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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마음과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까...문제에 대해

인서비1 2009. 6. 13. 17:38
따뜻한 마음과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까...문제에 대해 ..

 

사람이 나서 자라는 과정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두는 데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 자연스러운 질투, 자연스러운 욕심...이런 것들을 그냥 두고 있습니다.
부모라고, 선생님이라고, 인생의 선배라고 조언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냥 느껴지는대로, 그 나이에 맞는 것으로...그것이 가장 바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것은 물론이요, 자연스럽게 미워하고 질투하고 욕심내는 것에는 딱 그만큼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자기 보존에 필요한 것일 뿐이지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먹을 수도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거기에 교육(?)으로 가르침으로써 필요 이상의 것이 자리하는 게 아닌가 합니다.

딸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 아이가 선생님을 미워하면 미워하는대로 둘 뿐이지 그것이 옳지 않다, 선생님은 존경해야 한다고 억지로 이르지 않습니다.
그대로 두면 그 미워하는 선생님조차 좋은 부분이 있고 고마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됩디다.
그것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있는 것에 자라면서 절로 익힌 것이 더해지는 것일 뿐 강제는 아닙니다.
'사람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것은 사람이 만든 것이지 자연스러운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지식, 앎에 대해 관심이 많으면서 긍정으로 받아들여 그것들이 바로 쓰일 때 비로소 아름다움-따뜻한 마음과 사랑-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디다.
물론 평소에 거기에 대해 몹시 못마땅해 하는 사람을 몇 압니다만, 아마도 지식 자체에 많은 비중을 두는 이들이 의외로 세상에 많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들로 나의 삶을 지탱하고 키워가려고 하는 세태에 대한 노여움일 듯도 합니다.
나 역시 지금 지식이라 일컬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후자와 크게 다르지는 않는 생각인데, 아마 표현에서 그들과 다소 다를 때도 있습니다만...
노력하고 투자하여 얻는 앎이라는 것은 대개가 목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목적이라고 하여도 '나의 목적'이 될 때는 '남의 목적'을 타넘으려는 욕심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이미 내가 목적한 바에서 벗어나기 십상이지요.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보람일 수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삶 자체를 피곤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경계하고 싶습니다.

그래도 스스로 원하면서 공부한 것은 그나마 낫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우리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의 세상입니다) 직업이나 삶의 형태에 가장 높은 이상(?)을 규정지어놓고 그 목표 안으로 돌입하기 위한 공부만을 강요받습니다.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지,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을지 썩 믿어지지 않습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한 추상적인 목표부터 시작하여 사업가, 정치가, 교육자, 학자, 사회사업가...따위의 구체적인 목표까지 달음박질하는 동안 과연 주위에, 혹은 내면에 눈을 돌려 아름다움을 볼 여유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지식의 추구가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확신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얼마 전엔가 아이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야생마를 보면 아무 데나 뛰어다니면서 평생을 살아도 별 지장이 없는 것 같던데 왜 우리가 길들인 말은 반드시 발굽을 해달고 닳는다고 수시로 갈아줘야 하느냐고, 그러면 야생마도 발굽이 닳을텐데 왜 그것들은 그냥 살 수 있냐고요.
나도 모르는 문제입니다.
혹시 아십니까.
나는 그냥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마 사람을 태우고 짐을 싣고 사람이 만든 길로 다니다 보면 야생에서 뛰는 것보다 더 많은 무게를 감당해야 해서 발굽이 빨리 망가지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제대로 된 답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도 딸애는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간혹 지나치게 결벽하려고 애를 쓰는 이들을 보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종종 다른 목숨을 귀히 여기자면서, 자연으로 돌아가자면서 채식만을 고집하는 이도 있음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지나친 앎과 깨달음(?)이 준 욕심이 아닐까...까지 생각을 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그냥 살면 될 것을, 내가 살기 위해 다른 목숨을 해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으면 좋을 것을 하고 말입니다.
초식동물이 아닌 사람입니다.
고른 영양을 위해 남의 목숨 먹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더 욕심을 내서 더 많이 먹기 위해, 더 좋은 것을 먹기 위해 인위적으로 키워대는 것을 찾는 일 없어야 하고, 건강하고 오래 살기 위해 더 좋은(?) 먹거리를 찾아나서는 것은 다소 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면 늙고 병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아름답지 않아 보입니다.

