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체육/그때를 아십니까

[스크랩] 그 때를 아십니까?--먹거리

인서비1 2009. 9. 10. 07:10

지금 우리 자식들에게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때 생활상을 이야기 하면 이해가 잘 안 될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아버지 세대 때 생활상을 말슴 하시면 이해를 할 수 있다.그것은 우리나라 발전 속도 차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겪었던 생활상의 고통 들이야 더더욱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말씀을 들으면 그림이 그려지고 공감도 한다.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영도아래 새마을 운동과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주축으로 조국 근대화를 시켜 세계에서 최단기간에 최고로 발전시켜 한강의 기적이라 알려졌기에 우리 자식들은 불과 30년 전의 생활상을 이야기 하면 머릿속에 엉둥한 그림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 세대는 배고픔을 견뎌가며 일을 했고 우리 세대들 역시 잠을 주려가며 공업입국을 실천하여 두 세대가 오늘날의 OECD국가 반열에 오른 대한민국을 만든 것이다.

 

하루 세끼를 먹기 힘들었던 우리들의 아버지 세대.

우리가 어린 시절에도 친구들 중 20%정도는 하루 세기를 밥으로 먹지 못했다.

주로 점심은 고구마로 때우던가 아니면 저녁거리를 나누어 죽으로 먹던가 했었다.

하루 세끼 밥을 먹어도 커나는 우리들은 항상 배가 고팠다.지금 애들이야 밥 말고도 먹는 것이 너무 많아 오히려 밥 먹기를 귀찮아 할 정도지만 우린 오로지 밥 뿐이었으니까. 밥도 순전히 꽁보리 밥이었다.

우리집은 찢어지게 가난한 축에도 잘사는 축에도 안 드는 보통 수준은 됐다.

그런데도 밥은 항상 꽁보리 밥이었다.7남매가 소비하는 곡식의 양도 많았다.

그래도 전라도는 쌀보리를 먹었지만 경상도는 겉보리를 먹었었다고 한다.밭이 많고 논이 적은 경상도는 산악기후 영향인지 쌀보리보다는 겉보리가 잘 자랐나 보다.

 

우선 밥을 하기 전에 보리쌀을 앉혀 한 번 삶아 낸다.그 삶은 보리쌀은 둥그런 두껑이 있는 대바구니에 담아 마루 위 처마 밑에 걸어 놓는다.바람이 잘 통해 쉬지않게 하려는 지혜다. 그 보리쌀은 매끼니 밥을 할 때 사람 인원수에 맞게 그릇으로 푼 다음 솥에다 놓고 쌀 한줌을 가운데 올려 놓은 다음 밥을 짓는다.밥이 다 되면 가운데 쌀밥은 아버지 밥그릇과 장남 밥그릇,그리고 도시락(당시엔 일본말인 벤또라고 불렀다.)을 싼다.그래도 몇톨의 쌀이 남으면 자루가 길고 머리도 큰 나무 주걱으로 보리쌀과 함께 확 섞는다.그러고 모두에게 한그릇씩 퍼서 주는 것이다.물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에서는 두 분 밥상은 항상 하얀 쌀 밥을 드린다.생활 능력이 안되면 어쩔 수 없었지만 노인공경,효성이 지극하던 시절이라 다소 살림에 무리가 가더라도 나이드신 분들에겐 치아 문제도 있고 해서 쌀 밥을 드렸었다.그러면 할머니 할아버지는 반드시 밥을 남기신다.,배부르다하고 수저를 놓으시면 손자들이 금방 그 밥을 가져가 나눠 먹는다.당시 쌀밥은 워낙 먹기가 힘들어 씹지 않아도 넘어갔다. 손자,손녀들 먹으라고 일부러 남겨주신 할아버지,할머니 마음을 다 커서야 알았다.

제일 어른이신 할아버지,할머니, 가장이신 아버지,가문의 기둥이 될 장남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구성원이 된다.어머니는 자식들 때문에 항상 뒷전이었고 딸들은 어머니 뒷전이었으니 당시 딸로 태어나면 쌀 한말 먹고 시집가기 힘들다고 했다.유난히 딸들을 없신 여기는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자란 여자애들은 정말 못먹고 일만 죽도록 하다 겨우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기반 없는 집으로 시집가서 또 애들 키우느라 고생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친구들도 많다.

