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생태/환경생태

무너지는 ‘開花 질서’… 꽃과 벌, 공생 못해 공멸할 수도

인서비1 2011. 5. 22. 09:09

무너지는 ‘開花 질서’… 꽃과 벌, 공생 못해 공멸할 수도


어린이날인 지난 5일 광릉수목원을 찾았을 때 상당수 봄꽃은 졌거나 지고 있었다. 대신 참나무과 활엽수들이 아기 손가락 같은 연두색 새잎을 흔들어댔다.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광릉수목원(국립수목원)에 봄은 늦게 찾아온다. 지금은 산벚꽃이 남은 꽃잎을 흩뿌리는 가운데 피나물, 앵초, 만병초 조팝나무, 철쭉. 귀룽나무의 꽃들이 한창이다.

◇들쭉날쭉 개화시기=산림청 국립수목원 소속 오승환 임업연구사는 올해는 3~4월에 피는 봄꽃이 예년에 비해 10~20일이나 늦게 피었다고 했다. 오 박사는 “지난해와 올해만 볼 경우 3~4월에 꽃이 피는 수종은 개화가 늦어졌지만, 5~6월 개화종은 개화시기가 오히려 빨라졌다”면서 “그러다 보니 여러 꽃이 시기적으로 한꺼번에 모여 피는 경향이 나타난다”고 말했다. 잣나무, 소나무, 아까시나무 등은 꽃이 더 빨리 피고 있다. 심지어 아까시나무는 서울과 남해안 지역에서 같은 시기에 개화한다.

광릉수목원은 한반도 기후변화적응 대상 식물 300종 가운데 취약종 100종을 대상으로 2009년부터 모니터링을 시작했다. 대구수목원, 제주 한라수목원 등 전국의 공립수목원 9개가 동참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광릉수목원 내 식물 21종의 개화시기를 파악한 결과 3~4월 개화 수종의 개화일이 2010년에 크게 늦어졌다. 풍년화, 산수유, 생강나무, 진달래, 목련, 조팝나무 등의 지난해 개화일은 2009년에 비해 7일(풍년화)~35일(생강나무)이나 늦었다. 반면 팥배나무, 이팝나무, 산딸나무 등의 개화일은 각각 5월 8일, 17일, 19일로 2009년과 같았다. 2009년 7월 8일에 꽃봉우리를 터뜨렸던 모감주나무는 지난해에는 6월 29일 처음 꽃을 보여줘 개화시기가 9일 빨라졌다.



기후가 훨씬 따뜻한 홍릉수목원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된다. 홍릉수목원 조사 결과 2009년까지 최근 11년간의 평균 개화시기는 40년 전과 비교해 평균 10일 정도 빨라졌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최근 11년간 평균 개화시기와 비교해 평균 10일 정도 늦어졌다. 특히 3월과 4월 평균기온이 예년보다 계속 낮았던 올해에는 지난해보다도 4~11일이나 늦어졌다.

◇생태계의 혼란 우려=홍릉수목원에서 진달래와 개나리는 지난해보다 9일 늦은 4월 11일과 4월 4일에서야 꽃망울을 터뜨렸다. 벚나무류도 지난해보다 7~11일 후인 4월 12~14일 개화했다. 국립산림과학원 김선희 박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봄꽃이 4월 말까지 한꺼번에 피어 있는 진풍경이 연출됐다”고 말했다. 국립산림과학원 신준환 임업연구관은 “봄꽃이 동시에 피면 보는 사람에게는 좋을 수 있겠지만 자칫하면 곤충은 먹이를, 식물은 열매를 얻지 못한다”고 말했다.

국립수목원의 오승환 박사는 “개화시기가 불규칙해진다는 것은 빠르거나 늦는 시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개화기간이 곤충의 출현시기와 일치하지 않을 경우 멸종으로 갈 수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선희 박사는 “생물 간의 상호균형이 깨지는 현상이 지속되면 생태계 전체의 안정성과 생물 다양성에도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개화시점보다 개화부터 낙화까지 꽃이 피어 있는 개화기간의 변화가 중요하다. 지난 40년간 나도국수나무처럼 개화기간이 늘어난 식물도 있고, 삼색병꽃나무처럼 개화기간이 짧아진 종도 있다. 곤충학을 전공한 국립수목원 김일권 박사는 “매개곤충도 꽃이 빨리 피면 어느 정도 빨리 우화(羽化)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그 시차가 커 수분활동 시간이 줄어들면 문제가 되는데 아직까지 체계적 조사 결과는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국에서는 30년간의 데이터를 축적한 결과 벌과 나비의 출현시기가 1.5일 빨라졌다”며 “우리나라에서 이른 봄 얼레지, 제비꽃, 진달래 등의 꿀을 먹는 애호랑나비는 올 봄 기온이 너무 낮은 탓인지 4월 초에도 잘 안 보였다”고 덧붙였다. 국립산림과학원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수년간 추적조사가 필요한 연구과제에는 정책적·재정적 지원이 뒤따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기후변화 적응의 시험장=특정 식물종이 기후변화에 취약해 멸종위기에 몰리면 적응을 위해 자생지 바깥에 인공 서식처를 마련한 뒤 그곳에 이식해 보전과 증식을 꾀하기도 한다. 국립수목원 오 박사는 “강원도 고산지대에 사는 만병초처럼 서늘한 곳을 선호하는 종을 위주로 연차적으로 기후변화 취약종 100종을 광릉숲에 옮겨 심어 증식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기후변화 취약종으로는 구상나무, 꿩의바람꽃, 미선나무, 깽깽이풀, 만리화, 히어리, 복수초, 산국, 주목, 수수꽃다리, 꽃창포, 자귀나무 등이 있다.

국립수목원 윤미정 임업연구사는 “올 겨울에도 지난겨울에 이어 얼어 죽는 식물이 속출했다”면서 “광릉수목원에는 마지막 서리가 4월 중순에 내리고 일교차가 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립수목원은 죽엽산, 소리봉, 철마산에 둘러싸인 분지로 햇볕이 드는 시간이 짧은 편이어서 평균기온이 주변보다 3~4도 낮다. 오 박사는 “겨울철 영하 25도까지 기온이 내려가는 이곳은 위도가 높은 철원과 기온이 비슷하다”면서 “구상나무, 복수초, 만병초, 주목 등을 증식하기에 적합한 곳”이라고 밝혔다.

숲 안내를 맡은 국립수목원 이정희 박사는 “광릉숲에는 오대산에서 종자를 취해 심었던 300년 전나무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에 조림한 계수나무, 은행나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수종의 자연림과 인공림이 절반씩 분포해 있다”고 말했다. 참나무과 수종들과 서어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광릉수목원에는 천연기념물 장수하늘소가 살고 있지만 개체 수가 적어 쉽게 관찰할 수는 없다. 수도권 도시생태계 속의 생태섬으로 남아 있는 광릉수목원에서 장수하늘소가 개체 수를 회복하게 만들 수는 없을까. 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