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좋은글

아버지의 자본론 / 김명기

인서비1 2010. 1. 5. 15:53

아버지의 자본론

김 명 기

목침이나 가끔 마른 기침소릴 내는 구형 선풍기의 바람이
오히려 장남보다 위안인 아버지의 등골을 본다.

이른 봄 개드릅 나무로부터 시작하여
이따금 산림감시원의 눈을 피해
주목나무를 퍼오기도 하고
여름 내내 온 집안을 가득 채우는
산 도라지의 향은
장날표 만 원짜리 등산화 다 헤진 값
바람이 바뀌는 중추절 전후로 송이 산막의 밤샘이 철거된 후에야
비로써 산술이 되는 무디디 무딘 아버지의 자본론

작물에 더는 희망이 없다는 건 이제 겨우 텃밭에서 엄마의
심심풀이 노동이 된 토마토나 가지 그리고 노랗게 꽃이 필 때까지 자란
늙은 상추가 내게 알려준 사실이다.

육법전서, 마르크스 자본론의 겉표지조차 본 적 없는 아버지 백태 낀 눈은
차라리 그래서 구체적인지도 모른다.
예순하고도 일곱 해를 등골이 등꼴이 되도록 조직도 없이 오로지 혼자 살아낸
아버지의 자본론은 스스로 자본가이기도 노동자이기도한 역사적 비판을 굳이
찾을 필요 없는 이를테면 스스로 수요와 공급을 조정해낸 독자적 시장성

하필이면 종일 비가 오는 날 돌아누운 아버지의 서글픈 등골을 보았을까?
뼈 빠지게 뼈 빠지게 되물어오는 나의 시린 눈으로 곤히 잠든 아버지의
자본론을 가슴 아프게 읽어야하는 날

[이 게시물은 가을님에 의해 2007-01-09 17:35:23 시등록(없는 시 올리기)(으)로 부터 이동됨]



'감성 > 좋은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곰치 국 을 마시며 / 김명기  (0) 2010.01.05
폐광지대 / 김명기  (0) 2010.01.05
아름다운 마을 / 박금숙  (0) 2010.01.05
아름다운 경계 / 장진숙  (0) 2010.01.05
아름다운 경계  (0) 2010.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