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좋은글

그날 이후 (여림 시인을 기억하다)/ 이승희

인서비1 2010. 1. 9. 19:50

그날 이후 / 이승희
여림 시인을 기억하다 

                                    

 

 

  동네 골목 끝 헌책방에서 금방 나온 듯한 너의 유고 시집을 보았다. 어떻게 예까지 흘러왔을까? 세상은 아직 너의 죽음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닌지. 외로워, 외로워 죽을 것만 같다고 말했던 너의 시간이 책갈피마다 강물의 푸른 안개로 피어나고 때로는 인사동에서 마석가는 막차를 놓치고 난 뒤의 쓸쓸함처럼 새벽안개로 흩어지는데, 벼랑진 너의 시간은 아직도 골목 끝에서 첫사랑처럼 나를 맞고, 쓸쓸한 여인숙방 너머에서 들리는 라디오 노랫소리처럼, 통화가 끊어진 뒤의 부재음처럼, 네 목소리가 단음으로 들려온다.

  너는 햇빛 없이도 푸르렀는데, 물기 없이도 스스로 뿌리였는데, 그 모든 푸름과 뿌리라는 게 상처였고 외로움이었다고 말하는 너를 주문처럼 속으로 읽는다. 상처로 깊어질 수 있었던 너는 정말 강물이었나. 열 손가락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 아프다*고 말했던 너의 시간이 오늘 내게로 와 꽃핀다. 술 취한 어둔 골목 모퉁이에서 더 이상 토해낼 것 없는 살아가야 할 날들을 퉤퉤 뱉어내던 너의 흐려진 눈빛이 그랬을까. 네 눈 속 그 길고도 깊던 동굴이 끝없이 널 부른다고 했지, 그래서 넌 그 속으로 너를 스스로 거두어 간 것인지. 중환자실에서의 마지막 밤과 네 영정을 보던 그날 사이, 첫눈이 참 많이도 내렸다. 수 천 마리의 새떼들이 널 데리고 갔다는 걸 사람들은 아직 몰라. 아마도 모를 거야.

 

 

*여림의 시 「손가락들이 봉숭아보다 더 붉어서 아프다」에서 변용함.

 

 


시집 <저녁을 굶은 달을 본 적이 있다> 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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