 

우리집은 그렇게 까지는 안했지만 살림이 넉넉치 못한 집에서는 보리쌀도 아까와서 밥을 할 때 고구마를 얹기도 하고 무우를 채를 썰어서 같이 삶아 주걱으로 섞어서 고구마 밥이나 무우밥을 먹기도 했다.우린 밥위에 고구마를 적당히 잘라 쪄 먹은 적은 있었다.그렇게 고구마를 삶으면 밥물이 들어가 훨씬 맛있다.강원도에서는 곤드레 나물을 넣어 곤드레 나물밥을 해 먹었단다.도시 빔민들은 미군부대에서 버리는 소시지,햄조각 또는 두부공장의 비지를 섞어서 삶은 일면 꿀꿀이 죽을 먹기도 했다.지금 말한 것은 주로 아침 식사였다.지금은 늦잠을 자느라 아침을 안먹는 경향도 많지만 그 때는 어른은 물론 애들까지도 아침식사 한 두 시간 전에 일어나 농사일을 하였고 아이들은 소를 몰고가 풀을 뜯게 매어 놓거나 토끼풀을 뜯어오기도 했고 꼴망태로 소가 먹을 풀을 한 망태 베다놓고 밥을 먹었다.그러니 아침 밥도 많이 먹게 되는 것이다.

아마 양식이 모자라 밥 대신 먹었던 이른바 구황식품이 요즘 웰빙 식품으로 환영 받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묵밥인 것같다.밥 알맹이는 몇개 안되고 묵이 훨씬 많은 묵밥,아예 묵을 국수처럼 얇게 썰어 국물을 부어 배고픔을 달래던 묵국수,물과 함께 허기를 달래려고 옥수수 가루를 묽게 한다음 구멍남 바가지를 통해 끓는 물에 떨어지게 함으로써 건데기가마치 올챙이 같다해서 '올챙이 국수'라 불리웠던 것도 강원도등 산간 지방에서 허기를 달래는 끼니거리였다.  

 

점심은 겨울에는 대개 삶은 고구마로 때운다.농번기 때는 농사일을 하느라 밥을 먹지만 그럴 형편이 못되는 집에서는 수제비등으로 간단히 때웠다.고구마에 무우순 김치를 감아 먹으면 꿀맛이었다,동치미 김치와 함께 먹는 고구마 맛도 괜챦았다.하여튼 쌀이나 보리쌀은 귀하니 김치를 잔뜩 담아 고구마나 김치로 배를 많이 채웠던 것같다.가끔은 먹을 사람은 네명인데 밥은 한그릇 밖에 없을 경우 김치를 잔뜩 썰어 큰 양푼이나 바가지에 비빈다.그러고 네명이서 배를 채우는 경우도 있었다.

 

여름 저녁이면 거의가 죽을 많이 먹었다.밀가루 음식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밥을 먹었겠지만 대개 어린애들은 밀가루 음식을 좋아하니 죽으로 때웠다.

밀가루 죽은 밀가루를 풀어 도배할 때 장판을 붙이는 용도로 쓰는 풀같이 끓이는 풀대죽이 있었고 흔히 아는 수제비,그리고 칼국수가 있었다.물론 손칼국수다.그 때는 잔치국수인 국수가락은 사와야 했기 때문에 비쌌기에 조금이라도 돈이 덜 들어가는 칼국수를 먹었던 것이다.인건비가 비싸져서 지금은 칼국수가 더 비싼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풀대죽.좀 나은 사람은 수제비.좀 더 낫게 사는 사람은 칼국수, 더 잘사는 사람은 칼국수에 팥이나 콩을 넣어 먹었다.맷돌로 간 콩을 넣어 끓인 콩죽은 정말 맛있었다.난 팥을 좋아해서 팥 칼국수를 아주 좋아 했으나 밭이 없는 우리집에서 팥칼국수를 쑤는 일이란 거의 없어 순천 아랫장에 가서 사먹는 것을 좋아했다.팥국수를 얻어 먹으러 십리길을 따라 다녔었다.그래서 지금 나이를 먹었음에도 팥칼국수,팥빙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물론 단팥빵,팥떡등도 좋아한다.

