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llea님의.. 봄이 오면 대지는 도처에 꽃을 피우고 새롭게 초록빛이 되리니, ‘부활’ - 말러 교향곡 2번 -
Simon Bolivar Youth Orchestra BBC Proms 2011 NYCGB 말러 교향곡 제2번- 구스타보 두다멜 I. Allegro Maestoso 32:48 II. Andante moderato 45:00 III. In ruhig fliessender Bewegung 55:24 IV. Urlicht 1:01:10 V. Im Tempo des Scherzos 7:24 - Dudamel is a music genius, Romantic that embodies the essence of Latin soul. Dudamel é um gênio da musica, romantico , encarna a essencia da alma latina - Maravillosa presentación!!!!!!! Espléndido. Emoción hasta las lágrimas en el clímax de esta Sinfonía. Resurrección
교향곡 2번 ‘부활’구스타프 말러 Symphony No.2 Resurrection 교향곡 2번 ‘부활’〉은 죽음에 대한 말러의 고민과 생각을 담아낸 작품이다. 대규모의 악단 편성, 두 명의 독창자와 혼성합창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 등 철학적 주제에 대한 탐구물의 결과를 규모 있게 표현한다. 말러가 1894년에 완성한 두 번째 교향곡은 천국과 부활에 대한 그의 확고한 믿음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오케스트라와 혼성합창단, 두 명의 솔로이스트, 오르간, 무대 밖에 배치된 앙상블 등 대규모 편성이며, 특히 서로 음역이 다른 두 개의 탐탐이 사용된 이례적인 편성으로도 유명하다. 〈교향곡 8번〉과 함께 말러 생전에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작품으로, 말러 스스로도 매우 만족스러워 했던 걸작이다. 〈교향곡 2번〉은 〈교향곡 1번〉의 주인공인 영웅적 거인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말러는 〈교향곡 1번〉을 쓴 뒤 교향시 〈장례식〉(Todtenfeier)을 구상하면서, 영웅적인 승리를 성취했던 거인으로 하여금 죽음에 맞닥뜨리게 했다. 이후 그는 이 교향시를 더욱 발전시켜 6년 만에 〈교향곡 2번〉으로 대중에게 선보였다. 극적 전개와 충만한 영감,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선율과 다채로운 표정들은 죽음과 천국에의 희망을 웅장하게 그려낸다. 죽음을 통해 바라본 인간 존재의 의미
말러가 교향시로 구상했던 〈장례식〉은 폴란드의 시인 미키에비츠가 쓴 동명의 시에 영감을 받은 것이었다. 그는 이후 이 교향시를 교향곡으로 완성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1악장을 ‘장례식’이라고 칭하려 한다. 이는 나의 〈교향곡 1번〉, 영웅의 장례식이다. 그는 이를 통해 삶의 의미를 숙고하고 인간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끝없이 탐구하고 있다. 말러는 자신의 이러한 구상을 프로그램에서 분명하게 밝히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1901년 드레스덴에서 이루어진 초연무대에서 배포된 것으로, 1악장 장례식에서는 ‘죽음 이후에 삶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설명했다. 이어지는 2악장은 생전의 행복한 시절을 기억하고, 3악장에서는 삶의 덧없음을 표현한다. 4악장은 무의미한 삶으로부터 해방됨을 묘사하고 5악장에서는 영원히 지속된 초월적 재생에 대한 열렬한 희망을 담았다고 설명했다. 이 마지막 악장의 주제의식은 이후 〈대지의 노래〉에서 궁극적으로 구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말러는 1893년 마지막 악장만을 남겨둔 채 고심하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악장을 성악곡으로 쓰기로 했지만 적합한 가사를 찾지 못했다. 그가 이 장대한 마지막을 완성하게 된 것은 예기치 않게도 한스 폰 뷜로의 장례식이 계기가 되었다. 그와 폰 뷜로는 1891년에 처음 만나게 되었고 서로의 음악세계를 존중하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이 우정이 이어진 지 3년만인 1894년 폰 뷜로가 사망하게 된다. 그의 장례식에서는 프리드리히 클롭슈토크의 시 ‘부활’을 가사로 한 합창이 노래되었고, 말러는 그토록 찾았던 마지막 악장의 가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클롭슈토크의 시에서 두 개의 연을 가져오고 자신이 나머지 가사를 덧붙여 부활에 대한 확신을 담은 마지막 악장을 완성했다. 우수에 찬 영원한 방랑자, 구스타프 말러 말러는 교향곡을 주로 만든 20세기 초반의 작곡가이다 그는 9개의 완성된 교향곡과 1개의 미완성 교향곡을 작곡하는 과정에서, 교향곡을 내용면에서 그리고 연주 시간과 규모 면에서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올려놓았다. 또한 베토벤의 영향을 많이 받아 교향곡에 성악을 주입하는 시도를 자주 하였다.
