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rn/5학년

사설시조

인서비1 2014. 11. 14. 17:08
한국의 고전을 읽는다

사설시조

사대부가 노래한 시정 풍속도

[ 調 ]

 

작자 시비에 휘말린 야한 사설시조

간밤에 자고 간 그놈 아마도 못 잊으리.
기와공의 아들놈인지 진흙에 뽐내듯이, 두더지 아드님인지 국국이 뒤지듯이, 사공놈의 큰 아들인지 삿대로 찌르듯이, 평생에 처음이요 흉중에서 야릇해라.
전후에 나도 무던히 겪었으되 참 맹세하지 간밤 그 놈은 차마 못 잊을까 하노라.

이 노래의 여성 화자 목소리는 매우 도발적이다. 어젯밤 자기 생애 최고의 성적 만족을 못 잊겠다는 언급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기와공, 두더지, 사공놈' 세 비유를 동원해 쾌감의 강도까지 적시하려 한다. 이 비유들은 너무 직접적이고 과격해서 그 내용이 비유에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노출되고 말았다. 뿐만이 아니다. 이런 성적 능력을 가진 상대를 가리켜 거침없이 '그놈'이라고 말한다. 이런 거칠고도 노골적인 표현에 이르면 우리는 그만 아연실색케 된다.
문제는 이 작품이 영조 때 대제학까지 지낸 이정보()의 작품이라는 데 있다. 대제학은 당대 최고 문형()1)의 자리이다. 이정보는 4대에 걸쳐 대제학을 지낸 명문가 태생이다. 이는 조선조 유일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지체높은 가문의 대제학 나리께서 비속한 말을 섞어가며 노골적인 성행위를 드러낸 작품을 썼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이정보는 명문 가문에 값하는 많은 정치적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대표적인 것이 탕평책의 폐단을 골자로 하는 「임금이 바르고 성실하게 힘쓸 9조목」을 영조에게 올려 조정을 놀라게 한 일이다. 그 중 '언로()'에 대해 말한 조목을 살펴보자.

"전하께서는 언관()에 대해 종을 나무라고 짐승을 꾸짖듯이 꺾어 누르고 몰아대십니다. ··· 사람들이 모두 입을 다문 채 대각()에 들어가는 것을 죽을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싫어하여 피하고 있습니다. ··· 삼가 원하건대, 기탄없이 하는 말을 온화한 자세로 받아들이시고, 말 때문에 죄 얻은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십시오."

임금의 실책을 거침없이 지적하고, 임금의 할 일을 서슴없이 제시하는 말들은 가히 놀랍다. 그만큼 이정보는 정치에서 강직하고 타협이 없었다. 이런 그가 속된 말로 노골적인 성행위를 노래한 천박한 작품을 썼을까? 이는 조선시대에도 지금도 여전히 의문이다. 조선시대 가집()들에는 이 작품을 무명()으로 처리하는 것이 많더니, 오늘날에도 작가에 대한 시비는 끊이지 않고 일어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정보가 지은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시조가객 김수장()은 가집 『해동가요』를 편찬하면서, 이정보의 작품을 무려 82수나 실었다. 이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현격히 많은 양이다. 이 중 18수가 사설시조이고, 여기에 문제작 여러 편이 끼어있다. 그럼 김수장의 이 주장은 믿을만한가? 김수장은 『해동가요』를 세 차례 이상 개편했는데, 그때마다 동시대 작가들의 작품을 새로이 수집해 보완했다. 이정보의 작품은 두 번째 개편할 때 수록되었다. 그런데 이 가집에 수록된 다른 작품들은 각기 그 작자가 문제된 적은 한번도 없다. 그만큼 신뢰도가 높은 가집이다. 그리고 김수장과 이정보는 동시대 인물로 둘 다 서울에서 살았다. 결국 이정보의 문제작들은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가객 김수장이 직접 수록한 것이므로 오류가 있었을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제 원작자에 대한 논란의 핵심은 '증거 부족' 때문이 아니다. 지체 높은 사대부가 일반의 통념을 깨고 비속한 작품을 지었다는 데 있다. 즉, 우리의 '이해 부족'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이정보의 사설시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통념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현재적 사유의 틀을 깨고 우리 자신을 확장해보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김수장이 편찬한 『해동가요(海東歌謠)』의 표지와 내용.

