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정치적 구호 매몰돼 성급한 추진 ‘경계’… 진지한 고민 통해 장기대책 마련해야
2016년 3월 열린 인공지능(AI)과 인간의 바둑 대결에서 ‘인류 최강’으로 불리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완패하자 국내 여론은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으로 들끓었다.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같은 해 1월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제기된 ‘4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당시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등의 기술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초연결사회’를 만들어 산업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던졌다.
이후 4차 산업혁명은 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박근혜 정부도 지난해 3월부터 “창조경제가 4차 산업혁명을 가져올 것”이라며 슬며시 발을 얹었다. 올해 들어 국회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가속화할 법안이 통과됐고, 대선주자들은 앞다퉈 4차 산업혁명을 차기 정부 국정과제로 언급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4차 산업혁명이 유행처럼 번지는 데는 역설적으로 10년 가까이 지속된 ‘정보통신기술(ICT) 정책 부재’라는 배경이 존재한다. 차기 정권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경제기조가 될 것으로 유력해진 만큼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와 미래에 대비하고, 과학과 산업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4차 산업혁명’은 실존하나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제시한 이가 슈밥 회장은 아니다. 국내에서만 해도 황창규 KT 회장은 “ICT와 산업이 융합하는 새로운 시대”라며 2015년부터 4차 산업혁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이미 50년 전부터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언급됐다는 말도 나온다. 국제적으로는 독일에서 시작한 ‘인더스트리 4.0’ 정책이 4차 산업혁명의 시발점이라는 의견도 있다. 인더스트리 4.0은 기존 기계 생산체제와 사물인터넷이 결합한 완전한 자동화 생산체제를 의미한다. 최근 널리 쓰이는 ‘스마트 팩토리’의 개념도 이와 비슷하다.
‘산업혁명’이라는 단어 자체가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경제·사회적 대혁신을 뜻한 이래 특정 현상을 지칭하기보다는 포괄적인 ‘혁신’의 개념으로 쓰이다보니 이른바 ‘차수’ 구분 자체가 개개인이 정의하기 나름인 셈이다. 차수별 산업혁명을 주도한 기술을 중심으로 하면 그나마 이해가 쉽다. 18세기 중엽 일어난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이, 19세기 중엽 일어난 ‘2차 산업혁명’은 전기가, 20세기 중엽 일어난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가 주도했다는 것이 대체로 학계에 통용되는 개념이다.
슈밥 회장이 세계경제포럼에서 언급한 4차 산업혁명의 개념의 경우 기술 중심으로 봐도 이해가 간단하지는 않다. 그가 “물리학 기술, 디지털 기술, 생물학 기술 등 3개 분야의 융합된 기술들이 경제체제와 사회구조를 급격히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제시한 ‘선도기술’만 10개, 관련 세부 ‘대변혁 기술’만 23개에 달한다. 10개 선도기술 중 물리학 기술로는 무인운송수단·3차원(D)프린팅·첨단 로봇공학·신소재 등 4개가 꼽혔다. 디지털 기술로는 사물인터넷·블록체인·공유경제 등 3개가, 생물학 기술로는 유전공학·합성생물학·바이오프린팅 등 3개가 각각 언급됐다.
슈밥 회장의 정의를 보고 있자면 4차 산업혁명은 새로 등장한 개념이라기보다는 2010년 이후 부각된 신기술이나 유망기술 등을 총망라한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무인운송수단의 대표격인 드론이나 자율주행 자동차만 해도 이미 상용화됐거나 상용화 단계를 앞두고 있는 기술들이다. 사물인터넷이나 로봇공학 등은 컴퓨터나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3차 산업혁명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지적도 있다. 공유경제만 해도 ‘우버’나 ‘에어비앤비’ 등의 글로벌 서비스로 이미 실현단계에 들어섰다. 이 때문에 4차 산업혁명을 두고 ‘실체가 없다’는 비판도 나온다.
불과 6년 전인 2011년에 <3차 산업혁명>이라는 책을 통해 인터넷과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수평적 경제체제의 도래를 주장한 제레미 리프킨은 “3차 산업혁명의 잠재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국내만 해도 2015년까지는 제레미 리프킨이 찾아와 틈틈이 3차 산업혁명을 설파했지만, 2016년에는 슈밥 회장이 정·재계를 돌며 열심히 4차 산업혁명을 ‘세일즈’하고 다녔다.