비오는 날 오후 낮잠을 잤는데 "밥먹고 학교가라"고 깨우는 소리에 벌떡 일어 났는데 차려준 끼니가 김치를 썰어넣고 끓인국밥이었다.학교를 가야 하기에 빨리 먹을려고 한숫갈 푹 떠서입으로 넣었다가뜨거워서 죽는 줄 알았다.아침 밥이 아닌 저녁 식사였는데 낮잠을 잔 나를 어머니와 누나가 짜고 놀렸던 것이다.누나에게만 온갖 짜증을 부리며 화풀이 했던 기억이 새롭다.김치국밥은 정말 뜨겁고 짜증난 식품이다.

 

하루 세끼를 다 챙겨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세계 인구의 30%에 불과하다고 한다.

60년대 우리나라 인구 대부분이 세계 인구의 70%에 속해 있었다.그래서 이웃집 에서 결혼식이나 환갑처럼 잔치를 한다거나 농경행사중 모내기나 타작처럼 큰 행사를 할 때면 이웃의 어머니들이 그 집 부엌일을 도와주고 식사 때면 자식새끼 모두를 데려가 배불리 먹인다.옛날 외국 기자가 굴뚝 뒤에서 아들 등을 두들기며 토하는 것을 도와주는 사진을 찍어 신문에 게재하고는 한국의 어머니들은 이웃집 잔치때 자식들을 불러 과식을 시킨후 토하면 또 멕인다.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설명을 달았다고 한다.배고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 기자에게는 이상하게 보였을 것이다.후덕한 부잣집에서는 이런 이웃들의 배고픔을 알고 잔치에 쓰일 음식보다 두 서너 배씩 더 장만하여 잔칫날 만이라도 동네 애들을 배불리 먹였었다.

동네 잔치도 잔치지만 가을이면 뒷동산의 유서 깊은 묘지에서는 시제를 지낸다.시양이라고 했었는데 문중이 다 모여 큰 노천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그 제사가 끝나면 차렷던 음식들을 자기네들끼리도 음복이라는 이름으로 나눠 먹지만 충분히 해 온 떡이나 음식을 구경꾼인 동네 어린이들에게 나눠 주었고 그 날은 고급 간식인 떡을 먹어볼수 있는 날이 되었다.

 

배가 고프면 반찬이 없어도 맛이 있다.해서 반찬에 신경 쓸 여유가 없던 집에서는 주로 간장,고추장,된장을 기본으로 젓갈류가 주된 반찬이었고 조금 형편이 나은 집은 된장에 박아둬 간이 들어간 장아찌가 있었다.물론 겨울에야 김장으로 담아둔 배추김치와 총각김치,물김치가 주된 반찬이었다.그 때는 별다른 반찬이 없을 뿐아니라 오로지 밥으로 배를 채우던 시기였고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더라도 김치와 함께 먹어야 했기에 지금보다 김장을 두세배 더 많이 했었다.식구가 많으니 큰 장독으로 너덧개씩 담아 뭍어 두기도 했고 대밭 아래 굴을 파서 보관하기도했다.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잔치 때나 명절 때 쓰기 위한 무우등 식자재는 주로 땅에다 뭍어 두었고 고구마는 방에다 발을 치고 보관했다.

 

여름에는 김치먹기도 힘들었다.김치를 담그는 고추도 귀했고 김치거리라 불리던

열무도 비쌌었다.해서 밭이 없던 우리집에서는 여름에 열무 김치 먹기조차 힘들

었다.어쩌다 아버지께 침을 맡으러 오는 안꼴 사람들은 그 대가로 김치 한 두 단

을 주고 가는데 그 때나 돼야 김치를 먹을 수가 있었다.빨간 고추를 절구로 절구

통에서 으깨서 담근 김치는 정말 맛이 있었는데 콩밭 사이에서 재배한 열무는 좀

매웠고 무명밭에서 재배한 무우는 덜 맵고 달았기에 무명밭 무우를 선호했다.

