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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학습은 아동학대와 같다.. 사회적으로 'NO' 외쳐야"

인서비1 2020. 1. 6. 21:17

"선행학습은 아동학대와 같다.. 사회적으로 'NO' 외쳐야"

김재희·최규화 기자 입력 2020.01.06. 14:28 수정 2020.01.06. 15:15 
[세 살 사교육, '불안'을 팝니다①] 이기숙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인터뷰(上)

【베이비뉴스 김재희·최규화 기자】

연간 3조 7000억 원 규모로 추정되는 영유아 사교육비. 등골 휘는 비용에도 많은 부모들은 '불안' 때문에 오늘도 사교육을 선택하고 있다. 그 불안의 실체는 무엇일까. 우리에겐 어떤 대안이 있는 걸까. 베이비뉴스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공동기획으로 열두 명의 전문가들을 직접 찾아가 답을 구했다. - 기자 말

지난해 9월 17일 서울 신교동의 우당기념관 회의실에서 이기숙 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와 인터뷰했다. 김재호 기자 ©베이비뉴스

"먼저 출발한 아이가 반드시 먼저 도착하지는 않습니다. 제때 출발한 아이가 제때 도착하죠."

이기숙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 명예교수는 '적기교육'의 중요성을 한마디로 이렇게 강조했다. 40여 년 동안 유아교육 전문가로 현장과 학계를 아우르며 활동해온 이 교수는,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선행학습'과 같은 뜻으로 퇴색해버린 '조기교육' 열풍에 일침을 놓으며 적기교육의 교육철학을 설파해왔다.

육아정책연구소의 '영유아 교육·보육 비용 추정연구' 발표에 따르면 2017년 영유아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11만 6000원, 연간 총액은 3조 7000억 원 규모다. 하지만 내 아이만 뒤처질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너도나도 뛰어드는 조기교육이 아이도 망치고 교육도 망친다고 이 교수는 단호히 말한다.

이 교수는 40여 년 동안 이화여자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이화여자대학교 부속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원장을 역임한 유아교육 전문가다. 특히 저서 「적기교육」(글담출판, 2015년)을 통해 조기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실증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적기교육의 효과를 이야기한 바 있다.

지난해 9월 17일 서울 신교동의 우당기념관 회의실에서 이 교수와 마주 앉았다. 이 교수의 이야기는 "사교육을 시작하는 연령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는 것이 제일 큰 문제"라는 탄식으로 시작했다. 이 교수는 "만 2세 이하에서 한글을 공부하는 경우가 63%에 이르렀다"는 조사 결과를 전하며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만 2세 이하에서) 종합학습지를 공부하는 경우도 21%나 되었다. 기저귀를 차고 문화센터에 가서 부모와 함께 한글과 더불어 외국어를 배우고,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이 학습지로 숫자를 배우는 것이 우리 교육 현실인 것이다.(「적기교육」 25~26쪽)

2014년 사교육걱정없는세상과 유은혜국회의원실이 학부모 762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역시 점점 더 낮아지는 조기교육 연령을 보여주고 있다. 만 3세에 영어교육을 처음 시작한 경우가 현재 고등학생 중에서는 3.2%에 불과했으나, 현재 유아 중에서는 35.3%에 달했다. 약 10년 사이에 11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우리나라 영유아 사교육 현실은 교육열이 높기로 유명한 가까운 동아시아 국가들과 비교해도 심각한 수준이다. 이 교수는 영유아 사교육 공동연구 경험을 이야기하며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 연구진이 '학습지'를 사교육의 한 형태로 넣자고 제안했지만 다른 나라 연구진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 교수는 "중국과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학습지에 대한 개념이 생소하기도 할 뿐더러, 다른 나라에서는 유아들한테 학습지를 시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작은 사건"이라고 설명하며, "동아시아 공동연구 결과 한국, 중국, 일본, 대만 중 우리나라 유아들이 가장 많은 학습을 하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말했다.

「적기교육」에 소개된 이 교수의 해당 연구 결과를 보면(2012년), 한국 유아들의 조기·특기 활동 중 상위 1~3위는 한글(39.2%), 영어(33.0%), 수학(31.4%) 순이었다. 네 나라 모두 영어와 예체능 관련 활동이 많이 이뤄지는 것으로 조사됐으나, 한국은 특히 이른바 '국영수' 학습과 관련된 활동의 비중이 상당히 높았다.