4차 산업혁명의 ‘실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리지만, 4차 산업혁명에서 거론되는 기술들이 어떤 방향으로든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장윤종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차수 논쟁을 하기에 앞서 슈밥 회장이 거론한 4차 산업혁명에서는 3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디지털혁명’의 구체적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라며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는 미래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이번 논의가 유행에 그치지 않고 우리 경제의 새 좌표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미래창조과학부 통계를 보면 올 1월 ICT 수출액은 138억3000만 달러·수입은 77억9000만 달러로, ICT 수지는 60억5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노트7’ 판매 중단 사태로 휴대전화 부문은 큰 폭으로 수출이 줄었지만,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경기 회복으로 ICT 수지 흑자기조를 이어갔다. 1월 국가 전체의 무역수지는 32억 달러 흑자였다. 다른 산업부문의 적자를 모두 메우고 국가 무역수지를 흑자로 돌릴 만큼 ICT산업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ICT 업계에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2008년부터 최근까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며 국가 차원의 정책 부재 문제를 꾸준히 거론해 왔다. 논란의 출발점은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ICT를 주관하는 두 주무부처인 당시 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부를 해체하면서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는 이른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취지하에 정통부를 해체해 지식경제부, 산업부, 방송통신위원회로 업무를 분리해 이관했다. 과기부 역시 지식경제부 등에 업무를 일부 넘기고 교육부와 통합했다.
‘녹색성장’을 경제기조로 삼은 이명박 정부에서 ICT는 늘 찬밥 신세였다. 미래지향형 녹색성장을 부르짖으면서도 ‘4대강 사업’으로 대표되는 구시대적 건설·토목산업에 집착했던 정책적 괴리에서 나온 결과다. 그나마 정통부의 명맥을 잇던 방통위는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인 최시중 위원장 등 실세들이 자리를 맡아 종편 승인, 인터넷 실명제 도입 등 사실상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됐다.
박근혜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ICT의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미래창조과학부를 만들어 옛 정통부와 과기부 업무를 통합 이관했지만, 이번에는 정책기조 자체가 문제였다. 도입 당시부터 ‘실체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창조경제’를 미래부가 전담케 하면서 박 대통령의 치적을 ‘창조’하느라 ICT와 과학기술계가 동원되는 결과를 낳았다. 편제상 각 산업 간 융합을 촉진하고 과기계를 관장해야 할 1차관에 기재부 출신 공무원이 계속 임명된 점만 봐도 미래부의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다. 지난해 5월에 국가과학기술전략회의가 신설돼 같은 해 8월 인공지능 등 선도기술을 지원하기 위한 ‘9대 국가전략 프로젝트 추진계획’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마저도 동력을 잃은 상태다.
녹생성장과 창조경제의 실패를 만회할 청사진으로 차기 대선주자들이 꺼내든 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직속으로 4차 산업혁명위원회를 신설하고 과학기술정책을 총괄할 국가 컨트롤타워를 재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인적자원 확보를 위한 교육개혁, 정부 차원의 인프라 구축과 혁신 지원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일자리 감소 대비책으로 기본소득제의 실시와 함께 4차 산업혁명 대응위원회 구성을,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민간 주도의 4차 산업혁명을 기조로 교육개혁 및 공정경쟁구조 확립 등을 공약으로 제시한 상태다.
‘혁명’에 앞서 진지한 ‘고민’부터 해야
지난해 세계경제포럼 이후 스위스 최대 은행인 유니언뱅크(UBS)가 발표한 ‘국가별 4차 산업혁명 적응 준비 순위’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139개국 중 25위를 기록했다. 아시아의 일본(12위), 대만(16위)보다 순위가 낮고 중국(28위)과 비슷한 위치였다. 세부항목별로는 기술수준에서 23위, 교육시스템에서 19위, 노동시장의 유연성에서 83위 등의 순위를 보였다. UBS의 집계가 절대적인 수치는 아니지만 순위가 낮을수록 4차 산업혁명을 시작할 준비가 덜됐다는 뜻으로는 해석할 수 있다.
한 과학계 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을 한다지만 당장 누가 나서서 주도할 전문가도 없고, 이를 뒷받침해줄 인적자원도 없다”며 UBS의 집계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다. 민간기업의 준비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 대부분이 혁신을 주도하기보다는 공개된 혁신을 따라가는 ‘패스트 팔로어’인 탓이다. 국내 최고 ICT 기업이라는 삼성전자도 ‘알파고 사태’로 인공지능이 집중 조명받은 뒤인 지난해 10월에야 미국의 인공지능 플랫폼 기업 ‘비브랩스’를 부랴부랴 인수했다.