김치가 없을 때면 뒷뜰 텃밭에서 상추를 좀 뜯고 고추를 따서 장독대에서 갓 퍼온 된장을 숫가락총(숫사락 손잡이 부분)으로 찍어 쌈을 싸 먹거나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기도 했다.또 더워서 밥맛이 없으면 샘에서 갓길러 온 시원한 물에 말아서 된장 찍은 풋고추로 먹었다.멸치 젓갈에 잘게 썰은 풋고추를 넣고 비벼 먹어도 맛이 있었다.어머니께서 김치거리는 비싸서 못 사오고 고구마 대를 한 단 사오시면잎파리는 데쳐서 나물로 무쳐 비벼 먹기도 했고 고구마 대는 껍질을 대강 벗겨 김치를 담가 먹었는데 지금도 먹어보면 고구마대 김치는 맛이 있다.어쩌다 생기는 멸치나 고록(꼴뚜기 새끼)도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정말 맛이 좋았고 누런 물외(재래종 오이)도 깍아서 고추장을 발라 먹으면 밥 한그릇은 뚝딱이었다.사실 맨고추장이나 맨된장에 비벼 먹어도 다른 반찬이 생각나지않았고 장남인 형 준다고 사 놓은 옥수수 마가린 한조각을 뜨거운 밥에 넣고 왜간장(양조 간장을 그렇게 불렀음)을 넣어 비벼 먹으면 고소하며 미끈한 기름기가 있는게 정말정말 맛있었다.가지나물,호박나물,소불(부추),방앗잎등은 웬만하면 집주위 공터에다 길러서 자급자족 했다.돈이 참으로 귀했으니까

 

봄에는 모든 풀이 나물이었다.보리밭 사이나 아직 갈아엎지 않은 논에 나는 보리

벵이.달래,논두렁에 모여서 나는 쑥부쟁이,밥뿌쟁이,모내기 할 때 밑거름이 되라고

논에다 심어놓은 보라색 꽃이 피는 자운영의 어린 싹등은 말 그대로 들에서 나는

나물이었고 취나물,제비나물,드릅,엄나무 잎,오가피 잎등은 산에서 나는 나물이었

.모두 데쳐서 아까운 참기름 몇 방울 만 떵어뜨려 무치면 고유의 향이 좋은 봄

나물이 된다.어린 쑥은 국으로 끓여 먹고 담장의 가지나무 어린 싹은 나물도 해

먹지만 튀각을 만들어 두고두고 먹기도 했다.산에 풀 베러 갔다가 캐 온 도라지

는 잘 씻어 말렸다가 고추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었다.

감이나 물외는 된장에 박아두면 장아찌가 되어 사시사철 먹을 수 있었다.

모를 심기 위해 논을 갈아 엎으면 땅속에서 살던 우렁이가 많이 나온다.그것을 잡아다 살짝 데쳐서 큰 돌로 살살 껍질을 부숴 발라내고 초고추장으로 무쳐 놓으면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는 동물성 반찬이 되었고 술안주 핑계로 아버지께 주로 드렸지만 밥 반찬으로도 손색이 없었다.

 

삼시세끼 배불리 먹어도 커가는 어린이들은 간식을 먹어줘야 한다.세 끼 밥만 먹어서는 항상 배가 고프다.인간도 동물이기에 일단 배를 채울려는 본능이 있다.이는 곧 활동에 필요한 영양소를 공급하기위한 본능이다.그러기에 먹을 것만 있으면 우선먹고 봐야 했다.그래서 나름대로의 간식거리를 확보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른 봄에는 잔디 뿌리를 캐 먹는다.짠두박이라 불리는 풀의 부리인데 껍질을 벗기면 하얀 뿌리가 마디로 되어 길다랗게 나온다.그것을 씹으면 단 물이 많이 나온다.새 싹이 나면 찔레나무 줄기를 벗겨 먹는다.’찔구리라고 불르며 새로 나온 어린 새 줄기를 꺽어 껍질을 벗기고 먹으면 부드러우면서도 상큼한 향기가 좋다.

산에 가면 흐드러진 진달래 꽃을 따 먹는다.어른들이야 술담궈 먹는다지만 어린이들은 그자리에서 따서 먹는다.약간 상큼하면서 시큼한 끝부분이 맛이 진하지만 빨간 꽃잎은 덤덤하다.고추냉이를 캐서 뿌리를 씻어 먹는데 매우 맵다.또 쑥을 캐 와서 있는 집에서는 쌀가루를 없는 집에서는 밀가루를 버물러 쪄 먹는 쑥버무리기가 맛이 있다.괭이밥이라 하는 풀도 씹어먹으면 신맛이 나며 먹을만 하다.쉰 막걸리처럼 신 맛이 나서 술나무라고 하며 뜯어 먹었다.