김수장이 편찬한 『해동가요()』의 표지와 내용.

사대부의 시선으로 그려낸 시정 풍속도

이정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작품들은 시정바닥의 인물군상들을 노래한 것들이다. 그의 사설시조를 감상한다는 것은 바로 18세기 시정풍속과 마주하는 일이다.

중놈이 젊은 사당년을 얻어 시부모께 효도를 그 무엇을 하여 갈꼬.
송기떡 갈송편과 더덕편포 천초자반 뫼으로 치달아 시금치라 삽주 고사리 그런 멧나물과 들밭으로 내리달아 곰달래 물쑥 게여목 꽃다지와 씀바귀 잔다귀 고돌빼기 두루 캐어 바랑에 꾹꾹 넣어가지, 무엇을 타고 갈꼬.
어화 잡말 한다, 암소 등에 안장 놓아 세삿갓 모시장삼 고깔에 염주 바쳐 어울려 타고 가리라.

'중놈과 사당년'의 만남. 여기서 중은 더 이상 불도를 닦는 스님이 아니다. 중 행세를 하는 시정잡배일 뿐이다. 이들이 만나 사랑을 하고, 부모님께 인사를 간다. 효도 선물을 마련하려는 이들 하층 예비부부의 발걸음은 가볍다. 산으로 내달아 지천으로 널린 산나물을, 밭으로 달려가 가지가지 밭나물을 캐내는 이들의 겅중거림은 경쾌하기만 하다. 그뿐이랴, 부모님께 보일 첫선을 위해 치장도 놓치지 않는다. 여전히 중과 사당패의 옷일 뿐인 삿갓과 장삼, 고깔과 염주가 어디 어울리랴만, 이미 죽이 맞아 돌아가는 이들에게는 제법 그럴듯하게만 여겨진다. 하잘 것 없는 것들뿐이지만, 이들 행동은 야단스러움으로 넘쳐난다.
'중놈과 사당년', 이들이 작품소재가 된 것은 특수계층 인물이라는 호기심 때문은 아닐까? 조선시대 후기 토지마저 잃은 평민들은 유랑민이 되어 사찰로 흘러들거나 떠돌이 사당패 집단에 합류한다. 이들에 대해 실학자 이익(1681~1763)은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중이 되어 떠도는 자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면서, 자식이 셋이면 그 중 하나가 중인 것은 예사라고 증언한다. 그래서 이들 대량으로 발생한 유랑민은 국가 세금수취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결론짓기까지 한다. 얼마나 많은 숫자인가. 중놈과 사당년, 이들은 바로 당시 전형적인 하층민인 것이다.
'중놈과 사당년', 이들 하층민은 어설프지만 모처럼 가족이라는 평상적 삶을 살아갈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 기대는 시정의 일상적 일조차도 과도한 진지성과 열정으로 움직이게 한다. 이정보가 발견한 것은 이런 하층민 삶 안에 자리한 생의 활력이다. '중놈', '사당년', '잡말' 같은 비속어들은 이들이 가진 삶의 활력을 사실적으로 끌어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어휘이다. 이런 비속어들은 작품의 격을 떨어뜨리는 저속한 언어가 아니고, 이들 삶에서 건져 올린 살아있는 언어다. 비속어를 시어로 이끌어와 시정바닥 하층민의 삶을 핍진하게 그려낸 이정보는 가히 시정 풍속 묘사의 달인이라 할 만하다.
나룻터 풍경묘사를 보여주는 작품을 통해 뱃사람들의 시정 풍속과 만나보자.

물 위에 사공 물 아래 사공놈들이 삼사월 전세 대동 실으러 갈 때
일천석 싣는 대동선을 자귀2) 대어 꾸며내어 삼색과일 골라 좋은 것 갖추고 피리 무고를 둥둥 치며 오강 성황신과 남해 용왕신께 손 곧추어 고사할 때, "전라도라 경상도라 울산바다 나주바다 칠산바다 휘돌아 안흥목이라 손돌목 강화목 감돌아들 때, 쟁반에 물 담듯이 만리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게 고스레 고스레 사망 일게3) 하오소서."
어어라 어어라 저어어어라 배 띄워라 지국총 나무아미타불.