전문가들은 정치적 구호에 매몰돼 성급하게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하기보다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장기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대선주자들이 깊이 있는 분석과 성찰 없이 유행을 좆아 앞다퉈 4차 산업혁명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4차 산업혁명이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예로 최근 대선국면에서 제기되는 ‘기본소득 논란’ 역시 4차 산업혁명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4차 산업혁명에서 추구하듯이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서 인공지능 등을 바탕으로 일정부분 ‘완벽한 자동화’가 실현된다면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될 테고,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 변동에 따른 필연적인 기본소득 도입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 보고서는 “향후 한국 내 일자리의 63%가 자동화에 밀려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4차 산업혁명에서 얘기하는 공유경제의 경우 기존에 있는 것을 공유하고 나누어 쓰니 경제성장에는 도움이 안 될 수 있다”며 “4차 산업혁명이 왔는지, 올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앞으로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가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그렇게 되면 이전 산업들도 엄청난 변화를 겪을 텐데, 우린 아직 그런 변화를 겪을 준비가 안 됐고 여러 법적·사회적 제도도 마련돼 있지 않다”며 “정부가 경제성장 관점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과학기술을 ‘성장 동력’으로만 바라본다면 4차 산업혁명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다.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차두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은 “4차 산업혁명에서 제시한 선도기술들을 쫓아가는 시도만으로는 혁신과 모방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페스트 팔로어의 비극을 재차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혁신을 주도하기 위한 ‘고위험성 혁신 연구’와 혁신의 기반이 되는 기초연구 육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2016년 3월 열린 인공지능(AI)과 인간의 바둑 대결에서 ‘인류 최강’으로 불리는 이세돌 9단이 ‘알파고’에게 완패하자 국내 여론은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놀라움으로 들끓었다.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같은 해 1월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제기된 ‘4차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당시 클라우스 슈밥 세계경제포럼 회장은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등의 기술이 모든 것이 연결되는 ‘초연결사회’를 만들어 산업에 새로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4차 산업혁명을 화두로 던졌다.
이후 4차 산업혁명은 글로벌 경제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는 분위기를 보이고 있다. 박근혜 정부도 지난해 3월부터 “창조경제가 4차 산업혁명을 가져올 것”이라며 슬며시 발을 얹었다. 올해 들어 국회에서는 4차 산업혁명을 가속화할 법안이 통과됐고, 대선주자들은 앞다퉈 4차 산업혁명을 차기 정부 국정과제로 언급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 4차 산업혁명이 유행처럼 번지는 데는 역설적으로 10년 가까이 지속된 ‘정보통신기술(ICT) 정책 부재’라는 배경이 존재한다. 차기 정권에서는 4차 산업혁명이 경제기조가 될 것으로 유력해진 만큼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와 미래에 대비하고, 과학과 산업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을 고민해야 할 때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기업가인 클라우스 슈밥이 지난해 10월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 관련 특별대담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4차 산업혁명’은 실존하나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을 처음 제시한 이가 슈밥 회장은 아니다. 국내에서만 해도 황창규 KT 회장은 “ICT와 산업이 융합하는 새로운 시대”라며 2015년부터 4차 산업혁명을 거론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이미 50년 전부터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언급됐다는 말도 나온다. 국제적으로는 독일에서 시작한 ‘인더스트리 4.0’ 정책이 4차 산업혁명의 시발점이라는 의견도 있다. 인더스트리 4.0은 기존 기계 생산체제와 사물인터넷이 결합한 완전한 자동화 생산체제를 의미한다. 최근 널리 쓰이는 ‘스마트 팩토리’의 개념도 이와 비슷하다.
‘산업혁명’이라는 단어 자체가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경제·사회적 대혁신을 뜻한 이래 특정 현상을 지칭하기보다는 포괄적인 ‘혁신’의 개념으로 쓰이다보니 이른바 ‘차수’ 구분 자체가 개개인이 정의하기 나름인 셈이다. 차수별 산업혁명을 주도한 기술을 중심으로 하면 그나마 이해가 쉽다. 18세기 중엽 일어난 ‘1차 산업혁명’은 증기기관이, 19세기 중엽 일어난 ‘2차 산업혁명’은 전기가, 20세기 중엽 일어난 ‘3차 산업혁명’은 컴퓨터가 주도했다는 것이 대체로 학계에 통용되는 개념이다.