말러는 방대한 악기 편성과 거대한 구상을 가진 9개의 교향곡을 완성하여, 후기 낭만파의 웅대하고도 화려한 양식 속에 독일의 전통을 꽃피웠다. 그는 또 가곡 분야에서도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등 여러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이처럼 작품이 교향곡과 가곡에 한정되고, 더구나 이질적인 분야가 훌륭히 융합된 예는 음악사상 드문 일이다.
교향곡 6번과 7번에 사용된 소방울에 대한 일화이다. 말러는 오스트리아 산중의 느낌을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소방울 세트를 특별히 주문 제작했다. 그리고 리허설과 연주를 할 때마다 항상 가지고 다녔다. 1906년 11월, 뮌헨에서 교향곡 6번을 리허설할 때는 연주자의 목에 커다란 소방울을 걸게 한 후 앞뒤로 오가게 했다. 음악적 표현을 위해선 이처럼 우스꽝스런 연주법까지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말러의 10개 교향곡 중에서도 2번 《부활》은 가장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작품으로,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거대한 한 편의 드라마이다. 그가 이 제2번 교향곡의 작곡에 매진하고 있던 1889년에는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11월에 있었던 교향곡 1번의 초연은 말러에게 큰 실망을 맛보게 한다. 그에게 연이어 닥친 이런 불행은 이전부터 구상하고 있던 교향곡 제2번의 내용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말러의 《교향곡 2번》을 가장 잘 지휘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사람은 뜻밖에도 정통 음악인이 아닌 금융잡지사 사장 길버트 카플란이다. 1965년 뉴욕의 카네기홀에서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가 지휘하는 말러의 2번 교향곡 ‘부활’을 숨죽이며 듣던 23살의 청년 카플란은 번개가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듯한 충격을 받게 된다. 그날부터 청년은 자신이 죽기 전에 말러의 '부활'을 직접 지휘해보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마음에 품었다. 그러나 그는 음악이라곤 거의 문외한에 가까운 경영학도였다.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1860년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 칼리슈트의 유대인 집안 열네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들이 음악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부모는 그가 여섯 살 때 피아노 레슨을 받게 했다 열다섯 살이 되면서는 빈 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 연주법과 화성학, 작곡법을 배웠다. 3년 뒤에는 빈 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안톤 브루크너가 거기서 강의하고 있었다. 말러의 지휘자로서의 삶은 1880년 오스트리아의 휴양지 바트 할의 여름 극장에서 시작되었다. 그 다음해부터는 차례로 큰 오페라 하우스의 지휘자 자리를 가질 수가 있었다. 1881년 류블랴나, 1882년 올로뮈츠, 1883년 빈, 1884년 카셀, 1885년 프라하, 1886년에는 라이프치히로 갔다. 1887년, 그는 몸이 아프던 아르투르 니키쉬를 대신해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지휘하며 명성을 확고히 다질 수가 있었다. 이처럼 점차 지휘자로서 성공을 거두게 되면서 경제적인 안정을 얻었고 명성도 높아지게 된다. 1891년 그는 함부르크 오페라와 생애 첫 번째 장기계약을 맺었고 거기서 1897년까지 머물렀다. 작곡가로서의 활약이 시작된 것도 이 기간부터인데, 그즈음 교향곡 1~3번을 작곡하였다.
