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society

'바닥을 향한 경쟁'에서 벗어나려면

인서비1 2015. 9. 6. 19:04

[편집국에서] '바닥을 향한 경쟁'에서 벗어나려면 / 정남구

한겨레 | 입력 2015.09.06. 18:40

[한겨레] 우리 한국인은 정말 미친 듯이 일한다. 아니, 일해야 한다. 지난달 9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한국 노동자들은 연간 2163시간(2013년 기준) 일한다. 멕시코(2237시간)를 제외하고는 회원국 가운데 노동시간이 가장 길다. 일본의 1979년(2126시간) 수준보다도 길다.

저녁이 있는 삶은커녕, 휴가가 있는 삶도 한국인과는 거리가 멀다. 온라인 여행사 익스피디아재팬은 2008년부터 세계 주요국의 18살 이상 취업자를 대상으로 유급휴가를 얼마나 썼는지 조사해왔다. 지난해 12월 2014년 조사 결과(25개국 7855명 대상 8~9월 조사)를 발표하면서 익스피디아재팬은 "일본이 7년 연속 최하위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흥분했다. 최하위는 연간 14.6일의 유급휴가 중 7일을 써서, 소화율이 48%에 그친 한국이었다. 브라질, 프랑스, 스페인에선 30일 유급휴가를 100% 다 썼고, 오스트리아 취업자도 25일 휴가를 다 썼다.

왜 이럴까? 노동자들은 단위시간당 보수가 적으니 초과근로로 이를 벌충하고자 한다. 고용주는 피고용인의 수를 줄이려고 한다.

노동개혁이 최대 화두가 돼 있는 지금 '노동시간 단축' 문제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지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정부는 먼지로 뒤덮인 오래된 레코드판을 틀어놓은 듯 '대기업 투자 활성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투자를 위해 해고를 쉽게 하고, 임금 삭감을 쉽게 하고, 파견근로 허용폭을 넓히고, 기간제 근로자를 계속 쓸 수 있는 기간을 늘리자고 한다. 그렇게 임금 비용을 더 줄인다고 일자리가 늘어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기업 수익이 늘어날 뿐이다. 반면 가계의 소득은 줄고, 앞날에 대한 불안은 더욱 커지고, 소비 침체의 골은 더 깊어질 것이다.

해법은 다 안다. 일정 시간을 넘어서는 연장근로와 휴일근로에 대한 보상을 '징벌'적인 수준까지 높여,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자리 수를 늘리는 것이다. 당면한 최대 협상 의제는 이것이어야 한다.

그것으로 문제가 다 풀리지는 않는다. 왜 한국의 노동자들은 자꾸 가난해질까? 좋은 직장의 정규직 일자리에서 밀려난 사람들 사이에 일자리 경쟁은 매우 치열하다. 2014년 우리나라 65살 이상 남성 노인의 42.1%가 일하고, 여성도 23.5%가 일한다. 고용 선진국에 견줘 보면 다른 연령대의 고용률은 낮은데, 유독 노인 고용률은 남녀 모두 갑절을 넘는다. 연금 소득이 매우 적고 가난하기 때문이다.

한번 일자리를 잃은 사람은 재충전하거나, 새 기술을 익힐 겨를이 없다. 기존 급여의 절반에 그치는 실업급여는 그마저도 몇 달 지급하고는 끝이다. 그러니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에도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 최저임금을 못 받는 노동자가 그토록 많은 것은, 법을 위반한 고용주 처벌이 너무 허술하기도 하지만, 최저임금 미만 일자리라도 버텨야 하는 이가 많은 탓이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모든 노인에게 소득에 관계없이 20만원 드리겠습니다"라고 공약했다. 중요한 약속이었는데, 곧 말을 뒤집고 크게 뒷걸음질을 했다. 기초연금 확충은 급한 일이다. 약속을 지키고, 지급액을 더 늘려가야 한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6일 대국민 담화에서 "실업급여를 현재 평균임금 50% 수준에서 60%로 올리고, 실업급여 지급 기간도 30일 더 늘릴 것"이라고 밝혔다.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게 아쉽고, 노동시장 개편의 협상카드라는 게 치졸하다. 하지만 바람직한 방향인 건 분명하다. 실업급여 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여가야 한다. 그래야 노동자들끼리 벌이는 '바닥을 향한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정남구 경제부장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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