년 후반기, 철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던 단계의 산물이 아닐까 추정된다. 한편 중국측 사서에 의하면 고조선은 BC 4세기 후반경에 스스로 왕을 칭할 정도였고 연(燕)과 전투를 벌여 서쪽땅 2,000리를 상실하기도 했다. 이는 역으로 고조선이 이미 2,000리 이상의 영토를 보유하고 있었다는 셈이 된다. 따라서 고조선은 늦어도 BC 4세기경에는 상당한 정치적 발전이 있었고 국가가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성격]
고조선의 사회구조는 불분명한 점이 많기는 하지만 앞의 범금8조에서 보았듯이 기본적으로 노예와 노예소유자 간의 대립관계를 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청동기문화 단계의 씨족장 또는 지역수장이 전화(轉化)하여 나타난 노예소유자들은 경제적 부와 정치권력을 독점했으며 이러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법과 정치제도를 만들어냈다. 노예를 포함한 피지배계급들은 직접 생산에 종사하면서 사회의 기층을 이루었다. 물론 노예도 아니고 노예소유자도 아닌 일반 평민들도 광범위하게 존재했을 것이나 이들도 또한 국가 또는 노예소유자의 지배 속에서 항상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5. 고조선의 의의

-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국가로 발전한 세력이 바로 고조선이다. 지도자들은 독자적으로 왕의 칭호를 썼으며, 관직체제와 군대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다. 수도는 또한 성곽으로 보호되는 최초의 국가였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 골격이 형성되고 기능했던 만큼 그 내용도 일차적으로는 고조선 시기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단군신화가 고조선 시기의 산물이라는 사실이 그 내용 또한 그대로 사실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단군신화가 완전한 허구도 아니다. 그 속에는 신화가 형성된 시기의 역사적 상황이 투영되어 있고 당시 사람들의 집단적 경험이 무의식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상황과 사람들의 의식의 일면을 더듬어 볼 수 있다.

또한 빠뜨릴 수 없는 점은 단군신화와 같이 오랜 기간 구전되어 오다 훗날 문자로 정착한 경우에는 전승 과정에서 후대의 요소가 첨가된다는 점이다. 가령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해가 기원전 2333년이라는 것은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무관하다. 국가의 형성은 최소한의 객관적 조건으로 농업 경제와 청동기문화가 어느 정도 성숙된 다음에 가능하다. 그런데 한반도와 남만주 지역에서 그런 객관적 조건이 마련된 시기는 아무리 빨라도 기원전 10세기를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 오히려 기원전 2333년이란 연대는 중국신화에 전하는 성군으로 문명을 열었다는 요임금과 같은 시기에 우리나라가 건국되었다는 즉 우리가 중국 못지 않은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단군이 하늘신의 아들인 환웅과 웅녀 사이에 태어났고 천수백 년을 살았다는 것을 황당무계하다고 일축하는 이해방식도 옳지 않다. 그 속에 반영된 당시인들의 관념과 삶의 일면을 시대상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 법금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도 ·신분제도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 훗날 고려의 사대부인 이성계에 의하여 다시 조선의 이름을 얻으면서 국가의 이름으로 하게 된다.

 

[참고] 고조선의 영토 범위

기원전 1500년 : 요동과 만주전체 , 연해주 남부 , 한강 이북

기원전 400년   : 한강이북과 청천강 이남 사이

기원전 200년   : 요동과 만주전체와 연해주 남부 , 한강이북(영토를 다시 회복)

기원전 107년   : 평양의 왕검성을 제외하고 모든 영토 잃음

기원전 108년   : 왕검성마저 잃어버리면서 멸망

 

[참고] 고조선 멸망 이유?

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한에서 쳐들어와 함락 당한 것입니다.

한나라는 BC 109년 육군 5만과 수군 7천을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한-조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구요.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은 강화(講和)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구요. 또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將軍) 왕겹(王唊)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습니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長)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大臣) 성기(成己)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BC 108년 결국 왕검성이 함락된 것 이죠.

 

[참고] 고조선 왕검성의 위치는?

아래의 내용으로 보아 고조선의 도읍지였던 왕검성은 평양을 이야기하는 설이 더욱 유력합니다.

고조선시대의 도성. ‘왕험성(王險城)’이라고도 표기하였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는 ≪위서 魏書≫를 인용해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면서, 또 ≪고기 古記≫를 인용해 단군왕검이 평양성에 도읍을 정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권17 동천왕 21년조에는 “평양성은 본래 선인 왕검의 택이다. 또는 왕의 도읍을 왕험이라 한다(平壤城 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라고 하였다.

한편 중국 사서인 ≪사기 史記≫ 조선전에는 공손수(公孫遂)의 군대와 좌장군(左將軍)의 군대가 왕험성을 공격하자 조선의 신하들이 투항하고 조선 왕 우거(右渠)가 피살되었으나, 왕험성은 성기(成己)가 일시나마 완강히 항거했다고 하였다. 왕검성이라는 용어는 왕검을 임금이라는 말로 해석해 ‘임금의 성’이라는 뜻의 일반 명사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왕검성을 특수한 지역을 가리키는 고유 명사로 볼 때, 그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근거해 평양 지방에 있었다는 견해가 있고, ≪사기색은 史記索隱≫에서 왕험성에 관한 “요동군(遼東郡) 험독현(險瀆縣)은 조선 왕의 옛 도읍이다.”라는 후한 응소(應邵)의 주를 인용해 요동군의 속현인 ‘險瀆’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 ‘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사기≫의 왕험성(왕검성)으로 비정해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 요동에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또 험독은 중국계 지명이 아니라 고조선의 도읍을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이며, 고조선의 도읍이 요동의 험독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옮겨졌다는 견해도 있다.

 

 

 

 

 아무나  도움이되기를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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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 우리 반 숙제잔아 근데 왜 여기에 올려ㅡㅡ 그리고 고조선이라해도 5학년이 알겠니..?
 
 

왠지 잘난척하는 것같은느낌.....칫 근데 이걸5학년 에들이 읽을까 글이 너무 많은데..
 
 

ㅋㅋ 이거 숙제네 앞으로도 이런거 올려 따라 적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