◇ "기저귀 차고 한글 배우는 현실… 제때 출발해야 제때 도착한다"

이 교수는 "먼저 출발한 아이가 반드시 먼저 도착하지는 않습니다. 제때 출발한 아이가 제때 도착하죠."라는 말로 '적기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김재호 기자 ©베이비뉴스

이 교수는 이렇게 사교육의 '광풍'이 몰아치는 사이 조기교육의 개념도 변질됐다고 아쉬워했다. 이 교수는 "과거에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도 유아기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뜻, 즉 '학령 전 교육'이라는 의미로 조기교육이란 말이 사용됐다"며, "하지만 지금은 오직 '선행학습'이라는 의미로 탈바꿈했다"고 말했다.

조기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정말 아이 성적이 뒤처질까. 이 교수는 그런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아오다가, 유아기 선행학습이 초등학교 학습능력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 연구해보기로 했다. "조기 사교육이 학습에 효과적이라는 연구 결과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적기교육」 55~56쪽)이다.

읽기 능력과 어휘력 관련 사교육을 받은 만 5세 집단과 사교육을 받지 않은 만 5세 집단을 비교했다. 이들이 초등학교 1학년이 됐을 때 확인한 결과, 독해력·논리력·맞춤법·오자·관련 단어 찾기의 다섯 영역 모두 두 집단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2011년).

조기 사교육을 받은 집단의 평균점수는 49.25점이었으나, 조기 사교육을 받지 않은 집단의 평균점수는 50.86점으로 오히려 근소하게 더 높았다. 다섯 개 영역별 평균점수 역시 조기 사교육을 받지 않은 집단의 점수가 최소 0.79점(관련 단어 찾기)에서 최대 2.74점(독해력)까지 모두 근소하게 높게 나왔다.

두 집단이 초등학교 3학년이 됐을 때도 읽기 이해 능력(사실적 이해·추론적 이해·비판적 이해)과 어휘력 검사를 실시했다.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읽기 이해 능력에서는 30.62점 : 32.01점, 어휘력에서는 20.21점 : 21.70점으로 조기 사교육을 받지 않은 집단의 평균점수가 모두 더 높게 나왔다(2013년).

그 가장 큰 이유는 "일찍부터 '가, 나, 다, 라' 식의 단순 기계적 문자해독은 국어의 독해력과 이해력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이기숙 교수는 설명한다.

Q. 영유아기의 과도한 조기 사교육이 아동 개인의 학습능력에는 어떤 영향을 줄까요?

"정말 놀라운 연구 결과가 나왔죠. 모든 영역에서 조기 사교육을 받지 않은 집단의 평균점수가 더 높았잖아요. 사실 사교육을 많이 시킨 아이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산만해지는 경향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흥미도 없는데 부모나 선생님이 시키니까 어려워도 찔끔찔끔 억지로 할 뿐이거든요.

스스로 몰입해서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다보니까 산만함이 습관화 돼버려요. 사교육을 많이 한 애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서 모든 것에 대한 흥미가 적습니다. 우수한 아이들의 특징은 몰입을 잘한다는 점이거든요. 스스로 몰입하고 집중할 줄 아는 아이들이 학습효과도 좋죠."

Q. 조기 사교육으로 몰입하는 힘을 잃는다고 하셨는데, 학습이 아니라 심리적 측면에서 볼 때는 어떤가요?

"사실 조기교육 때문에 가장 문제가 되는 건 학습능력보다 아이들의 자신감 상실입니다. 자신감 상실은 요즘 아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에요. 요즘은 아이 하나 키우는 부모들이 많잖아요. 모든 재정적 지원을 한 아이에게 집중하기 때문에 아이가 자신감이 넘칠 거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예요.

조기 사교육을 많이 받은 아이들은 자신감이 점점 더 없어져요. 자기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없거든요. 항상 남과 비교하는 시선에 익숙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 긍정적이지 못한 아이들이 많아요. 긍정적 자아개념이 부족한 것은 당연히 학습능력과도 관계가 있고, 아이의 인생에서 모든 것에 문제가 됩니다.