남지방의 세금 대동미를 실으러 떠나는 배의 무사귀향을 비는 고사 모습이다. 이 작품에는 고사 상차림과 악기들, 그리고 성황신·용왕신께 비는 무당의 움직임까지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처럼 고사 장면을 세세히 그려 나루 풍속을 보여준 것도 탁월하지만, 무엇보다 고사소리를 당시 무당의 말 그대로 시 안에 옮겨놓음으로써 이 풍속도는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누구나 봤음직한 장면, 그러나 이를 시정의 의미 있는 모습으로 포착한 것은 오직 이정보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사대부로서 사설시조를 제일 처음 짓기 시작한 사람이 이정보이다. 사설시조 장르를 새로이 시도하는 것, 이는 사대부로서 하층 시정인의 삶을 새로운 의미로 발견해냈음을 말해준다.
앞의 "어젯밤 자고 간 그놈"에서 보여주는 것 역시 시정 풍속 중 하나이다. 이 노래 속 여인은 이미 예사 여자는 아니다. 성을 팔아 살아가는 창녀 혹은 기생일 것이다. 그녀가 어젯밤 그놈을 뿌듯함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정작 그녀가 상대하는 인물들은 기와공, 사공놈 같은 시정바닥의 인물들일 뿐이다. 이들 시정인이 뒤얽혀 살아가는 한가운데 자리한 성, 이것이 이정보가 그려낸 성이다. 여기에 작가의 윤리적 시선은 어디에도 없다. 정작 윤리적 시선을 가지고 원작자를 의심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우리다. 조선시대 사대부보다 우리의 시선이 훨씬 경직된 채 작품과 작가를 대해왔다.

「행려풍속도병(行旅風俗圖屛)」 부분도.

「행려풍속도병()」 부분도. 조선시대 시조가객(調)을 묘사한 그림(김홍도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많지 않은 사설시조지만 이정보가 포착한 시정적 삶은 다양하고 활기차다. 온갖 금은보화로 여자를 유혹하려는 남정네, 님과의 인연을 이어달라고 부처님께 비는 절규하는 사람 등. 이들의 유혹과 기도는 절박하며, 그만큼 열정으로 충만해 있다. 때로 소설의 한 대목이 사설시조로 노래되기도 한다. 정태제의 『천군연의()』, 작자미상의 『숙향전()』, 『삼국지』 등. 이정보 사설시조에는 시정의 인물군상과 시정의 소설들이 함께 포착될 만큼 다양하다. 처음 사설시조를 짓기 시작한 사대부이면서도 그의 작품 폭은 넓고, 내용은 너무도 생동감 있다.
이정보가 이런 사설시조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일찍부터 사설시조를 접해왔기 때문이다. 사설시조 탄생은 오래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1728년 가객 김천택에 의해 수집된 전승 사설시조만도 무려 116수나 된다. 이정보 30대의 일이니, 그는 더 일찍부터 사설시조를 향유해 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설시조가 대개는 평민적 삶을 노래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정보 사설시조에 보이는 시정인들의 다양한 풍속도는 바로 그 이전부터 불려왔던 사설시조들의 시정모습과 아주 닮아있다. 이정보는 자기 당대에 불리고 있던 사설시조를 적극 즐기고, 그로부터 사설시조 장르가 가진 관심들을 배웠던 것이다. 지체 높은 사대부지만 이정보는 시정의 질탕한 삶을 노래한 사설시조 장르에 열려있었고, 그로부터 하층민 삶을 배우고 끝내는 창작으로까지 나아갔다.