슈밥 회장이 세계경제포럼에서 언급한 4차 산업혁명의 개념의 경우 기술 중심으로 봐도 이해가 간단하지는 않다. 그가 “물리학 기술, 디지털 기술, 생물학 기술 등 3개 분야의 융합된 기술들이 경제체제와 사회구조를 급격히 변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며 제시한 ‘선도기술’만 10개, 관련 세부 ‘대변혁 기술’만 23개에 달한다. 10개 선도기술 중 물리학 기술로는 무인운송수단·3차원(D)프린팅·첨단 로봇공학·신소재 등 4개가 꼽혔다. 디지털 기술로는 사물인터넷·블록체인·공유경제 등 3개가, 생물학 기술로는 유전공학·합성생물학·바이오프린팅 등 3개가 각각 언급됐다.
클라우스 슈밥의 저서 <4차 산업혁명> 책 표지. / 경향신문 자료사진
불과 6년 전인 2011년에 <3차 산업혁명>이라는 책을 통해 인터넷과 재생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수평적 경제체제의 도래를 주장한 제레미 리프킨은 “3차 산업혁명의 잠재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에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국내만 해도 2015년까지는 제레미 리프킨이 찾아와 틈틈이 3차 산업혁명을 설파했지만, 2016년에는 슈밥 회장이 정·재계를 돌며 열심히 4차 산업혁명을 ‘세일즈’하고 다녔다.
4차 산업혁명의 ‘실체’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은 엇갈리지만, 4차 산업혁명에서 거론되는 기술들이 어떤 방향으로든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데는 별 이견이 없다. 장윤종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차수 논쟁을 하기에 앞서 슈밥 회장이 거론한 4차 산업혁명에서는 3차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디지털혁명’의 구체적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시기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라며 “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는 미래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성격을 띠고 있으므로 이번 논의가 유행에 그치지 않고 우리 경제의 새 좌표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밝혔다.
과학계와 ICT 산업의 ‘잃어버린 10년’
미래창조과학부 통계를 보면 올 1월 ICT 수출액은 138억3000만 달러·수입은 77억9000만 달러로, ICT 수지는 60억5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삼성전자의 ‘갤럭시 노트7’ 판매 중단 사태로 휴대전화 부문은 큰 폭으로 수출이 줄었지만,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경기 회복으로 ICT 수지 흑자기조를 이어갔다. 1월 국가 전체의 무역수지는 32억 달러 흑자였다. 다른 산업부문의 적자를 모두 메우고 국가 무역수지를 흑자로 돌릴 만큼 ICT산업은 중요하다.
그럼에도 ICT 업계에서는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인 2008년부터 최근까지를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하며 국가 차원의 정책 부재 문제를 꾸준히 거론해 왔다. 논란의 출발점은 2008년 2월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하자마자 ICT를 주관하는 두 주무부처인 당시 정보통신부와 과학기술부를 해체하면서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는 이른바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는 취지하에 정통부를 해체해 지식경제부, 산업부, 방송통신위원회로 업무를 분리해 이관했다. 과기부 역시 지식경제부 등에 업무를 일부 넘기고 교육부와 통합했다.
‘녹색성장’을 경제기조로 삼은 이명박 정부에서 ICT는 늘 찬밥 신세였다. 미래지향형 녹색성장을 부르짖으면서도 ‘4대강 사업’으로 대표되는 구시대적 건설·토목산업에 집착했던 정책적 괴리에서 나온 결과다. 그나마 정통부의 명맥을 잇던 방통위는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인 최시중 위원장 등 실세들이 자리를 맡아 종편 승인, 인터넷 실명제 도입 등 사실상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됐다.
박근혜 정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ICT의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미래창조과학부를 만들어 옛 정통부와 과기부 업무를 통합 이관했지만, 이번에는 정책기조 자체가 문제였다. 도입 당시부터 ‘실체가 없다’는 비판을 받았던 ‘창조경제’를 미래부가 전담케 하면서 박 대통령의 치적을 ‘창조’하느라 ICT와 과학기술계가 동원되는 결과를 낳았다. 편제상 각 산업 간 융합을 촉진하고 과기계를 관장해야 할 1차관에 기재부 출신 공무원이 계속 임명된 점만 봐도 미래부의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다. 지난해 5월에 국가과학기술전략회의가 신설돼 같은 해 8월 인공지능 등 선도기술을 지원하기 위한 ‘9대 국가전략 프로젝트 추진계획’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면서 이마저도 동력을 잃은 상태다.