한편, 말러의 개인적 삶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1902년 말러는 알마 쉰들러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그런데 첫째 딸은 성홍열로 다섯 살에 죽게 된다. 딸의 죽음으로 비탄에 빠져 있던 그에게 또 다른 불행이 찾아든다. 자신에게 심장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의사로부터 운동을 제한하고 걸음 수를 세라는 처방을 받았다. 또 예술적 문제에 대한 그의 완고함은 오페라단 안팎에서 많은 적을 만들어내었다. 여기에 언론의 반유대주의적인 공격은 그를 더욱 괴롭혔다. 결국 1907년 빈 오페라 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즈음 말러에게는 여러 가지 불행한 일들이 겹쳐서 일어났다. 우선 부인 알마의 외도이다. 말러의 부인 알마 쉰들러는 20세기 가장 유명한 팜므 파탈(Femme fatale)이었다. 그녀는 말러의 부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뛰어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의 부인이었고, 유명한 작가 프란츠 베르펠의 부인이기도 했다. 이처럼 알마는 세 번이나 결혼했기 때문에 남편 셋 중 누구의 성(姓)을 따를 것인지 난감해 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말러의 또 다른 불행은 그의 만성적인 심장병현상이었다. 1911년 2월, 그는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인한 발열이 있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공연을 가졌다가 결국 쓰러지고 만다. 결국 심장발작 증세로 1911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나이 50세였다. 시신은 유언에 따라 빈 외곽의 그린칭 공동묘지에 잠든 그의 딸 옆에 안장되었다. 이에 따라 작곡 중이던 《교향곡 10번》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말러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가 않았다. 남들은 한두 개도 겪기 어려운 커다란 슬픔과 고통을 여러 가지 안고 살아가야 했다. 무엇보다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 출신이어서 당시 주류사회에 끼기가 어려웠다는 것, 열네 명의 형제 중 여덟 명이 어린 시절 사망하는 것을 보면서 살아왔다는 것, 가톨릭으로 개종은 했지만 유태인이었기에 유무형의 차별을 당했다는 것, 사랑하는 딸을 다섯 살이라는 어린나이에 저세상으로 보낸 아픔을 안고 살았다는 것. 이뿐만 아니라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공공연한 불륜을 지켜봐야 했고, 자신의 불치병으로 인한 고통까지 안고 살아야 했다.말러는 스스로 이런 탄식을 했다고 한다. 20180227challea5913 할리우드 볼에서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을 지휘 중인 구스타보 두다멜 (2014년) 구스타보 두다멜 엘 시스테마가 낳은 세계적 지휘자
이 시대의 젊은 마에스트로로 통하는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은 1981년 1월 26일 베네수엘라의 바르키시메토에서 태어났다. 트롬본 연주자인 아버지와 성악교사인 어머니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음악에 눈뜬 두다멜은 장난감 인형을 모아서 오케스트라처럼 펼쳐 놓고 그 앞에서 손을 저으며 지휘하는 흉내를 내는 등 어린 시절부터 지휘에 관심을 보였다. 두다멜은 열 살 무렵, 베네수엘라 정부에서 운영하는 음악 교육 프로그램인 엘 시스테마에 들어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오케스트라 활동을 경험했으며, 하신토 라라 음악원에서 작곡과 악기 연주 수업을 들었다. 이후 카라카스에서 엘 시스테마의 창립자인 아브레우(José Antonio Abreu) 박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음악가의 꿈을 키워 나간 두다멜은 18세에 엘 시스테마 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 시몬 볼리바르 유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전격 발탁되었다. 봄은 부활의 계절이다. 봄이 오면 대지는 도처에 꽃을 피우고 새롭게 초록빛이 되리니 저 멀리 곳곳마다 푸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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