사대부 음악가 이정보가 개척한 시적 경지

사설시조를 창작한다는 것은 오늘날 시를 짓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악곡을 이해해야 노랫말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45자 내외의 평시조와 달리 작품마다 길이가 다 다르기에 더욱 그러하다. 흔히 사설시조는 장단을 빠르게 진행시키면서 그 안에 많은 사설을 촘촘히 몰아 박아낸다고 한다. 그러나 사설을 촘촘히 박아내는 데에도 나름의 악곡적 규칙에 따라야만 가능하다. 따라서 이정보가 사설시조를 창작했다는 것은 바로 사설시조의 악곡적 원리에 따라 노랫말을 만들 줄 알았다는 의미이다.
사설시조의 '악곡과 노랫말' 사이의 관계는 어떠한가? 여기서 악곡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다. 다만 사설시조의 길이가 저마다 다르게 되는 원인, 곧 중장에 대해 한 가지만 이야기 하자. 사설시조는 초장과 종장을 놔두고 주로 중장을 자유로이 늘려 노랫말을 짓는다. 반자유 형식인 셈이다. 이 형식을 '평시조, 가사'와 비교하면 쉽게 판별이 된다. '평시조'는 4음보를 정확히 지켜야만 하고, '가사'는 아예 초·중·종장 개념이 없이 수십 수백 수천 음보 얼마든지 늘려간다. 그래서 평시조는 노래할 수 있지만, 가사는 너무 길어 몇몇 작품 외에는 거의 노래하지 못한다. 그에 비해 사설시조는 평시조와 동일하게 초장·중장·종장으로 되어 있으면서, 중장만은 초장·종장과 달리 하고 싶은 말을 적게는 10여 음보에서 많게는 20여 음보 이상으로 자유로이 늘려가며 노래가사를 지을 수 있다. 그리고 길어진 만큼 평시조보다 박자를 짧게 해서 빠르게 부르도록 한다.
따라서 사설시조는 중장의 늘어난 노랫말만큼 장단을 늘려가며 자유로이 곡을 짤 수 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흔히 가객들은 중장 부분에서 목 자랑, 즉 남이 못 내는 자기만의 예술성을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사설시조에서 중장은 음악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정보의 사설시조도 역시 중장에서 그만의 특색이 찾아질까?

님은 회양 금성의 오리나무 되고, 나는 삼사월 칡넝쿨 되어
그 나무에 그 칡이 납거미가 나비 감듯, 이리로 칭칭 저리로 칭칭, 외오 풀어 옳게 감아, 얽어져 풀어져, 밑부터 끝까지, 조금도 빈틈없이, 찬찬 굽이지게, 휘휘 감겨, 주야장상 뒤틀어져 감겨있어
동지섣달 바람비 눈서리를 아무리 맞은들 떨어질 줄 있으랴

님과 결코 이별하지 않겠다는 결심 한 가지를 표현하기 위해, 중장은 '나무-칡' '납거미-나비' 비유를 가져왔다. 그러나 중장의 핵심은 이 두 비유물에 있지 않고, 그 이후 얽힘의 모습을 일일이 열거하는데 있다. 중장이 길어진 것도 이 열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열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서로 얽혀 있는 적나라한 연인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단순한 비유와 나열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능적인 것으로 변해가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정보가 중장에서 이룩한 그만의 시적 경지는 성공적이다. 이정보가 발견한 시정의 사랑모습은 몸으로 뒤얽힌 관능적 사랑인데, 이정보는 이를 나열만으로도 충분히 도달해내는 시적 재능을 보였다.
중장을 늘려 개성을 표현하는 이 오래된 형식으로부터 이정보만의 새로운 변주를 좀더 뚜렷이 확인해보기 위해 이전의 전승 작품과 이정보의 작품을 나란히 놓아보기로 한다.

고대광실 나는 마다. 금의옥식()4) 더욱 마다.
은금 보화, 노비 전택, 비단치마, 대단[중국산 비단]장옷, 밀화주 곁칼5), 자줏빛 향직저고리, 딴머리, 석웅황()6) 모두 다 꿈자리 같고
진실로 나의 평생 원하기는 말 잘하고, 글 잘하고, 얼굴 깨끗하고, 잠자리 잘하는 젊은 서방이로다.
- 이정보 이전의 작품