녹생성장과 창조경제의 실패를 만회할 청사진으로 차기 대선주자들이 꺼내든 것이 바로 4차 산업혁명이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대통령 직속으로 4차 산업혁명위원회를 신설하고 과학기술정책을 총괄할 국가 컨트롤타워를 재구축하겠다”고 밝혔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4차 산업혁명에 필요한 인적자원 확보를 위한 교육개혁, 정부 차원의 인프라 구축과 혁신 지원체계를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은 4차 산업혁명에 따른 일자리 감소 대비책으로 기본소득제의 실시와 함께 4차 산업혁명 대응위원회 구성을,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는 민간 주도의 4차 산업혁명을 기조로 교육개혁 및 공정경쟁구조 확립 등을 공약으로 제시한 상태다.
‘혁명’에 앞서 진지한 ‘고민’부터 해야
지난해 세계경제포럼 이후 스위스 최대 은행인 유니언뱅크(UBS)가 발표한 ‘국가별 4차 산업혁명 적응 준비 순위’에서 한국은 조사대상 139개국 중 25위를 기록했다. 아시아의 일본(12위), 대만(16위)보다 순위가 낮고 중국(28위)과 비슷한 위치였다. 세부항목별로는 기술수준에서 23위, 교육시스템에서 19위, 노동시장의 유연성에서 83위 등의 순위를 보였다. UBS의 집계가 절대적인 수치는 아니지만 순위가 낮을수록 4차 산업혁명을 시작할 준비가 덜됐다는 뜻으로는 해석할 수 있다.
한 과학계 관계자는 “4차 산업혁명을 한다지만 당장 누가 나서서 주도할 전문가도 없고, 이를 뒷받침해줄 인적자원도 없다”며 UBS의 집계가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견해를 밝혔다. 민간기업의 준비 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 대부분이 혁신을 주도하기보다는 공개된 혁신을 따라가는 ‘패스트 팔로어’인 탓이다. 국내 최고 ICT 기업이라는 삼성전자도 ‘알파고 사태’로 인공지능이 집중 조명받은 뒤인 지난해 10월에야 미국의 인공지능 플랫폼 기업 ‘비브랩스’를 부랴부랴 인수했다.
도요타가 올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박람회 ‘CES 2017’에서 선보인 자율주행 콘셉트카 ‘유이’. / 연합뉴스
전문가들은 정치적 구호에 매몰돼 성급하게 4차 산업혁명을 추진하기보다는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통해 장기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경배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대선주자들이 깊이 있는 분석과 성찰 없이 유행을 좆아 앞다퉈 4차 산업혁명 공약을 남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4차 산업혁명이 사회 전반에 미칠 영향이 어느 정도일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 예로 최근 대선국면에서 제기되는 ‘기본소득 논란’ 역시 4차 산업혁명과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4차 산업혁명에서 추구하듯이 제조업이나 서비스업에서 인공지능 등을 바탕으로 일정부분 ‘완벽한 자동화’가 실현된다면 수많은 실업자가 양산될 테고,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 변동에 따른 필연적인 기본소득 도입 문제와 연결될 수 있다. 지난해 세계경제포럼 보고서는 “향후 한국 내 일자리의 63%가 자동화에 밀려나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4차 산업혁명에서 얘기하는 공유경제의 경우 기존에 있는 것을 공유하고 나누어 쓰니 경제성장에는 도움이 안 될 수 있다”며 “4차 산업혁명이 왔는지, 올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앞으로 기존 패러다임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변화가 많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고 밝혔다.
정 교수는 “그렇게 되면 이전 산업들도 엄청난 변화를 겪을 텐데, 우린 아직 그런 변화를 겪을 준비가 안 됐고 여러 법적·사회적 제도도 마련돼 있지 않다”며 “정부가 경제성장 관점에서 국가를 운영하고 과학기술을 ‘성장 동력’으로만 바라본다면 4차 산업혁명에 제대로 대비할 수 없다.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차두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은 “4차 산업혁명에서 제시한 선도기술들을 쫓아가는 시도만으로는 혁신과 모방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페스트 팔로어의 비극을 재차 반복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며 “혁신을 주도하기 위한 ‘고위험성 혁신 연구’와 혁신의 기반이 되는 기초연구 육성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송진식 기자 truej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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