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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외

인서비1 2016. 12. 15. 06:36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외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만종〉 1857~1859년 제작
〈이삭 줍는 여인들〉 1857년 제작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누드〉 1844~1845년 제작



  
  

비교적 먹고살 만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는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잠시 고향으로 돌아와 유지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했지만, 미술계에 온전히 몸을 담기 위해 다시 파리로, 그리고 바르비종으로 삶의 터전을 완전히 옮겼다. 그는 첫 부인과 사별한 후 재혼한 사실조차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을 애지중지하던 할머니의 부고를 접하고도 고향집을 찾지 않을 정도로 무심하고 냉정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화가로 살던 그는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누드〉처럼 한때 파리에서 유행하던 춘화(春畵) 수준의 그림으로 생계를 잇기도 했지만, 낭만적인 풍경화로 드디어 파리 화단에서 인정받기 시작하면서 말년에는 꽤 유복하고 대성한 화가로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

장 프랑수아 밀레 〈몸을 뒤로 젖히고 있는 누드〉

캔버스에 유채 / 33×41㎝ / 1844~1845년 제작 / 오르세 미술관, 파리

밀레도 바르비종에 머물면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그리는 일에 몰두했으나, 빛과 대기와 색으로 이어지는 무념무상의 자연 속에 이야깃거리가 되는 인물들을 집어넣음으로써 다른 바르비종의 화가들과 차이를 두었다. 다만 너른 대자연을 배경으로 한 인물들은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신화나 종교적 인물 혹은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 아니라, 그저 땅을 주인으로 삼고 일하는 농부들이었다. 그 때문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그리는 ‘농민 화가’라는 이름을 얻게 되지만, 밀레는 그런 정치적 입장과 자신을 분리시키고자 했다. 오히려 그는 〈이삭 줍는 여인들〉에서처럼 당시 농사꾼의 일들 중에서도 가장 허드렛일로 고단함의 극을 달리지만 버는 건 변변하지 못한 가혹한 노동의 현장을 지나치게 미화시켜 문제의식이라곤 전혀 없는 지식인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 줍는 여인들〉

캔버스에 유채 / 83.5×110㎝ / 1857년 제작 / 오르세 미술관, 파리

〈만종〉은 하루 일과를 마친 뒤, 아무리 고된 삶이라도 그저 신에게 묵도하는 겸손한 농부의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훗날 그림을 감식한 결과 밀레가 부부 발치에 죽은 아이, 예컨대 열악한 환경 때문에 굶주려서 생을 마감한 아이의 시신을 담은 바구니를 그렸다가 지운 사실이 밝혀진 것으로 보아 본인의 주장이 어떠하든 그에게 분명 현실 고발적 의지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한때 〈만종〉은 미국으로 팔려갔으나 이 사실이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고, 결국은 알프레 쇼샤르(Hippolyte-Alfred Chauchard)라는 대부호이자 미술애호가가 다시 사들여 국가에 기증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 〈만종〉

캔버스에 유채 / 55.5×66㎝ / 1857~1859년 제작 / 오르세 미술관,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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