생매[길들이지 않은 매] 같은 저 각씨님 남의 간장 그만 긋소.
돈을 주랴, 은을 주랴, 대단치마, 향직 당의()[예복], 항라 속것, 백능[흰 비단] 허리띠, 구름 같은 북도다래, 옥비녀, 죽절비녀, 은장도라 금패자루, 금장도라 밀화자루, 강남서 나오신 산호가지 자개, 천도청란 박은 순금 가락지, 석웅황 진주 당혜[비단신], 숙초혜[수놓은 신]를 주랴.
저 님아 일만 냥이 꿈자리라 꽃 같은 보조개에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천금일약()을 잠간 허락하여라.
- 이정보의 작품

앞 작품은 여성 화자, 뒷 작품은 남성 화자다. 화자는 다르지만 온갖 보화로 여성을 유혹하는 중장은 같다. 분명 이정보는 앞 사설시조의 어법을 알았던 것 같다. 시조에는 이렇게 먼저 형성된 어구나 어법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창작원리가 있다. 이때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것을 '공통어구'7)라고 한다. 이정보는 중장에 공통어구를 가져와 활용했다. 그런데 이 공통어구를 먼저 것보다 세 배나 늘렸다. 보화와 장신구가 값비싸고 구하기 힘든 것일수록 그리고 그 가짓수가 많아질수록, 남정네 마음은 타들어가고, 각씨님 진가는 높아진다.
중장을 다루는 솜씨가 곧 작가의 재능이다. 중장을 위와 같이 자유자재 다루기 위해서는 중장의 악곡원리를 알아야만 가능하다. 과연 이정보는 사설시조 창작이 가능할 만큼 사설시조 악곡을 잘 알았을까?
이정보는 문하에 수많은 남녀 명창들을 길러낸 노래선생이다. 만년에 관직을 떠난 후에는 아예 음악에만 전념하기도 했다. 한강변 학여울에 정자를 짓고 찾아든 가객들을 직접 가르치며 살았다. 그의 제자 중에서 계섬()의 노래 공부와 성공담은 유명하다. 계섬은 어려서부터 노래기생으로 활약해오다가, 다시 이정보 문하에 들어가 악보에 따라 수년간을 더 공부하고서야 드디어 '계낭조(調)'라는 자신만의 노래스타일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해서 장안 최고의 명창으로 거듭난다. 그녀의 명성은 전국에 알려지고, 지방의 노래기생들도 그녀에게 노래 배우기 위해 몰려드는 사태가 일어났다. 계섬은 유명한 가객 이세춘과 함께 활동하기도 한 인물이다. 이렇게 악보에 따라 체계적으로 성악을 교습하고, 명창을 배출했다는 것은 바로 이정보가 사대부 음악가였음 말한다.
그는 "많은 악보와 새로운 가사()"를 만든 인물이라고 한다. 악보는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새로운 가사는 각종 가집들에 수록되어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100여 수의 평시조와 사설시조가 바로 새로운 가사이다. 명창을 가르치고, 악보와 가사를 창작했으니, 이정보의 악곡에 대한 이해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다. 사설시조가 처음 나왔을 때, 사대부 중에서 그가 단연 선두에 나서서 창작활동을 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대부 음악가', 이런 상상은 우리에게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러나 18세기의 서평군, 심용8) 같은 사대부들은 음악에 조예가 깊어, 문하에 가객들을 거느리거나 공연기획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사대부들을 흔히 음악좌상객()이라 말한다. 그런데 이정보와 이들 음악좌상객의 차이는, 바로 그 창작에 있다. 이정보는 음악예능인들을 배출하는 한편 그 자신은 직접 악보와 가사를 만들며 새로운 음악세계를 창조했던 것이다.
'사대부 관료'와 '음악가', 우리는 이 둘 사이에는 큰 간격이 있어 한 사람이 이 모두를 하리라고는 좀체 생각지 못한다. 그러나 이정보에게 '고위 관료와 음악가'라는 경계는 달리 존재하지 않았다. 이정보가 보여준 것은 이 두 가지가 한 사람에게서 조화롭게 이루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솔직한 너무도 솔직한 노래들

이정보는 평시조·사설시조를 가리지 않고, 중국의 고사를 소재로 하는 많은 작품을 지었다. 사대부들이 중국고사를 통해 깨달음과 교훈을 노래하는 것은 매우 일반화된 태도이다. 이정보는 이런 종류의 작품들을 그 어떤 사대부들보다 많이 지었다는 특징이 있다.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불러내어 그에 빗대서 자기 삶을 반추하는 노래들, 이를 통해 그가 추구하는 사대부 삶의 참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이정보 사설시조 읽기의 또 다른 재미가 될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주로 '치국평천하'를 지향하는 관인 사대부가 지녀야 할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반성과 다짐들을 위해 중국의 고사가 논증자료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역사 속 인물과 마주하며 관인 사대부로써의 자기 삶을 성찰하던 이정보는 마침내 이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귀거래를 노래한다. 그런데 그의 귀거래 노래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대부의 모습을 하고 있어 우리를 뜨악하게 만든다.

