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history

제주4·3의 도화선..1947년 3·1사건의 목격자들

인서비1 2018. 9. 23. 14:07

제주4·3의 도화선..1947년 3·1사건의 목격자들

입력 2018.09.23. 11:56 수정 2018.09.23. 12:36 
[제주4·3 70주년 기획, 동백에 묻다 2부 ①]
제주북교 운동장엔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인파 넘쳐
항의 군중에 위협 느낀 군정 경찰 발포로 6명 사망
미군정은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 요구에 강경 대응 일관
희생자 유족 "4·3, 용서는 하되 잊지 말아야 인간의 도리"

[한겨레]

제주시 옛 식산은행 터에서 바라본 관덕정(왼쪽). 오른쪽의 제주목관아터에 제1구경찰서와 망루가 있었다.

1947년 3월1일 제주시 관덕정 광장을 뒤흔든 경찰의 발포는 제주4·3으로 가는 도화선이 됐다. 이날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6명이 다치는 이른바 ‘3·1사건’이 일어났다. 희생자 가운데는 초등학생부터 젖먹이를 안은 20대 부녀자도 있었다. 그러나 경찰은 진상조사는커녕 강경대응에 나서면서 제주사회는 혼돈 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계기가 됐다. 이들 희생자는 제주4·3의 첫 희생자들이다. 당시의 3·1사건 현장에 있던 체험자와 유족들의 기억을 통해 71년 전의 사건을 재구성했다.

이날 오전, 제주도민들은 ‘제28주년 3·1기념 제주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제주시 북초등학교로 몰려들었다. 제주시 동쪽으로는 조천, 서쪽으로는 애월 주민들까지 걸어서 학교로 향했다. 대회장은 인파로 넘쳐 각종 기록에는 2만5천~3만여명이 모인 것으로 추정했다. 오라리의 강상순(83)씨와 강씨의 동생 강상돈(80)씨도 학교로 갔다. 20일 만난 강상돈씨는 “그때 같은 마을 허두용(당시 16) 형님을 포함해서 4~5명이 같이 갔다. 이미 운동장에는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두용 형님이 ‘너희들은 안에 들어가면 밟혀 죽을 수 있다’면서 밖에 있으라고 했다. 울타리에 서서 인파를 구경하다가 흩어졌다”고 말했다. 강상순씨는 “관덕정 쪽으로 나와 구경하는데 총소리가 나더니 바로 옆에 서 있던 두용 형님이 쓰러졌다. 총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흩어졌다”고 말했다. 허두용은 3·1사건 희생자 가운데 가장 어린 나이였다.

3·1사건 최연소 희생자 허두용의 묘비에는 3·1절 기념식에 참석 뒤 귀가하다가 경찰의 발포로 숨졌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날 오전 11시부터 시작한 3·1절 기념대회는 제주의 좌파단체들이 주도했으며, 참가자들은 집회가 끝난 뒤 거리시위에 들어갔다. 그러나 참가자들은 좌파만이 아니라 일반인과 학생들도 많았다. 오후 2시45분께 관덕정 앞 광장에서 말을 탄 기마경관이 바로 옆 경찰서로 가던 중 6살가량의 어린이가 말굽에 채였다. 그러나 경찰은 이를 몰랐는지 그대로 가려 했고, 주변에 있던 참가자들이 이에 항의하며 쫓아가자 당황한 경찰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알고 일제히 발포했다.

이 발포로 허두용(당시 16·오라리·제주북교6), 박재옥(21·여·도두리), 양무봉(50·오라리), 오영수(34·건입리), 김태진(40·도남리), 송덕윤(49·도남리) 등 6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 희생자들은 3·1절 기념대회를 구경하러 간 이들이었다.

‘미군 부대가 군중 해산을 지원했다’는 제24군단사령부의 1947년 3월3일자 일일정보보고서 내용.

3·1사건 현장에는 당시 제주도 주둔 미군 제59군정중대가 집회 참가자들의 해산을 지원했다. 당시 제주북교 5학년 양유길(83·여)씨는 “3·1절 기념대회가 있던 북교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데 총소리가 나고 난리가 났다. 미군이 하늘로 공포를 쏘고 식산은행 앞에서 어린아이를 안은 아줌마(박재옥)가 쓰러지는 것을 숨어서 지켜봤다”고 말했다. 이날의 미군 활동은 주한미군사령부의 일일정보보고서(1947년 3월3일)에 기록됐다. 박재옥은 도립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몇 시간 뒤 숨졌다. 총알은 옆구리에서 왼쪽 둔부 쪽으로 관통했다.

3·1사건 바로 전날 일본에서 가족을 데리러 온 오영수는 관덕정으로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왔다. 그의 딸 오추자(80·경기)씨는 “동네 어른이 아버지한테 ‘관덕정 마당에서 행사가 있으니까 같이 가자'라는 말을 듣고 오후 1시께 점심을 먹고 나간 지 얼마 없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렸다”고 기억했다.

3·1사건 희생자 오영수의 제적등본에는 ‘관덕정 앞에서 사망’했다는 문구가 적혀있다.

오씨는 “어머니가 ‘죽으려고 이렇게 왔느냐’고 통곡했던 게 기억난다. 그 다음달 동생이 유복자로 태어났지만 앓다가 4살이 되는 해 죽었다. 남동생도 병으로 죽었다”고 말했다. 오씨는 “바닷가 동네에 살았던 어머니가 잠도 자지 않은 채 바다만 바라보며 멍하게 앉아 있던 모습이 잊히질 않는다”고 말했다.

송덕윤의 아들 송영호(83)씨는 당시 남초등학교 4학년으로, 3·1절 기념대회에 참가했다. 북교에서 산지다리, 공덕공원을 거쳐 동문통으로 행진하던 길에 총소리를 들었다. 송씨는 “총소리가 나자 남문통으로 빠져 학교를 돌아왔다가 집으로 가는데 우리 형님과 동네 분들을 만났다. 그때에야 아버지가 총에 맞아 도립병원에 계시다고 해서 같이 갔다”고 말했다.

송씨는 71년이 지났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달려가서 보니 아버님이 12촌 형님뻘 되는 분의 손을 잡고 ‘살려달라’고 하고 애원하고 있었어. 물을 찾았지만 물을 줄 수가 없었지. 결국 돌아가셔서 도남 청년들이 들것으로 옮겨와 장례를 치렀어.” 송씨는 “총알이 팔에서 허리 쪽으로 관통했다. 당시 경찰서에 망루가 있었는데 망루에서 표적 사격한 것이라고 말했다. 송씨는 9살 위 형님이 이듬해 도남마을이 불탈 때 행방불명되고, 3살 위 누님도 병으로 숨진 뒤 신산한 삶을 살아야 했다.

3·1사건 당시 아버지를 잃은 송영호씨가 3·1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세대는 정말 힘든 시대를 살았다”는 송씨는 4·3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세월이 흘러서 이제는 서로가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아야 해. 자손 이전에 인간의 도리로서 절대로 4·3을 잊어서는 안 돼.”

3·1사건 이후 미군정은 책임자 처벌은커녕 ‘정당방위’라고 강변했다. 이에 항의해 제주도 내 좌·우파단체들도 참여하는 3·10 민관총파업이 일어났고, 미군정은 강경대응으로 일관했다. 1948년 4월3일 무장봉기가 일어날 때까지 제주도민 2500여명이 무차별 검거됐다.

글·사진 허호준 기자 hojo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