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지 않게 올라도 멋진 풍광을 보여주는 고마운 제주의 보물 오름. 그 부드러운 능선을 여유롭게 거닐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중산간 들녘의 오름 위에서 하룻밤 야영을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어스름한 새벽녘의 오름은 또 어떤 풍경을 보여줄까?
육지에서 온 여행자에게는 그저 상상만 할 수 있는 '꿈같은 일'이다. 300개가 넘은 제주 오름 가운데 그런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이름도 정다운 모구리 오름 자락의 모구리 야영장이 바로 그곳이다.
반짝이는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 아래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에 휩싸인 한밤의 오름, 이른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느낌의 오름…. 이곳에서 오름의 다양한 얼굴과 진면목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 게다가 야영장의 하루 이용료가 2400원이라니... 자전거 여행자는 중산간 들녘의 오르막길을 힘든 줄 모르고 달려가게 된다. 지난 6월 6일 제주 섬에서의 캠핑, 그것도 오름 캠핑은 제주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과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줬다.
1000년 살아도 생기 넘치는 나무들
ⓒ 김종성
ⓒ 김종성
제주의 남쪽 서귀포 앞바다를 실컷 바라보며 하루 저녁 신세를 졌던 표선 해수욕장을 떠나 모구리 오름과 야영장이 있는 내륙의 중산간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표선리 동네를 지나 북쪽으로 계속 달려가다 보면 한라산 기슭 아래의 유서 깊은 마을 성읍리(城邑里) 민속마을을 만나게 된다.
제주의 상징인 옛 돌하르방들이 성문 앞을 지키고 서 있고, 마을을 둘러싼 성곽을 비롯해 전형적인 제주의 집들과 돌담이 있다. 초가를 얹은 옛 가옥들이 아름답고 정겹다. 성읍리 마을은 조선 세종 때부터 1941년 군현제가 폐지될 때까지 500여 년 동안 현청 소재지였던 곳이다.
마을 한복판에 하늘을 가릴 듯 넉넉한 그늘을 품고 서서 성읍리의 역사와 전통을 생생하게 전하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군(群)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된 노거수 느티나무는 추정 수령만 1000년이 넘는 천년수(千年樹)다. 고려시대부터 이 마을에 살던 고목나무 밑 그늘에 앉아 쉬어가는 기분은 더없이 편안했다.
한눈에 다가오는 장대하고 강력한 느낌에 신령스러움까지. 성읍리 마을의 신목(神木)이자 수호신으로 딱 맞는 것 같다. 요즘 같이 더운 날 사람들에게 무성한 녹음과 시원한 그늘을 주는 느티나무 쉼터.
느티나무(제주 말로는 '굴무기낭')는 예부터 나무로 들어찬 숲이 아닌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주민들과 사는 나무다. 또한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병충을 잘 타지 않아 오래 사는 장수목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도에서 자생하고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가 이 노거수 느티나무라고 한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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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대 남부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팽나무 또한 600년이 넘은 고목이다. 이름이 재미있는 이 나무는 느티나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래살고 크게 자라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다. 대한민국 산림청의 보호수지에 등재된 노거수 중에는 느티나무가 가장 많고, 팽나무는 두 번째로 많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에게 친근한 나무라고 할 수 있겠다.
옛날 아이들은 팽나무 열매를 대나무 대롱에 넣고 손바닥을 쳐서 열매를 '팽팽하게' 날리는 놀이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열매를 '팽'이라 불렀고, 열매 이름을 따 나무 이름도 '팽나무'가 됐다고 한다. 팽나무는 어디서든 잘 자라고, 성장이 빠르며 뿌리가 강건해 강풍이나 태풍·해풍에 강하다. 팽이버섯도 팽나무에서 자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둘러보다 보니 골목 곳곳에 큰 느티나무·팽나무 외에도 후박나무·동백나무·아왜나무들이 살고 있었다. 야트막하면서도 둥근 지붕과 나무들이 어울려 정겨운 풍경을 자아냈다.
