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보다는 학폭으로..초등학교 1학년의 현실
류인하 기자 입력 2018.12.23. 09:27[경향신문]
초등학교 1학년 아이가 담임교사에게 조르르 달려와 말한다. “선생님, 지금 복도에서 학교폭력이 일어나고 있어요!” 교사는 급히 복도로 달려나간다. 그곳에는 1학년 아이 둘이 말다툼을 하며 서로를 밀치고 있었다. 담임을 본 아이들이 “선생님, 이거 학폭으로 신고해야죠?”라고 묻는다. 교사는 “일단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며 아이들을 교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옆에서 싸움을 바라봤던 아이들은 “너 이거 ○○가 신고하면 학폭위 열리는 거야”라고 말을 거들었다.
허무맹랑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2018년 현재 대한민국 교육현장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은 친구와의 우정, 화해보다 ‘학교폭력’이라는 단어를 먼저 익히고 있다. 매년 학기 초에 실시하는 학교폭력 예방교육의 효과다.
일선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는 매년 학기 초마다 학교폭력 전담 경찰관이나 외부기관 강사를 통해 ‘학교폭력 예방교육’을 실시한다. 학년이나 연령대에 따라 교육 내용은 다르지만 기본 골자는 ‘친구를 괴롭히는 모든 행위는 학교폭력이고, 학교폭력을 겪었거나 목격했을 경우 법에 따라 지체없이 신고를 해 가해자가 처벌받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격한 행위는 학교폭력으로 규정
“2학년 첫 수업시간에 아이들에게 ‘자, 앞으로 우리 반이 어떤 반이 됐으면 좋은지 각자 이야기해볼까요?’라고 물었다. 사이좋게 지내는 반을 만든다거나 재미있는 반을 만든다거나 하는 대답을 기대했지만 아이들이 내뱉는 말은 ‘학교폭력이 없는 교실이오!’, ‘성폭력이 없는 교실이오!’였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도대체 저 어린 아이들이 무엇을 보고 배워왔길래 학교폭력, 성폭력이라는 단어를 저렇게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다.”(경기도 A초등학교 교사)
실제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모아놓고 실시하는 학교폭력 예방교육은 친구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과격한’ 행위를 학교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학교폭력을 당했거나 목격했을 때는 무조건 신고하도록 가르친다. 친구들 간에 대화를 하거나 서로 사과하고 화해하는 등의 일련의 행위들이 개입할 수 없도록 하는 셈이다.
교육현장에서 현재 활용하고 있는 저학년용(1~4학년) 학교폭력 예방교육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친구를 놀리거나, 친구가 부끄러워하는 점을 퍼트리는 행동, 무엇인가 강제로 시키는 행동 등 직접적 가해행위나 친구를 괴롭히는 동안 망을 보는 행동, 친구를 놀리고 골탕먹일 때 함께하는 행동, 다른 친구가 맞는 것을 못본 척하는 행동 등 방조하거나 간접적으로 가담한 행위들에 대해서도 학교폭력으로 규정짓는다.
문제는 이후의 과정들에 대한 지침이다. 친구를 아프게 했다면 받게 되는 벌의 종류를 설명하면서 학폭위 가해자에게 내려지는 각호처분을 나열한다. 괴롭힌 친구에게 사과해야 해요(1호), 학교나 밖에서 봉사활동을 해요(3·4호),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될 수 있어요(6호), 다른 반으로 옮겨가야 해요(7호), 전학을 가게 돼요(8호), 심리치료를 받아요(5호), 특별교육을 받게 돼요(5호) 등이다. 이어 ‘학교폭력법에서 정하고 있는 이러한 내용들은 벌이기도 하지만 화를 바르게 표현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위한 치료이기도 해요’라고 설명한다. 폭행을 당했을 경우 그날의 일을 꼭 일기에 기록해 증거를 남기는 등의 방법도 아이들이 예방교육을 통해 배우는 대처법이다.
경기도의 B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는 “심지어 저학년 담임들조차도 아이들에게 ‘서로 오해한 게 있으면 대화로 풀어보자’라든가 ‘친구들끼리는 싸울 수도 있지. 먼저 잘못한 친구가 사과하고 서로 안아주자’ 등의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몇 년 전에 2학년 남학생들이 서로 밀치고 때리는 싸움이 있었는데 당시 담임이 아이들을 따로 불러 혼내고 서로 사과하도록 했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좀 더 맞은 아이 부모가 학교장에게 직접 항의를 하고, 담임교체를 요구했다”면서 “아무리 교사가 자율적으로 아이들 간의 갈등을 대화로 풀고 화해를 유도해도 교육부 지침이나 법이 교사들에게 재량을 단 하나도 주지 않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중학교에서 실시하는 학교폭력 예방교육 상황도 신고와 처벌 위주로 이뤄지는 것은 마찬가지다. 서울 C중학교 교사는 “모든 갈등을 대화와 화해로 푸는 것은 불가능하고, 중학생 정도만 돼도 학교폭력 수준이 성인들 못지않을 정도로 잔인하고 지속적이기 때문에 좀 더 강하게 가르칠 필요는 있지만 너무 교육이 사법처리시스템 위주로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신고 전 증거 확보 방법 알려줘
일선 중·고등학교에서 활용하고 있는 학교폭력 예방교육 자료를 살펴보면 아이들 스스로 갈등을 해결하고, 주변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등의 방법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일단 갈등이 빚어졌을 경우 무조건 신고를 하도록 유도하고 증거 확보를 충실히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이메일, 채팅 내용, 게시판 글 등 화면 캡처나 출력을 통해 사이버 자료를 확보하거나 몸에든 멍 등을 촬영한 사진자료, 상대방의 말을 녹음한 녹취자료, 폭력상황을 육하원칙에 따라 기록한 진술서 기록 등을 확보하라고 가르치는 것이 현재 중학생 대상 학폭 예방교육이다.
학폭 예방교육의 결과물은 매년 시·도교육청 차원에서 이뤄지는 학교폭력 실태조사에서도 알 수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지난 8월 29일 발표한 2018년 1차 학교폭력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초교 4학년~고교생 전체 응답자(응답률 92.3%) 가운데 학교폭력 피해를 당한 적이 있다고 응답한 학생은 1.8%(1만1425명)로 전년 같은 기간 대비 0.5%포인트(전년 1.3%), 인원수로는 2320명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초등학생 피해 응답률은 4%(8209명)로 중학교(1%·2079명), 고등학교(0.5%·1104명)보다 월등히 많았다. 통계대로 해석한다면 중학생의 4배, 고등학생의 8배에 달하는 학교폭력이 초등학교 교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천경호 성남서초등학교 교사(리질리언스 저자)는 “통계는 착시현상이다”라고 했다. 천 교사는 “학교폭력으로 판단하는 세 가지 기준인 고의성, 지속성, 심각성 면에서 봤을 때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은 일단 대부분의 폭력에 고의성이 결여된 경우가 많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아이는 그 아이 성향 자체가 그런 것이지 고의적으로 특정한 한 아이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게 아니다”라며 “이는 학교폭력으로 처벌할 영역이 아니라 교사가 교정을 해줘야 하는 영역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초등학교의 학교폭력 피해신고가 중·고등학교의 4~8배가 된다고 해서 그만큼 학교폭력이 초등학교 교실에서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다”면서 “결국 아이들의 모든 행동을 폭력으로 인식하게 하는 교육을 바꿔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류인하 기자 ach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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