또 하나 주시할 것은, 유아기에 과도한 조기 사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사회·정서적 발달이 떨어진다는 점이에요. 또래 친구들과 많이 놀아보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경험을 쌓아야 할 시기에 책상 앞에서 학습만 하고 있거든요. 대인관계, 인성 등 사회·정서적 발달이 이뤄져야 할 시기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 "유아교육 효과는 당장 눈에 안 보여… 점수 아니라 '현상' 봐야"

이 교수는 "부모는 아이의 첫 번째 선생님"이라며, "1차 교육을 책임져야 할 부모의 역할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재호 기자 ©베이비뉴스

Q. 저서 「적기교육」에서, 부모의 통제 속에서 이뤄지는 과도한 사교육이 부모와 자녀 사이의 관계를 왜곡한다는 지적도 하셨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관리자나 감독관으로 여기게 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가 청소년이 되고 사춘기가 돼서 부모-자녀 관계가 힘들다고 상담을 받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청소년기에 일어나는 문제들은 대부분 유아기 때부터 시작됩니다. 부모들은, 아이가 사춘기가 되더니 관계가 단절됐다고 걱정합니다만, 사실 그 이전부터 부모가 그렇게 만든 거예요.

유아기 때부터 아이와 대화를 안 하고 관계를 잘 쌓지 않으면 청소년기에 큰 문제가 될 수밖에 없어요. 그때 가서 아이와 소통하겠다고 해도 제대로 할 수가 없죠. 정말 위험한 시기가 오는 겁니다."

Q. 영유아기의 조기교육이 초등학교 이후 학교교육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선행학습은, 좀 심하게 말하면 아동학대라고 볼 수 있어요. 우리 아이와 같은 교실에 있는 다른 아이들에 대한 아동학대. 내 아이만 잘나면 됐다고 할 게 아니라, 다른 아이에게 주는 피해를 생각해야 해요.

선행학습을 하고 온 아이들은 정상적인 수업에 큰 방해가 되죠. 자기는 다 배우고 왔잖아요. 모르고 오는 게 당연한데, 다른 아이들을 놀리는 거죠. 어린아이들이기 때문에,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아이들이 자책할 수 있어요. 교실 전체에 피해를 주는 일이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조기교육은 안 된다'고 외쳐야 해요."

많은 영유아 부모들이 조기교육을 선택하는 까닭은 뭘까. 이 교수는 "불안"이라는 낱말을 가장 먼저 언급했다. 친구들과의 성적 경쟁에서 한번 뒤처지면 앞으로도 계속 따라잡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 이 교수는 그런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모 자신부터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건강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내가 못 해본 것들을 아이에게는 다 해주고 싶다는 마음도 사교육을 부추긴다"며, "그렇게 아이한테 '올인'하는 동안 부모 자신부터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아이가 행복할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유아교육의 특징은 그 효과가 눈에 잘 안 보인다는 점"이라며, "점수로 표현되지 않기 때문에 부모들은 답답해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유아교육의 효과는 '점수'가 아니라 지금 아이에게 나타나는 '현상'을 보고 확인해야 한다"며, 부모들이 건강한 양육철학을 가지기를 당부했다.

이 교수는 「적기교육」에서 "양육철학은 '아이를 어떻게 키우고 싶다'에서 출발하지 않는다"며, "양육철학은 '나는 어떤 엄마, 어떤 아빠, 어떤 부모가 되겠다'는 신념에서 출발한다"(50쪽)고 강조한 바 있다.

영유아기에 사교육을 선택하는 또 다른 원인으로 "부모보다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효과적이라는 생각"도 크게 작용한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하지만 이 교수는 "유아교육 제1의 교육자는 부모"라고 단호히 말했다. 

먼저 부모와 자녀의 건강한 관계가 1차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다른 교육들은 '보충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부모는 아이의 첫 번째 선생님"이라며, "1차 교육을 책임져야 할 부모의 역할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특히 맞벌이 가정의 경우 방과후 '돌봄공백'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교육을 선택하는 경우도 많다. 또한 직장을 다니느라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하는 데 따른 '죄책감'을 외식이나 사교육 등 물질적인 보상으로 만회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교수는 아이와 보내는 시간은 "양보다 질"이라고 조언했다.

이 교수는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도 방임하는 부모와 퇴근 후 한 시간이라도 재밌게 같이 노는 부모 중 누가 더 효과적이겠나"라고 물으며, "함께 있는 시간이 짧더라도 질적으로 대해줄 것"을 당부했다.

☞ (하편) "유아 영어학원이 유치원 행세… 전일제 운영 규제해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