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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멸종하는가

인서비1 2010. 3. 31. 01:36

아이들은 멸종하는가 


‘놀이밥’ 굶어가며 매일 전쟁… 참극 배후는 어른 자신

                                                                                      편해문  info@ilemonde.com 

아이들을 본다. 아이들이 아침에 눈을 떠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무엇을 하며 어떻게 하루를 지내는지 본다. 가끔 나라 밖으로 나가 그곳 아이들은 또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본다. 그런 어느 날 가끔 아주 많이 아파할 때가 있다. 놀지 않는 아이들을 볼 때이다. 대한민국 아이들은 놀지 않는다. 아니 놀 수 없다. 아이들마저 놀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 스스로 잊고 두 손을 든 채 소비와 어른 흉내와 일의 세계로 일찌감치 들어섰다. 아이들은 놀이를 버리고 일을 하고 있다. 학교를 마치고 이런저런 학원을 찍고 돌아오는 아이들 얼굴 모습을 보라. 일하고 돌아오는 것 같지 않은가. 놀지 말고 공부해라가 아니라 이쯤 되면 놀지 말고 일하라는 말이다. 여기에 우리가 흔히 ‘유아’라고 하는 유치원·어린이집 아이들 또한 맹렬히 가세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유아와 초등교육은 아이들이 스스로 놀아야 한다는 어렴풋한 몸의 기억마저 지우는 데 이제 거의 성공해가는 듯하다. 잘사는 동네에서는 마침내 아이들로부터 놀지 않겠다는 항복을 일찌감치 받아냈다. 그래서 골목과 마당에서 동무들과 논다는 것은 낭만이 되었다. 골목에서 왁자하게 들려오던 아이들 소리는 이제 환청으로 들릴 뿐이다. 그 많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피리 부는 어른들이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돌며 아이들을 남김없이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렇게 끌려간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른들은 오늘도 확성기를 틀어놓고 어떻게든 놀이와 아이들을 떼어놓으려 한다. 자신들이 열심히 일하듯 너희도 놀지 말고 일하란다.

‘스스로 노는 기억’ 삭제 성공

그래서 아이들은 멸종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 놀지 않고, 놀 수 없고, 마침내 노는 것을 잊어버린 아이들은 아니다. 나는 여태 이런 순진한 소리를 한다. 대한민국은 아이들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하는데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나는 바보인가. 전쟁과 재난의 한가운데서도 아이들이 노는데 대한민국은 왜 아이들을 놀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당신들이 그리는 아이의 성공과 직업이 지금 아이를 놀지 못하게 하면서까지 밀어붙여야 할 만큼 대단한 것인가.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부모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도 왜 무력하기만 한 것일까.

▲ 폐타이어를 굴리며 노는 인도 부다가야 아이들. 편해문

나는 묻고 싶다. 당신들은 이 견디기 어려운 세상에서 무슨 힘으로 그나마 버티며 살고 계시는지를 말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우리는 어려서 놀았던 힘으로 오늘을 산다. 어려서 동무들과 형과 누나, 동생과 골목과 마당과 들과 냇가에서 하루가 짧은 것에 발을 동동 구르며 해 빠지도록 놀며 길렀던 몸과 마음의 힘을 조금씩 꺼내 이 어려운 지금을 산다.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렇다. 그렇다면 이런 힘이 없는 아이들은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낼 수 있을까. 느닷없지만, 놀다가 금 밟으면 죽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죽었다. 그러나 아주 죽지 않는다. 다음 판에 또 살아난다. 죽고 사는 경험을 어디서 이렇게 마음의 상처 하나 입지 않고 배부르게 할 수 있을까. 비석치기, 처음에는 안 된다. 조금 애써도 잘 안 된다. 비석치기를 좀 하려면 한 철은 매달려야 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된다. 이번에는 고무줄 하잔다. 고무줄 또 안 된다. 조금 하면 조금 된다. 집에 와서 의자와 동네 전봇대에 고무줄 걸어놓고 혼자 해본다. 동무들과 만나 한다. 된다. 우리는 이렇듯 많고 많은 놀이와 놀이 사이를 건너뛴 다음 세상의 벽과 만났다.