나무들이 살고 있는 자리도 다양했다. 마을 입구에서 주민들의 정자 역할을 하는 '정자나무'가 있는가 하면, 제사를 지냈을 법한 신목(神木)으로 보이는 '당산나무', 집 앞에서 수호신처럼 서 있는 나무, 집 돌담 사이에서 살며 돌담을 더욱 튼실하게 해주는 나무도 있었다.
돌담을 쌓을 때 그 자리에 살던 나무를 베지 않고 돌과 나무를 이어 붙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팽나무 옆을 지나가다 어느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나무껍질에 절묘하게 그려져 있어 무척 놀랐다. 묘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들이다. 성읍리 나무들은 자칫 틀에 박힌 모습을 변모하기 쉬운 민속마을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제주의 바람과 별 품은 오름 야영장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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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오름들이 고개를 들고 반기는 한적한 중산간 들판을 달리다가 모구리 오름 자락 야영장에 닿았다. 서귀포시 청소년수련장으로 운영하는 이곳에는 샤워장·취사장은 물론 축구장·체력단련장·놀이터 등 다양한 부대시설이 있다. 오름 위의 이런 야영장에서 단 하루만 보낸다면 아쉬울 것만 같아 3일을 예약했다.
이렇게 예약을 해도 야영장 이용료가 1만 원이 안 되니 횡재한 기분이다. 추가 비용 없이 전기도 쓸 수 있다. 관리실 아저씨는 "여기에서 한 달씩 묵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라고 귀띔해줬다. 이곳은 성산읍 성산항에서 차로 30분 거리라 육지에서 오토 캠퍼(Auto Camper)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야영을 할 수 있는 부지가 3만 평 정도 되다 보니 텐트 칠 자리 구성은 자유로운 편이다. 야영용 나무 데크가 따로 없는 대신 잔디 위에 자유롭게 텐트를 치면 되는 것도 모구리 야영장의 특징이다.
집(텐트)을 지어 놓고 참치찌개에 밥도 든든히 먹은 뒤, 꿈에 그리던 해 질 녘 오름 산책에 나섰다. 야영장에서 모구리 오름까지 탐방로가 잘 조성돼 있어 날이 어두워져도 걱정 없이 걷기 좋았다. 저녁 무렵 길섶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마치 내게 말을 거는 듯 생생하게 들려왔고, 꿩 소리는 이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완만한 경사길을 오를수록 주변의 이웃 오름들이 펼쳐졌다. 땅이 울룩불룩 숨 쉬는 것처럼 솟아있다.
경사면 안쪽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 모구리 알오름이라는 이곳은 하늘에서 보면 어미개가 새끼를 안은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오름을 모구악(母狗岳), '모구리'라 부른다고.
오름 북쪽 뒤편에 서 있는 거대한 풍차(풍력 발전기)들이 이채로웠다. 해 질 녘에 보이는 중산간 들녘의 풍력발전기들은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어스름한 하늘, 마침 비행기 한 대가 하늘에 하얀 흔적을 남기며 하강했다. 마치 별똥별이 떨어지는 듯했다. 고요함이 깨질까봐 속으로 여러 번 감탄을 삼켰다. 다음 날 이런 아침에 마주할 또 다른 풍경을 기대하며 땅거미가 져가는 오름길을 터벅터벅 내려왔다.
바람 부는 오름... 잠 못 이루는 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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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돌처럼 새까만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과 풍력 발전기의 거대한 날개가 보이는 자리에 텐트를 쳤다. 텐트 안에 들어가 누워봤다. 라디오 소리와 이웃 텐트 여행자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듣다가 스르르 꿈속에 빠져들었다.
