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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 이빨과 발톱 다 빠진 무기력한 맹수”

인서비1 2020. 3. 22. 21:04

“한국 노동운동, 이빨과 발톱 다 빠진 무기력한 맹수”

[책과 길] 애도하지 마라 조직하라/ 김창우 지음/ 회화나무/ 440쪽/ 2만3000원

입력 2020-03-19 10:34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신간 ‘애도하지 마라 조직하라’를 추천하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민주노총이 왜 그러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지, 이 책이 그 실마리를 제공한다. 최소한 이 기록들을 읽은 뒤에 한국 노동운동을 비판하자.” 여기서 민주노총을 향한 비판이라고 소개한 내용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노조가 약자입니까? 민주노총을 해체하고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실제로 민주노총을 향한 국민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민주노총이 너무 과격하다고, 비정규직이 겪는 불의를 외면한다고, 투쟁에만 몰두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애도하지 마라…’에서는 전혀 다른 주장이 펼쳐진다. “투쟁을 너무 많이 해서가 아니라 투쟁을 해야 할 때 제대로 못 해서” 무시와 비판, 냉대의 대상이 됐다는 거다. 그러면서 민주노총이 순진하고 무능해서 ‘자본’의 꼬드김이나 속임수에 넘어간 사례를 길게 늘어놓는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은 이 책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노동법 개정에 반대하는 총파업 투쟁이 한창이던 1997년 1월 14일, 권영길(가운데)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 서울 명동성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한국노총 관계자 등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국민일보DB

“무기력한 맹수가 돼버린 민주노총”

‘애도하지 마라…’를 쓴 김창우(64)는 늦깎이 노동학자다.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그가 노동 분야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한 건 2004년부터였다. 창원대 노동대학원에 들어가 전국노동자조합협의회(전노협)에 관한 연구를 했고, 2007년 발표한 ‘전노협 청산과 한국 노동운동’를 통해 이듬해 김진균학술상을 받았다. ‘애도하지 마라…’는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노동운동이 어쩌다 이 지경이 돼버렸는지 분석한 노작(勞作)이자 문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노동운동의 현실은 노동자들이 처한 팍팍한 삶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부의 불평등 수준은 갈수록 기우뚱해지고 비정규직 노동자는 끝도 없이 늘어나는 추세다. 1995년 창립한 민주노총은 이렇게 되기까지 무슨 일을 했던가. 창립 때부터 이 단체는 산별노조 건설과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외쳤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이룬 게 없다. 가령 대표적인 산별노조로는 금속노조와 보건의료노조를 들 수 있는데 이들 노조는 대기업이나 큰 병원을 상대로 산별 교섭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동당 해산 이후 노동계의 정치 세력화 역시 지지부진하다. 저자는 “한국 노동운동은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다 빠진 채 동물원에 갇혀 사육사가 주는 먹이나 받아먹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기력한 맹수가 되어 있다”며 강도 높은 비판을 쏟아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저자의 펜대가 겨냥하는 영점(零點)은 민주노총 1기(96~98)에 맞춰져 있다. 이때 민주노총의 활동을 살피면 한국 노동운동의 추락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알려졌다시피 이 시기엔 두 번의 굵직한 파업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날치기에 맞선 ‘노동법개정 총파업투쟁’과 김대중 정권 당시 열린 ‘정리해고 반대 총파업투쟁’이다. 책에 담긴 모든 내용을 소개할 수 없으니 김영삼 정권 시절 벌인 민주노총의 투쟁만 복기해보자.

손자병법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긴 뒤에 전투를 벌이고, 패배하는 군대는 먼저 싸움을 걸어놓고 이기려고 한다.” 즉,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이겨놓고 싸우는” 구도부터 만들어놔야 한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 노동법 개정에 맞선 총파업은 96년 말부터 이듬해 초까지 이어졌는데, 저자는 96년 상반기를 살피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때 “계급 간 세력 관계를 유리하게 변화시키지 못한 것”이 파업 실패의 이유가 돼서다. 당시 민주노총은 전국적인 투쟁 전선을 구축하는 데 미온적이었고 투쟁보다는 협상을 중시했다. 정리해고제나 변형시간근로제 등이 담긴 노동법 개정이 눈앞에 닥친 상황에서도 상황을 오판했다. 파업 동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감해 12월 13일로 예정된 파업을 유보하기도 했다. 파업을 시작해서는 “일찍부터 투쟁을 마무리할 수순”을 고민했다. 결국 파업을 통해 거머쥔 성과는 상급단체의 복수노조 허용, 즉 민주노총 합법화가 유일하다시피 했다. 이후 쏟아진 조합원들의 발언에서는 허탈한 감정이 묻어난다. “복수노조 금지 조항만 바뀐 셈인데, ‘그러면 결국 민주노총 잘되기 위해서 우리가 뼈 빠지게 파업을 했었나’ 하는 얘기가 제기되곤 했다” “파업은 기조도 잘못되고 내용도 없는, 그리고 최선도 다하지 않은 최악의 끝내기였다” “민주노총에는 투쟁 지침만 있지 이에 따르는 현장의 구체적인 실천 방침에 대한 고민이 없어서 현장 간부가 너무 힘들었다”….



“투쟁 없는 협상은 무력하다”

‘애도하지 마라…’는 민주노총 역사의 가장 중요한 페이지를 새롭게 써 내려간 작품이다. 정설처럼 알려진 주장과 다른 내용이 수두룩하게 실려 있다. 저자는 민주노총 지도부가 조직의 합법화를 위해 정리해고제와 관련된 안건을 양보하려 했다고 폭로한다. 민주노총은 96년 총파업에 참여한 조합원이 387만명을 웃돈다고 발표했는데, 저자는 파업 참가율 등을 봤을 때 그 수가 110만~190만명 수준일 것으로 추산한다. 한국대학생총연합회(한총련)의 와해가 총파업에 악영향을 끼쳤다는 지적도 인상적이다(한총련의 “궤멸”은 가장 강력한 투쟁력과 조직력을 갖춘 지원군을 잃은 결과가 됐다). 마르크스의 계급투쟁 이론을 책의 핵심 뼈대로 삼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저자의 주장은 어기찬 투쟁의 중요성이다. “투쟁이 전제되지 않는 교섭과 협상은 어떠한 힘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민주노총의 역사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낸 작품이 ‘애도하지 마라…’이다. 저자는 첫머리에 비정규직 노동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말미엔 구체적인 ‘민주노총 처방전’을 제시해놓았다. “전국적인 임단협 공동투쟁 전선을 복원할 필요가 있다” “산업‧업종 노조 중심의 과두적 지배 체제를 청산하자” “이길 수 있는 형세를 만들어놓고 싸워야 한다”….

어쩌면 많은 독자에게 달갑지 않은 신간일 듯하다. 민주노총의 활동이 투쟁 일변도라고 여기는 이들에겐 더 강한 싸움을 요구하는 저자의 주문이 마뜩잖을 것이고,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저자의 평가가 야박하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제목이 왜 ‘애도하지 마라 조직하라’인지 설명하자면 이렇다. 미국의 노동운동가 조 힐(1879~1915)은 사형에 처하기 전날 동료들에게 이런 전보를 보냈다고 한다. “나는 진정한 반란자로서 죽을 것이니 나를 슬퍼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조직하라.”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