놀이와의 첫 만남은 때론 좌절이었다. 그러나 언니고 누나고 형들이 자꾸 해보란다. 어느 날 잘되는 경험이 놀이 수만큼 쌓인다. 오늘 아이들을 본다. 유치원, 어린이집부터 대학을 나와서까지 넘어야 할 산들이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걷다가 넘어질 일이 수두룩할 터인데 어떻게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나 걸어갈 수 있을까. 아이가 다시 일어서 가려면 이 아이한테 우리는 무언가 허락했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놀이다. 놀려면 시간이 있어야 하고 놀 터가 있어야 하고 동무가 있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아이들에게 놀 틈과 터와 동무를 주고 있는가. 우리 아이들에게 이 사회에서 퍼붓는 화살과 그 때문에 받을 상처의 크기와 종류는 갈수록 많아지고 커지는데 아무도 아이들에게 이 상처를 딛고 일어설 힘을 어떻게 기르라고 안내해주지 않는다. 나는 이 대목에서 숨이 멎고 막힌다.

고단한 삶 버티는 긍정의 힘

놀이는 긍정의 힘을 아이들에게 베푼다. 책읽기, 독서교육 따위로는 어림없다. 놀다 보면 동무가 나를 살려줄 수도 있고 한 판이 끝나도록 기다리면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시작할 수도 있다. 또한 처음에는 하기 어려워 걱정하고 해봐도 잘 안 되는 놀이였지만 자주 하다 보면 어느새 익숙하게 팽이를 돌리는 자기를 보는, 이런 경험을 놀이가 바뀌는 속에서 숱하게 한다. 그러나 오늘 아이들은 놀지 않고 게임을 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가혹한 학습의 장으로 밀어넣으며 함께 게임이라는 것도 손에 쥐어준다. 그런데 보라! 아이들은 밤을 새우며 이 게임이라는 것을 마치 노동하듯이 한다. 아이들은 날을 새우며 자리를 지키며 적과 맞서고 있다. 어른들은 그래 공부 힘들지, 게임을 하며 잠시 쉬고 다시 공부하라고 했는데 아이들은 밖에 나오지 않는다. 컴퓨터 속으로 들어가 도망치는 한 놈을 끝까지 쫓아가 머리통을 총으로 쏘아 부순다. 끔찍한가. 나는 게임 내용의 폭력성이나 선정성을 문제 삼는 어른들을 볼 때 쓴웃음이 나온다. 아이들이 사는 곳이, 당신들이 사는 곳이 그런 곳이며 거기에서 살아남으려면 공부 열심히 해서 동무를 밟고 성공해야 게임에서 매일 보는 멋진 남자, 여자 전사를 만나 살 수 있다고 어른들은 매일 아이들 앞에서 떠벌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아이들 게임 접속 금지론자가 아니다. 게임은 해야 한다. 친구들과 게임 이야기도 하고 게임에서 만나 함께하며 친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게임은 아이들을 멸종으로 빠르게 몰아가고 있다. 이제 아이들은 PC방이나 집에서 문을 닫거나 밤에 자다 일어나 몰래 컴퓨터를 켜고 게임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이제 들고 다니면서 이 세상의 모든 게임을 할 수 있는 세상에 들어섰다. 게임은 끝났다. 이제 아이들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게임 논쟁은 게임의 완전한 승리 앞에 모두 무릎을 꿇는 날이 머지않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아이들이 게임을 적게 하거나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없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왜 게임에 몰입하는 것일까? 세상에 잘못된 진단들이 돌아다닌다. 아이들이 학교 다니기도 어렵고 그래서 하다 보니까 게임 중독까지 가는 것이란다. 맞는 말 같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피해나간다. 자신들이 유치원·어린이집 다닐 때부터 아이들을 바쁘게 빼돌렸던 것은 돌이켜보지 않고 잘못을 아이들한테 돌린다. 나가서 놀라고 해도 같이 놀 아이가 없다고 한다. 뻔뻔하다. 왜 아이들이 없을까. 간단하다. 우리가 모두 한목소리로 동네를 돌며 피리를 불어 아이들을 모아 빼돌렸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말이다.