얼마쯤 됐을까.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바람 소리 때문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바람이 텐트를 날려버릴 듯한 기세로 습격하고 있었다. 텐트가 바람에 부대끼며 흔들리다 폴대(텐트의 기둥)가 부러질 것 같아 몸을 일으켜 텐트 양쪽을 손으로 붙잡았다.
한라산 기슭을 휘돌다 나온 산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다가 잔잔해져 눈을 붙이려고 하면, 성산 앞바다에서 올라온 바닷바람이 물결치듯 텐트를 뒤흔들었다. 잠을 이루지는 못했다. 1년에 꼭 텐트 몇 동이 바람 때문에 망가진다는 야영장 관리실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두려워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가까이에 함께 야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잠을 포기하고 DMB 방송이나 봐야겠다 생각해 기기를 켰더니…. 놀랍게도 흔들림 하나 없이 잘 나왔다. 제주의 거센 바람도 전파는 어찌하지 못하나 보다.
문득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강한 바람 혹은 태풍이 불어올 때는 최대한 몸을 바닥과 가까이 낮춰야 하지 않는가. 나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텐트 폴대를 모두 접어내리고 텐트를 이불처럼 덮었다.
뜻하지 않게 비박(Biwak)을 하게 된 것이다. 비박은 독일어인데, 우리말로는 '한데(한뎃잠)'이다. 우리말에서 느껴지듯 등산이나 트레킹 도중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텐트를 치치 않고 한데서 잠을 지새우는 것을 말한다. 침낭 속에 누워서 텐트를 내려 덮으니 예상대로 바람은 머리 위로 휘휘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텐트가 날아가는 사고는 피했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은 새벽녘까지 계속됐다. 바람이 내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탓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소변이 마려워 텐트 밖으로 나서기도 했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지만, 차갑지 않아 덜 두려웠다. 폭풍인 줄 알았는데, 밖에서 맞는 바람은 의외로 괜찮았다. '텐트 안에서는 바람 소리가 증폭돼 들리는 구나'라는 교훈을 얻었다.
오름 아래 서귀포 앞바다에 한창 조업 중인 새벽 고기잡이 배들의 불빛이 어슴푸레 보였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불빛마저도 바람에 흔들렸다.
새벽녘까지 바람 소리에 뒤척이느라 이른 아침 오름 산책을 포기하고 늦잠을 잤다. 난장판이 된 텐트 속에서 고개를 쑥 내밀고 일어났다. 캠핑하러 온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무덤에서 깨어난 사람을 본 것처럼 말이다.
늦은 아침, 오름 산책에 나섰다. 야영장에 웬 대피소 건물이 보였다. 전날 밤처럼 미친 듯이 바람이 불거나 폭우가 쏟아지면 피하는 곳이었다. 이것도 모르고 바람부는 오름에서 비박을 했다니…. 거대한 풍력발전기(풍차)들이 오름 뒤쪽에 있는 이유가 있었다.
아침나절에 오른 모구리 오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맑게 갠 날씨에 탁 트인 제주의 남동쪽 해안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웃음이 실실 터져 나왔다. 낮의 얼굴, 밤의 얼굴이 제각각인 제주의 바람 때문이리라.
육지에서 온 여행자에게는 그저 상상만 할 수 있는 '꿈같은 일'이다. 300개가 넘은 제주 오름 가운데 그런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 있다.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이름도 정다운 모구리 오름 자락의 모구리 야영장이 바로 그곳이다.
반짝이는 별이 총총히 박힌 하늘 아래 칠흑 같은 어둠과 정적에 휩싸인 한밤의 오름, 이른 아침 안개가 피어오르는 몽환적인 느낌의 오름…. 이곳에서 오름의 다양한 얼굴과 진면목을 오롯이 감상할 수 있다. 게다가 야영장의 하루 이용료가 2400원이라니... 자전거 여행자는 중산간 들녘의 오르막길을 힘든 줄 모르고 달려가게 된다. 지난 6월 6일 제주 섬에서의 캠핑, 그것도 오름 캠핑은 제주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과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겨줬다.