봄철 간식은 뭐니뭐니 해도 삐비이다.삐비란 벼가 나올 때 어린 싹을 줄기속에 품고 있다가 늦여름에 밖으로 나와 익은 후 여물이 들듯이 풀이 씨를 만들기 위해 봄에 어린 꽃을 품게 되는데 가만히 두면 여름에 갈대꽃 처럼 피어나 씨를 만들어 종자를 퍼뜨릴 부분인데 그 부분을 뽑아 까보면 수염처럼 허여면서도 보드랍고 맛이 있다.

 

해가 긴 여름엔 더위에 지치고 먹을 것은 못먹으니 영양실조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학교 조회시간에 빈혈로 쓰러지는 친구가 생기고 영양실조 병인 소병도 생긴다.어렸을 적 부스럼이나 버짐이 많이 나는 이유도 영양 부족 때문이었다.

이른 여름엔 뭐니뭐니 해도 막 익어가는 보리를 구워 먹는 일이다.24절기중 망종에는 햇보리를 베어 구워 먹는 날로 아예 전통 풍습이 있다.얼굴에 검정을 묻혀가면서 열심히 구운 보리를 손바닥으로 비벼 껍질을 후후 불어 날리고 익고 벗겨진 보리 알맹이를 입으로 탁 털어 넣고 씹으면 왜그리 고소한지.맛에 흡족해 웃으면 이미 손바닥에서 입주위 볼로 전해진 검정은 스스로 거울을 봐도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여름엔 주로 주인 몰래 밭곡식에서 간식을 섭취한다. 우선 제일 맛있는 것이 무명밭에서 따먹는 다래이다.무명 실을 뽑는 목화나무를 전라도에서는 미영이라 했다.목화밭을 미영 밭이라 불렀던 것이다.그 어린 열매는 달콤하면서 부드러워 어느 과일 못지않게 맛있다.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져서 가장 어린 열매를 따 먹어야 맛있지 잘못하다간 이미 솜이 되려고 세어버린 열매를 따게 되는데 그것은 솜을 씹는 것 처럼 맛이 없다.밭에 보이는 오이나 가지도 주인 몰래 슬쩍 따서 먹었고 아직 여물이 채 들지 않은 고구마도 캐 먹었다.

꽁무니를 빨면 단맛이 나오는 사루비아 꽃도 심심풀이 간식 거리 였고 나락()이 품고 있는 아직 바깥세상을 보지 못한 어린 벼싹도 맛잇는 간식이었다.

하지만 어린 맘에도 쌀이 될 어린 벼싹은 아까와서 많이 먹지 못했다.

 

난 아버지가 내 아래아래 동생에게 간식으로 쪄 주던 빵 만드는 법을 어깨 너머로 배웠다.밀가루를 알미늄 도시락 통에다 당원과 소다(이스트)를 넣고 버무려 솥에다 물을 붓고 물 위에다 도시락을 띄워놓고 불을 때면 부풀어 도시락으로 하나 가득 빵이 만들어져 있다.당원은 설탕을 대신하여 하얀 백색가루로 판매를 하였는데 설탕가격이 비싸서 서민들은 당원을 주로 썼다.단 맛을 좋아하는 나는 정씨 어르신네 가서 물을 금방 떠 온 후 당원을 타서 마시면 시원한 냉차가 되었다.

이렇게 밀가루로 대강 만든 빵을 개떡이라고 했다.애들 간식용으로 가끔 어머니들이 큰 맘먹고 쪄주면 동네 애들에게 자랑하러 나갔다가 동네 형들이나 친구들의 감언 이설에 속아 다 뺏겨버리는 일이 허다했다.수단과 방법을 안가리고 먹겠다고 덤비는데야 주지 않고 배겨날 도리가 없던 것이다.

