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작 민주올레」 – <대방길>
▶ 코스안내 : ①서울영화초 - ②영등포고 - ③유일한기념관 - ④실미도 사건의 현장 - ⑤캠프 그레이 미군기지 터(미군 502군사정보단) - ⑥서울시립부녀보호소 터 - ⑦공군기념탑 - ⑧숭의여중고 - ⑨성남고 - ⑩서울공고
서울의 동작구에 속해 있는 대방동은 원래 번댕이라 불리던 마을이었다. 현 대방초등학교 자리(행정구역상 지금은 영등포구 신길동)에 큰 연못이 있었는데, 그 둘레에 마을이 형성되어 번댕이라고 불렀고 한자로는 '울타리 번'자와 '못 당'자를 써서 樊塘里(번당리)라고 했다. 이어 조선 후기에 들어와 번대방리(番大坊里)로 불리다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던 이 지역이 1936년에 경성부에 편입되면서 번대방정(町)으로 바뀌었고, 해방 후 대방동이 되었다.
①「혼혈아 학교」로 출발한 서울영화초, '다문화 시대'를 생각하다
▲ 영화초등학교 입구 영화초등학교는 1962년 개교 당시 국내 유일의 「혼혈아 학교」였다. | |
ⓒ 양승렬 |
1962년에 설립된 영화초는 특별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영등포중학교 교실을 빌려 개교한 영화초는 출범 당시 전국 유일의 「혼혈아 학교」로 일종의 특수학교였다. 영화초의 뿌리는 1958년 미군의 원조로 이태원에 세워진 「유엔 성자학원」이다. 「유엔 성자학원」이 경영난에 봉착하자 서울시가 이를 인수하여 대방동에 정식으로 세운 학교가 바로 영화초였다. 6·25한국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하면서 참전한 외국군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교육할 기관의 필요 때문에 탄생한 학교였던 것이다.
그러나 63명의 어린이로 시작한 영화초는 출범부터 '혼혈아'들을 격리 교육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64년 9월부터 일반학교로 전환하여 대방동, 노량진동 학생들이 대거 편입해 들어오게 되면서 특수학교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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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움의 이색지대"(동아일보, 1962. 11. 3) 영화초등학교는 개교 당시부터 "혼혈아 학교"라는 특성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 |
ⓒ 동아일보 |
이런 영화초의 역사는 '다문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되돌아보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영화초 개교 당시 전국의 '혼혈아'는 5천여 명(보사부 등록 기준 1,500여 명)이었지만, 대부분 초등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대개 외국에 입양되는 운명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혼혈아 학교」였던 영화초 앞에서 1960년대 당시 우리에게 너무 부족했고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소수자에 대한 개방적이고도 포용적인 자세, 차이를 인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열린 자세의 중요성을 새삼 곱씹어 보게 된다.
② 영등포고 학생들, 민주화운동에 나서다
▲ 영등포고등학교 입구 1959년 개교한 영등포고등학교는 1964년 굴욕적 한일회담반대운동에서부터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다. | |
ⓒ 양승렬 |
영등포고 학생들은 5·16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군사정권이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굴욕적인 한일협정'을 추진하자 한일회담반대운동에 적극 나선다. 1959년 학교가 생긴 지 불과 5년만에 일어난 일이다.
한일회담반대운동(6·3항쟁)은 1964년 박정희 군사정권의 조속한 한일협정체결방침 천명과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시작됐다. 1965년 굴욕적 한일협정이 체결되고 여당 단독으로 국회비준이 이루어지는 시기까지 이에 맞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영등포고생들은 한일회담반대운동 초반부터 전면에 나선다. 1964년 3월 24일 서울대생 등 5천여 명이 「사수하자 평화선」, 「일본제국주의를 말살하자」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면서 한일회담반대운동이 본격화된다. 4일간 계속된 시위의 마지막 날인 3월 27일에 영등포고생 900여 명이 중앙청 앞 시위에 합류한 사실이 당시 언론에 보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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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등포고 학생들의 한일회담반대운동 관련 신문 기사(경향신문, 1964. 3. 27) 1964년 3월 27일 900여 명의 영등포고 학생들은 중앙청 앞까지 진출하여 박정희 군사정권의 굴욕적 한일회담 추진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 |
ⓒ 경향신문사 |
영등포생들의 의로운 투쟁의 전통은 1989년 '참교육'을 내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과 이에 대한 징계 파동이 일어났을 때 다시 한 번 힘을 발휘한다. 600여 명의 학생들이 교내 운동장에 모여 농성을 벌이면서 김수환 전교조 분회장에 대한 징계 철회 등을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3일 후에는 교사 15명과 영등포고 졸업 서울대생 21명의 농성으로 이어지고, 교사들의 출근 투쟁이 계속되자 결국 교장이 사표를 내기에 이른다.
한신대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을 하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노동운동가 박태순은 영등포고 24회 졸업생이다. 박태순은 1992년 퇴근길에서 행방불명된다. 10년 만인 2001년에야 새로 만들어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 결과, 시흥역에서 의문의 철도사고로 사망하자 신원불명으로 처리되어 용미리 무연고자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경찰이나 보안사 등 당시 수사기관의 추적을 피하다 사고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여전히 진상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면 박태순 의문사 사건에 대해서도 재조사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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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운동가 박태순의 묘(마석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 박태순은 영등포고등학교 출신의 노동운동가로 1992년 실종되는데, 2001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활동으로 파주 용미리에 무연고자로 처리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 |
ⓒ 김학규 |
다만, 영등포고 교정에 학생들의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는 조형물조차 없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 곧 「동작 민주올레」 -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역사 탐방 ②(<대방길> 2회)가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김학규씨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