나는 내 모임이 있으면 다음 날 아이가 시험이 시작되든 말든 나갑니다.
외따로 떨어진 쓸쓸한 마을에 아이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아니, 아이가 원하면 두고 갈 수도 있습니다만 아이는 나를 따라나서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다음 날의 시험에 관계없이 우리는 외출을 하여 늦은 밤, 혹은 새벽까지도 밖에 머뭅니다.
나는 아이를 위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에 내 일을 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어느 날인가 아이가 자기도 자기 혼자 남고 싶다면 당연히 그러라고 할 것입니다.
아이를 유치원에도 보낸 적이 없습니다.
학교와 성적을 위해서 어떤 학원에도 보낸 적 없고 문제지를 풀게 한 적도 없습니다.
아마 하고 싶다고 했으면 하라고 했을 것이지만 그런 것을 스스로 하고 싶다는 아이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동무들이 다 그런 데 가니까, 그런 데 가야 동무들과 놀 수 있으니까 조르는 경우는 있겠지만요.
제가 국악을 배우고 싶다기에 다소 무리를 하면서도 잠시 보낸 적이 있고, 또한 그림을 그리고 싶다기에 흔한 미술학원은 아니지만 맘껏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게 하는 곳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영어가 싫다기에 그런가 보다 합니다.
그래도 올해는 조금 더듬더듬 간단한 문장을 읽어나갑디다.
새로이 배우는 일본어는 재미있다고 열심히 쫑알쫑알 외우고 연습합니다.
우리가 소위 고전이라고 하는 책들은 재미가 없다기에 그거 재미있어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하고 있습니다.
평생 재미 없으면 그 뿐이지요 뭐.
멍멍이를 좋아하니 멍멍이 동호회에 가입을 하여 번개라는 곳에 나가 중년의 아주머니들과 수다를 떨며 노는 것도 봅니다.
외국의 배우가 좋다고 하여 팬레터 쓰는 것을 번역해주고 이것저것 선물 만드는 것도 도와주어 항공편으로 부치는 것도 가르쳐주었습니다.
어떤 컴퓨터 게임을 하고 싶다면 사서 설치하고 함께 방법을 연구합니다.
달팽이를 기르고 싶다고 해서 풀밭을 뒤져 달팽이 길러 새끼까지 까서 겨울잠 들어가게 놓아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재미없으면 혼자 하라 하지 억지로 참으면서 아이와 함께 해주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어른은 참아주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오면 거기에서 맞은 두 가지는 확실하게 아는 거니 됐다 했습니다.
내 아이는 자기가 흥미없는 것을 억지로 하도록 강요를 받지도 않고, 하고 싶은 것을 소용없다고 야단맞아본 적도 없습니다.
자기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에 대해서는 더 많이 알려고 욕심을 부리지만 누구와 경쟁을 하려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가 싫어하고 못 하는 것은 그것을 잘 하는 동무들에게 열심히 감탄하고 물어보고 도움받기는 하지만 그것에 대해 부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삶이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누구를 만나도 그들 가운데 있는 좋은 점을 찾아냅니다.
그래서 어떤 짝꿍을 만나도 티각태각 싸우면서도 잘 지내서 선생님이 고마워합디다.
아이의 꿈을 물어보면, 즐겁게 노는 거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랬습니다.
어쨌든 부모니까 무언가는 남겨주어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소박하게 몸 담을 작은 집 한 채 남길테니 거기에서 음악을 듣든 그림을 그리든 하면서 마당에 너 먹을 것 키우며 즐겁게 살라고 말입니다.
그 아이에게는 삶은 그런 정도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자라면서 다른 욕심이 생길지 모르지요.
그러나 그 욕심조차도 삶의 변화과정에서 자연스레 찾아오는 정도를 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아이가 어려서부터 장례식에 잘 데리고 다녔습니다.
그냥 장례식장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훨훨 타는 화구에 시신을 넣고 꺼내서 뼈를 부수는 것도 함께 보고, 산에 땅 파고 관을 묻는 것도 함께 보았습니다.
어린 아이에게 어째 그런 것을 보이느냐고 대개들 나를 나무라지만, 사는 것과 마찬가지로 죽는 것도 알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죽으면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죽어라 쌓아놓을 것도, 죽어라 머릿속에 집어넣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아이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냥 아이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 그것이 아름답다는 것-때로는 살고 싶지 않을만치 지긋지긋하기도 한 것이 삶이고 세상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많이 알고 많이 가지면 놓고 싶지 않아집니다.
나는 한 때,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심지어는 글씨를 읽고 쓰는 것조차도-을 고스란히 두고 완전히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까워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물질로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평생 연구하고 노력하고 공부하고 경험하여 깨친 그것들을 그냥 기껏 책으로나 남겨 누군가 그걸 다시 깨치려면 처음부터 그 과정을 되풀이하도록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정말 약이 올라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뇌를 고스란히 꺼내서 다른 이의 머릿속에 남겨놓을 수는 없는 걸까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별 것 아닌 욕심인 것을 깨달았을 때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그 뇌를 받기 위해서는 누군가 비어 있는 뇌의 후손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부지런히 내 아이에게 심어놓는 행위 역시 아이를 무시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바로 '사람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끊임없는 주문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좋은 직장을 얻는 것,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 좋은 집을 사는 것,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런 것을 추구하는 것은 사람이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흔히들 자기합리화를 시키지만, 그건 아닐 거라는 생각이 자꾸 드네요.
중요하고 필요하고 보람있고 가치 있다는 것은 각자가 결정할 일이지 선험자가 알려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튼...내 생각에는, 안달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고 강요하지 않고 자연스레 자라는대로 따라가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아름다움을 아는 길이라고 여깁니다만...비현실적일까요...
그래도 나는, 우리 모녀는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 살아오고 있답니다.
 
<출처:http://blog.naver.com/gemkky/1000124235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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