1000년 살아도 생기 넘치는 나무들
▲천연기념물인 천년수(千年樹) 느티나무는 성읍마을의 수호신이다.
ⓒ 김종성
▲마을 곳곳에서 살고 있는 여러 나무들은 성읍민속마을의 또 다른 매력.
ⓒ 김종성
제주의 남쪽 서귀포 앞바다를 실컷 바라보며 하루 저녁 신세를 졌던 표선 해수욕장을 떠나 모구리 오름과 야영장이 있는 내륙의 중산간을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표선리 동네를 지나 북쪽으로 계속 달려가다 보면 한라산 기슭 아래의 유서 깊은 마을 성읍리(城邑里) 민속마을을 만나게 된다.
제주의 상징인 옛 돌하르방들이 성문 앞을 지키고 서 있고, 마을을 둘러싼 성곽을 비롯해 전형적인 제주의 집들과 돌담이 있다. 초가를 얹은 옛 가옥들이 아름답고 정겹다. 성읍리 마을은 조선 세종 때부터 1941년 군현제가 폐지될 때까지 500여 년 동안 현청 소재지였던 곳이다.
마을 한복판에 하늘을 가릴 듯 넉넉한 그늘을 품고 서서 성읍리의 역사와 전통을 생생하게 전하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군(群)도 빼놓을 수 없는 볼거리다.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된 노거수 느티나무는 추정 수령만 1000년이 넘는 천년수(千年樹)다. 고려시대부터 이 마을에 살던 고목나무 밑 그늘에 앉아 쉬어가는 기분은 더없이 편안했다.
한눈에 다가오는 장대하고 강력한 느낌에 신령스러움까지. 성읍리 마을의 신목(神木)이자 수호신으로 딱 맞는 것 같다. 요즘 같이 더운 날 사람들에게 무성한 녹음과 시원한 그늘을 주는 느티나무 쉼터.
느티나무(제주 말로는 '굴무기낭')는 예부터 나무로 들어찬 숲이 아닌 사람이 사는 마을에서 주민들과 사는 나무다. 또한 느티나무는 은행나무와 함께 병충을 잘 타지 않아 오래 사는 장수목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도에서 자생하고 있는 나무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큰 나무가 이 노거수 느티나무라고 한다.
▲집 돌담을 더욱 든든하게 만들어 주는 우람한 고목 나무.
ⓒ 김종성
▲오래된 팽나무 껍질에 주름처럼 그려진 어느 노인의 얼굴 형상.
ⓒ 김종성
온대 남부 지방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팽나무 또한 600년이 넘은 고목이다. 이름이 재미있는 이 나무는 느티나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래살고 크게 자라 정자나무로 많이 심었다. 대한민국 산림청의 보호수지에 등재된 노거수 중에는 느티나무가 가장 많고, 팽나무는 두 번째로 많다고 한다. 예로부터 우리에게 친근한 나무라고 할 수 있겠다.
옛날 아이들은 팽나무 열매를 대나무 대롱에 넣고 손바닥을 쳐서 열매를 '팽팽하게' 날리는 놀이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열매를 '팽'이라 불렀고, 열매 이름을 따 나무 이름도 '팽나무'가 됐다고 한다. 팽나무는 어디서든 잘 자라고, 성장이 빠르며 뿌리가 강건해 강풍이나 태풍·해풍에 강하다. 팽이버섯도 팽나무에서 자라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둘러보다 보니 골목 곳곳에 큰 느티나무·팽나무 외에도 후박나무·동백나무·아왜나무들이 살고 있었다. 야트막하면서도 둥근 지붕과 나무들이 어울려 정겨운 풍경을 자아냈다.