요즘 아이들이 늦게 자는 이유

오늘 내 아이를 놀게 하려고 밖에 데리고 나갔더니 함께 놀 아이들이 없다라는 말도 생각해볼 일이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어느 날 우리 아이가 게임에 거의 중독된 모습을 보일 때 정상적인 부모라면 아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크도록 얼마만큼의 ‘놀이밥’을 꼬박꼬박 먹였는지 자신에게 먼저 물어볼 일이다. 우리는 아이들 멸종에 이렇듯 오래전부터 깊숙이 개입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먹을 ‘놀이밥’을 수없이 가로채왔던 셈이다. 영양가 높은 음식은 지나치게 먹이면서 ‘놀이밥’은 차려주지 않았던 부모가 게임에 빠진 아이를 나무랄 수 있을까. 아이들은 그 나이 먹도록 제대로 놀아보지 못해 놀이에 몹시 허기가 져 지냈는데, 어른들은 계속 학교 정문에서부터 아이들을 여기저기 뺑뺑이를 돌려 밤늦게 널브러지게 하는 일을 꼼꼼하게 주도하고 공모했다. 놀이에 허기진 아이들이 게임을 만났을 때 모습을 상상해보라. 아이들도 게임에 빠지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우리가 어떻게 게임 중독을 아이들 잘못으로 몰아갈 수 있단 말인가. ‘놀이밥’을 먹을 아이들의 기본 인권을 지금껏 밟아온 어른들이 할 말이 아니다.

아이들이 놀지 않으니 먹는 게 문제고 자는 게 문제다. 배가 고파야 음식을 달게 먹는데 온종일 책상에만 앉혀두니 입맛이 있을 리 없다. 음식 또한 엉망이다. 아이들의 잠 또한 너무나 모자라다. 왜 잠이 모자랄까. 졸리지 않기 때문이다. 왜 졸리지 않을까. 피곤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여 놀지 않으니 피곤하지 않고 그러니 일찍 잠을 못 잔다. 아이들은 놀고 잠잘 때 자란다는 대명제를 잊지 말자. 아이들은 저녁 여덟아홉 시만 되면 팍팍 떨어져야 한다. 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늦게 자는 일이 잦다. 겨우 엄마의 닦달로 일어나지만, 아침이 맛있을 리 없다. 그리고 학교에 간다. 비몽사몽 아침 시간을 보낸다. 배가 고프다. 그러나 학교에서 바른 먹을거리를 찾기 어렵다. 집으로 돌아온다. 대부분 부모가 집에 없다. 또 바른 먹을거리를 먹기 어렵다. 또 학원에서 학원으로 돌아다닌다.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유아에서부터 청소년 때까지 십수 년을 이렇게 떠돌며 멸종하고 있다.

우리부터 아이와 놀자

이 모든 것의 고리가 끊어지게 하는 것이 바로 아이들이 놀지 않아서라면 지나친가. 놀지 않으니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자지도 못한다는 말이다. 어떤 집의 아이가 몸과 마음이 아프다고 하면 나는 먼저 그 집은 아이들을 마음껏 놀게 했는지, 아이들 잠은 푹 재우는지, 음식은 집에서 먹이는지 이런 것을 궁금해한다. 아이가 아프면 푹 재우고 바르게 먹여야 한다. 그리고 놀게 해야 한다. 어른이고 아이고 놀아야 낫는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잘 놀고 더 자고 바르게 먹이며 아이들을 돌볼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못 놀고 엉망으로 먹고 잠도 안 자는 것을 아이들 탓으로 돌리지 말자. 나라와 교육과 피리 부는 어른들이 모두 나서 아이들을 멸종시키겠다는 것이 분명한 현실을 아프게 보자. 그리고 멸종하는 아이들에게 오늘 따듯한 한 그릇의 ‘놀이밥’을 퍼주자. 게임도 주자. 그래서 아이가 밖에서 노는 것도 재미있고 게임도 재미있다는 것을 몸으로 알면 된다. 게임과 놀이의 균형을 이렇듯 아이 스스로 맞출 수 있으면 문제는 풀린다.

밖에 나갔더니 우리 아이와 함께 놀 아이들이 없다고 하지 말고 우리가 먼저 나가서 우리끼리라도 놀자. 그렇게 누군가 나와서 놀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알아보고 내 아이의 손을 잡고 나가자. 같은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옆집 부모와도 손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이 자본의 분열에 가장 극렬하게 저항하는 방법은 그래서 우리 어른도 아이도 재미있게 노는 일이다. 만약 우리 스스로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못 놀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자본에 먹힌 존재라 해도 좋다. 놀아야 사람이고 놀아야 아이다. 오늘도 아이들 곁을 서성이는 놀이와 만난다. 언제라도 아이들이 손을 뻗는다면, 놀이는 웃으며 아이들 손을 잡아줄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가진 놀이에 대한 긍정이다.

글•편해문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소나무·2007)와 사진집 <소꿉>(고래가그랬어·2009)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