대장부 공성신퇴(退) - 공을 이루고 물러남 - 하여, 임천()에 집을 짓고, 만권서 쌓아두고,
종 시켜 밭 갈리고, 보라매 길들이고, 천금준마 앞에 매고, 금잔에 술을 담고, 절대미인 곁에 두고, 벽오동 거문고에 남풍시() 노래하며, 태평연월에 취하여 누었으니
아마도 평생 하올 일은 이 뿐인가 하노라.

일반적인 사대부의 귀거래 시조들은 관직을 벗어난 후, 강호를 벗 삼아 유유자적하는 삶을 노래한다. 그런데 이정보의 귀거래에서 이에 근접하는 것은 초장뿐이다. 곧바로 이어지는 중장에는 만년을 얼마나 풍요롭게 지낼 것인지에 대한 내용들로 그득하다. 농사는 종을 시키고, 보라매 길들여 사냥하고, 천금준마를 집 앞에 매어두고, 술동이에 술을 가득 채우고, 곁에는 아름다운 여인을 두고,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하고 태평세월에 취하는 것, 이것을 최고의 생애로 꼽는다.
이렇게 화려한 귀거래를 노래한 사대부는 이정보가 처음일 것이다. 그에게는 그 흔한 안빈낙도니 자연 속 소박한 삶이니 하는 관습적 제스처조차 없다. 그의 귀거래는 그 욕망이 지나칠 만큼 구체적이고 원색적이어서 낯설 정도다. 더욱이 40년 관직생활동안 삭탈과 원격지 방출을 거듭하면서도 꼿꼿함으로 맞섰던 그의 이력을 떠올리면, 이 작품은 뜬금없는 선회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정보 작품의 진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내면과 정직하게 마주하고, 노래할 수 있는 솔직함. 이런 점에서 너무도 뻔한 중국 고사를 인용한 작품을 그토록 많이 지은 것이나, 화려한 귀향에의 꿈을 여과없이 드러낸 것은 모두 솔직함에 닮아 있다. 시정인들의 역동적 삶을 응시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솔직함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정보의 솔직함을 배워 아래 작품을 음미해보자.

일신이 살자 하니 물 것 겨워 못 견딜세.
피겨 같은 가랑이, 보리알 같은 수통이, 줄인 이, 갓 깬 이, 잔 벼룩, 굵은 벼룩, 강벼룩, 왜벼룩, 기는 놈 뛰는 놈에, 비파 같은 빈대 새끼, 사령 같은 등애아비, 각다귀, 버마재비, 흰 바퀴, 누런 바퀴, 바구미, 고자리, 볼이 뾰족한 모기, 다리 기다란 모기, 야윈 모기, 살진 모기, 그리마, 뾰록이, 주야로 빌 때 없이 물거니 쏘거니 뜯거니 심한 깽비리 여기서 어렵더라.
그 중에 차마 못 견딜손 오뉴월 복더위에 쉬파린가 하노라.