나무들이 살고 있는 자리도 다양했다. 마을 입구에서 주민들의 정자 역할을 하는 '정자나무'가 있는가 하면, 제사를 지냈을 법한 신목(神木)으로 보이는 '당산나무', 집 앞에서 수호신처럼 서 있는 나무, 집 돌담 사이에서 살며 돌담을 더욱 튼실하게 해주는 나무도 있었다.
돌담을 쌓을 때 그 자리에 살던 나무를 베지 않고 돌과 나무를 이어 붙인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래된 팽나무 옆을 지나가다 어느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나무껍질에 절묘하게 그려져 있어 무척 놀랐다. 묘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들이다. 성읍리 나무들은 자칫 틀에 박힌 모습을 변모하기 쉬운 민속마을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었다.
제주의 바람과 별 품은 오름 야영장
▲땅거미가 지려고 하는 어스름한 오름길을 걷는 기분은 특별했다.
ⓒ 김종성
▲해 저물무렵 오름 위 하늘에서 별똥별처럼 하강하는 비행기 한 대.
ⓒ 김종성
이름 모를 오름들이 고개를 들고 반기는 한적한 중산간 들판을 달리다가 모구리 오름 자락 야영장에 닿았다. 서귀포시 청소년수련장으로 운영하는 이곳에는 샤워장·취사장은 물론 축구장·체력단련장·놀이터 등 다양한 부대시설이 있다. 오름 위의 이런 야영장에서 단 하루만 보낸다면 아쉬울 것만 같아 3일을 예약했다.
이렇게 예약을 해도 야영장 이용료가 1만 원이 안 되니 횡재한 기분이다. 추가 비용 없이 전기도 쓸 수 있다. 관리실 아저씨는 "여기에서 한 달씩 묵어가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라고 귀띔해줬다. 이곳은 성산읍 성산항에서 차로 30분 거리라 육지에서 오토 캠퍼(Auto Camper)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야영을 할 수 있는 부지가 3만 평 정도 되다 보니 텐트 칠 자리 구성은 자유로운 편이다. 야영용 나무 데크가 따로 없는 대신 잔디 위에 자유롭게 텐트를 치면 되는 것도 모구리 야영장의 특징이다.
집(텐트)을 지어 놓고 참치찌개에 밥도 든든히 먹은 뒤, 꿈에 그리던 해 질 녘 오름 산책에 나섰다. 야영장에서 모구리 오름까지 탐방로가 잘 조성돼 있어 날이 어두워져도 걱정 없이 걷기 좋았다. 저녁 무렵 길섶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는 마치 내게 말을 거는 듯 생생하게 들려왔고, 꿩 소리는 이질적으로 울려 퍼졌다. 완만한 경사길을 오를수록 주변의 이웃 오름들이 펼쳐졌다. 땅이 울룩불룩 숨 쉬는 것처럼 솟아있다.
경사면 안쪽에는 작은 언덕이 있었다. 모구리 알오름이라는 이곳은 하늘에서 보면 어미개가 새끼를 안은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이 오름을 모구악(母狗岳), '모구리'라 부른다고.
오름 북쪽 뒤편에 서 있는 거대한 풍차(풍력 발전기)들이 이채로웠다. 해 질 녘에 보이는 중산간 들녘의 풍력발전기들은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어스름한 하늘, 마침 비행기 한 대가 하늘에 하얀 흔적을 남기며 하강했다. 마치 별똥별이 떨어지는 듯했다. 고요함이 깨질까봐 속으로 여러 번 감탄을 삼켰다. 다음 날 이런 아침에 마주할 또 다른 풍경을 기대하며 땅거미가 져가는 오름길을 터벅터벅 내려왔다.
바람 부는 오름... 잠 못 이루는 밤
▲풍차 날개를 쳐다보며 텐트를 칠 때만 해도 한밤의 바람의 습격은 상상도 못했다.
ⓒ 김종성
▲아침 나절 몽환적인 느낌의 오름 풍경, 풍차들이 풍경의 이채로움에 한 몫 한다.
