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영화

[영화속 경제]<나, 다니엘 블레이크>-새 기술에 느리게 반응하는 ‘슬로 어답터’

인서비1 2018. 1. 7. 21:11
[영화속 경제]<나, 다니엘 블레이크>-새 기술에 느리게 반응하는 ‘슬로 어답터’
  • 페이스북
가난한 사람은 게으른 사람일까. 의지가 나약하고 책임감이 없는 사람일까.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도 때론 벼랑끝에 몰리게 된다. 그게 인생이다. 

평생을 성실한 목수로 살아왔지만 심장병을 앓으면서 돈벌이를 할 수 없게 된 그는 말한다. “나는 게으름뱅이도, 사기꾼도, 거지도, 도둑도, 보험 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내 이름은 다니엘 블레이크입니다.”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 편견과 관료화된 복지제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우리 시대의 이야기를 다룬다. 주치의는 지병인 심장병이 악화된 블레이크에게 일을 그만둘 것을 권고한다. 그런데 비의료인인 상담사의 생각은 다르다. 외상이 그닥 없어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질병수당은 거부당한다. 돈이 없는 블레이크는 실업수당을 타려 하지만 역시 쉽지 않다. 의무적으로 취업교육을 받아야 하고, 구직활동을 했다는 증빙도 해야 한다. 답답한 행정은 비단 블레이크만 겪는 게 아니다. 두 아이의 엄마인 싱글맘 케이티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심적으로 서로를 의지하지만 주머니가 텅빈 현실 앞에서 인간다움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블루칼라의 시인’으로 불리는 켄 로치 감독은 대처리즘을 끊임없이 비판하며 노동자, 실직자, 홈리스, 이주민 등 사회적 약자를 담은 묵직한 영화들을 만들어왔다. 그는 “‘빈민층은 그들의 빈곤을 탓해야 한다’는 것, 이것이 지배층을 지켜주는 핵심”이라며 “그같은 의도적인 잔인함에 대한 분노가 이 영화를 만들게 했다”고 말했다. 

블레이크는 실업수당 상담예약을 하지 못해 쩔쩔맨다. 홈페이지에 가입하고 인증을 해야 하는데 평생 목수일을 한 59세의 블레이크에게는 난해하다. 블레이크는 결국 옆집 청년들에게 도움을 구해 인터넷 예약을 한다. 

블레이크처럼 새로운 기술에 느리게 반응하는 소비자를 ‘슬로 어답터(Slow Adopter)라고 한다. 새로운 기술을 남들보다 먼저 사용해보는 것을 좋아하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슬로 어답터는 웬만하면 신제품을 사지 않는다. 제품이 마르고 닳도록 쓴 뒤 마지못해 새 제품을 사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애 매장을 찾는다. 슬로 어답터는 낯선 첨단기술을 조작해보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성가셔 한다. 

그렇다고 슬로 어답터가 게으른 소비자라고 볼 수는 없다. 어느 측면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소비자다. 시스템이 안정되고 검증된 다음에야 제품을 구입하기 때문이다. 트렌드는 얼리 어답터가 이끌지만 실제 대중적 소비는 슬로 어답터들이 한다. 


블레이크의 이웃집 흑인청년들은 중국의 공장에서 생산한 나이키 신발을 온라인으로 직구입해 동네에서 저가로 판매한다. 영락없는 얼리 어답터의 모습이다.
 
얼리 어답터보다 소비에 더 적극적인 무리도 있다. 헝그리 어답터다. 돈은 없지만 최신제품을 항상 남보다 먼저 구입해 사용하는 사람을 말한다. 돈이 없으니까 최신제품을 먼서 사 쓰다가 중고로 팔고 그 돈으로 다시 최신제품을 산다. 블레이크로서는 이해 안되는 ‘덕후’의 삶일지도 모르겠다. 

<박병률 경향신문 경제부 기자 mypark@kyunghyang.com>



원문보기: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706051808241&code=114#csidx41464169f880b42b6f82d62f4a4a18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