일신을 괴롭히는 물것들에 대한 노래이다. 길고 긴 중장은 단순히 물것들의 종류로만 채워져 있다. 이런 것도 노래가 될 수 있는가 의아해진다. 엄정한 대제학 출신 작품으로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작품은 민중을 괴롭히는 탐관오리배의 풍자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탐학한 관리라는 비유는 어디에 들어있는가? 물고, 쏘고, 뜯는 행위를 탐관의 행악질로 보는 것은, 늘상 모든 작품들에서 굉장한 의미를 찾으려 했던 우리들의 관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인간 누구나 꿈꾸는 물질적 부와 풍류로 가득한 귀거래를 이정보가 솔직히 노래하듯, 이 작품에서 최초로 만나는 의미를 말한다면 그래도 여전히 탐관들의 작태로 괴로워하는 민중의 모습으로 읽혀질까?
온갖 형상의 물것들, 이것들은 모두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아주 흔한 미물들일 뿐이다. 이 모두를 한자리에 늘어놓고, 그 형형색색 갖가지 물것들을 하나하나 주워섬기다 보니, 이 얼마나 많은가. 이 사실이 우리를 포복절도케 한다. 일상의 누추함이 흥취로 바뀌는 순간이다. 더욱이 이를 노래로 불렀으니, 그 재미는 더 야단스러웠을 것이다. 이렇게 읽는 것이 아무것에도 감염되지 않은 솔직함은 아닐런지.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사설시조를 제대로 감상하려면, 중장에 주목해야 한다고 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대개 중장에서 이루어지고, 중장은 정보량에 따라 얼마든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정 풍속도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예시한 두 작품, '중놈이' '물위에'로 시작하는 사설시조의 중장을 가지고, 이정보가 중장을 통해 시정풍속이라는 의미를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 설명해 보자.
이 작업을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순서로 작품해석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첫째, 중장의 핵심적인 의미를 찾아내고 둘째, 핵심적인 의미의 확장방법과 그 의미를 밝혀야 하며 셋째, 확장 속에 들어있는 시정인의 생활상을 이정보가 발견한 시정풍속도로 읽어내는 것 등이다. 이 작업이 끝났다면 중장에서 이정보의 시인적 탁월함도 함께 말해보자.

2. 이정보의 사설시조에는 여기서 다루지 못한 중국고사를 노래한 작품이 많다. 중국고사가 시에서 주로 사용되는 것은 역사적 인물을 통해 오늘을 위한 교훈을 얻고자 함에 있다. 그래서 그 방법은 첫째, 한 사건의 핵심 부분을 자세히 묘사하여 교훈되는 행위를 정확하게 노래하는 것이다. 둘째는 여러 고사의 예로 역사의 되풀이를 보여주어 교훈적인 내용을 강조하고 각인시키는 것이다. 사설시조는 일반적으로 중장의 확장을 통해 작가가 하고픈 말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형식 특성이 있다. 그렇다면 중국고사로 노래한 사설시조들은 초·중·종장 중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고사를 활용해 시로 완성하게 될지 생각해보자.

추천할 만한 텍스트

『해동가요』(시조학자료총서 2), 황순구 편, 한국시조학회, 1987.

각주

  • 1) 조선시대 관직인 대제학을 일컫는 말이다. 대제학은 홍문관과 예문관의 최고 벼슬로, 경전과 학문 그리고 임금의 각종 자문에 응하는 역할을 했다.
  • 2) 나무를 깍고 다듬는데 사용하는 연장을 말한다.
  • 3) '사망'은 '장사에 이익이 많이 남는 운수'라는 뜻의 순 우리말이고, '사망일게'는 '운수가 일어나도록'이라는 뜻이다.
  • 4) 비단 옷과 좋은 음식을 일컫는다.
  • 5) 밀화주는 보석의 일종이고, 곁칼은 여자들이 장식용으로 차던 작은 칼로 은장도가 많이 알려져 있다.
  • 6) 황색을 내는 최고급 물감 재료다.
  • 7) '공통어구'는 오랜 세월동안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상식이 된 어휘, 어법, 어구, 이미지들을 가리킨다. 예컨대 '추강(秋江)'이라는 어휘는 시조에서 거듭 사용되면서 '적막하고 조용한 강'을 나타내는 어휘가 되었다. 이제 적막하고 조용한 강을 나타날 때, 사람들은 '춘강(春江)', '하강(夏江)', '동강(冬江)'이라 하지 않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언제나 '추강'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는데, 이런 것을 공통어구라 한다. 공통어구는 공동의 자산으로 누구나 가져다 쓸 수 있는 시어(詩語)다.
  • 8) 서평군은 왕족출신이고, 심용은 사대부로 경남 합천고을의 원님 등을 지냈다. 두 사람 모두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