ⓒ 김종성
제주 돌처럼 새까만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과 풍력 발전기의 거대한 날개가 보이는 자리에 텐트를 쳤다. 텐트 안에 들어가 누워봤다. 라디오 소리와 이웃 텐트 여행자들의 두런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듣다가 스르르 꿈속에 빠져들었다.
얼마쯤 됐을까.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기분으로 잠에서 깼다. 바람 소리 때문이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바람이 텐트를 날려버릴 듯한 기세로 습격하고 있었다. 텐트가 바람에 부대끼며 흔들리다 폴대(텐트의 기둥)가 부러질 것 같아 몸을 일으켜 텐트 양쪽을 손으로 붙잡았다.
한라산 기슭을 휘돌다 나온 산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다가 잔잔해져 눈을 붙이려고 하면, 성산 앞바다에서 올라온 바닷바람이 물결치듯 텐트를 뒤흔들었다. 잠을 이루지는 못했다. 1년에 꼭 텐트 몇 동이 바람 때문에 망가진다는 야영장 관리실 직원의 말이 떠올랐다.
두려워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가까이에 함께 야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다. 잠을 포기하고 DMB 방송이나 봐야겠다 생각해 기기를 켰더니…. 놀랍게도 흔들림 하나 없이 잘 나왔다. 제주의 거센 바람도 전파는 어찌하지 못하나 보다.
문득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 강한 바람 혹은 태풍이 불어올 때는 최대한 몸을 바닥과 가까이 낮춰야 하지 않는가. 나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텐트 폴대를 모두 접어내리고 텐트를 이불처럼 덮었다.
뜻하지 않게 비박(Biwak)을 하게 된 것이다. 비박은 독일어인데, 우리말로는 '한데(한뎃잠)'이다. 우리말에서 느껴지듯 등산이나 트레킹 도중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텐트를 치치 않고 한데서 잠을 지새우는 것을 말한다. 침낭 속에 누워서 텐트를 내려 덮으니 예상대로 바람은 머리 위로 휘휘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텐트가 날아가는 사고는 피했지만, 잠 못 이루는 밤은 새벽녘까지 계속됐다. 바람이 내 귀에 대고 소리를 지르는 탓에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그 와중에 소변이 마려워 텐트 밖으로 나서기도 했다. 바람이 강하게 불었지만, 차갑지 않아 덜 두려웠다. 폭풍인 줄 알았는데, 밖에서 맞는 바람은 의외로 괜찮았다. '텐트 안에서는 바람 소리가 증폭돼 들리는 구나'라는 교훈을 얻었다.
오름 아래 서귀포 앞바다에 한창 조업 중인 새벽 고기잡이 배들의 불빛이 어슴푸레 보였다. 내가 꿈을 꾸는 건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불빛마저도 바람에 흔들렸다.
새벽녘까지 바람 소리에 뒤척이느라 이른 아침 오름 산책을 포기하고 늦잠을 잤다. 난장판이 된 텐트 속에서 고개를 쑥 내밀고 일어났다. 캠핑하러 온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무덤에서 깨어난 사람을 본 것처럼 말이다.
늦은 아침, 오름 산책에 나섰다. 야영장에 웬 대피소 건물이 보였다. 전날 밤처럼 미친 듯이 바람이 불거나 폭우가 쏟아지면 피하는 곳이었다. 이것도 모르고 바람부는 오름에서 비박을 했다니…. 거대한 풍력발전기(풍차)들이 오름 뒤쪽에 있는 이유가 있었다.
아침나절에 오른 모구리 오름은 언제 그랬냐는 듯 바람이 살랑살랑 불었다. 맑게 갠 날씨에 탁 트인 제주의 남동쪽 해안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하게 웃음이 실실 터져 나왔다. 낮의 얼굴, 밤의 얼굴이 제각각인 제주의 바람 때문이리라.
[오마이뉴스 김종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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