 

추석엔 송편을 설날엔 떡을 해 먹지만 정월 대보름에 찰밥을 먹는 것을 필두로 음력 매월 15일은 명절이다.그 때는 뭔가를 해 먹어야 했는데 가장 많이 세던 명절이 6월 유두와 7월 백중이다.이 두 명절은 여름에 있는데 주로 부침개를 해 먹었다. 파전도 해 먹고 부추전,호박전도 해 먹었지만 밀가루로만 부쳐 먹기도 했다.

7월 백중에 부쳐먹는 매운맛이 강렬한 고추전을 좋아했다.

그 때는 후라이팬도 없었고 가마솥 두껑을 뒤집어 놓고 호박 꼬다리로 콩기름을 골고루 뭍힌 후 밀가루 전을 부쳐 냈다.날씨도 더워 땀을 흘리면서 응달진 마당에 임시로 아궁이를 만들어 부침개를 부치던 젊었을 적 어머니 모습이 생생하다.

 

가을엔 먹을 것이 흔했다.여름 내내 강렬한 햇볕을 받아 익은 감,,대추 등 갖가지과일이 풍성했고 밭에는 고구마,달콤한 김장용 무우..맘만 먹으면 언제고 훔쳐 먹을 수 있었다.그래도 당시는 교육을 잘 받고 자라 남의 곡식에 손을 잘 대지 않았다.설익은 벼를 베다가 살짝 찐 후 말려서 껍질을 까면 올개쌀이 된다.올개심리라고 농사를 짓는 집이면 해먹는 풍습이 있었는데 곡식이 모자라 성급하게 미리 먹었던 것도 같고 벼가 익었나 덜 익었나 보기 위해 이를 테면 샘플을 추출했던 풍습 같기도 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한 게 올개쌀 이었다.수수열매를 따 낸수수깡의 부드러운 부분을 씹어도 단 맛이 나서 낮으로 대강 껍질을 벗긴 후 토막을 간식으로 갖고 다니며 씹었던 기억도 난다.사탕수수는 아니라도 일반적으로 수수대는 단 맛이 나나 보다.지금처럼 찰옥수수는 없었지만 누런 강냉이도 삶아 먹어 봤으면 하는 바램이 어린 시절 내내 있었으나 밭이 없었기에 한 번도 먹지 못했다.

 

겨울에는 긴긴 밤이 문제다.TV도 없던 시절이라 노동에 지친 부모님들은 일찍 주무셔야 했지만 또 늦게까지 있어 봤자 배만 고팠을 것이다.하지만 우리들은 공부를 한답시고 늦게까지 자지 않앗고 중,고등학교 다니는 형이나 누나가 있는 집에서는 불이 늦게 꺼졌다.대신 한창 때인지라 형들은 삶은 고구마를 동치미와 함께 먹기도 했고 삶으면 물고구마가 되는 살이 연한 고구마를 골라 깍아 먹기도 했다.

우리 어머니는 치아가 좋지않아 고구마나 무우를 숫가락으로 긁어서 드시는 것을 봤다.한 수저 얻어 먹으면 깍아 먹는 것보다 훨씬 시원하고 맛이 있었다.

우리집 뒷산에는 공동 묘지는 아니었지만 묘지가 모여있는 넓은 터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기계로 고구마를 삐져(잘라) 말려서 역전에 있는 보해 소주 공장에 소주 주정원료로 납품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묘지터 한 쪽에 임시로 움막을 지어놓고 한 사람이 지켰는데 터가 워낙 넓어 사각지대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우리는 적당히 말른 빼깽이라 불리는 고구마 편을 훔쳐다 그냥 먹기도하고 부모님 몰래 쪄 먹기도 했다. 훔치는 시기는 캄캄한 밤이나 비오는 날이 좋았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고구마를 잘라 바짝 말린 다음 보관을 하면 썩히지 않고오래 보관할 수가 있다. 그걸 쪄 먹으면 적당히 물기가들어가삶은 고구마처럼 맛이 나고 그냥 생채로 돌처럼 떡딱하지만 잘라서 입에 넣고 오래 침으로 불려 먹으면 그 또한 맛있다.훌륭한 간식인 셈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라면이라는 것은 내가 4학년 때 쯤에 나왔을 것이다.왈순마나 삼양라면이었는데 농심라면은 몇 년 뒤에 출시된 것으로 기억한다.우리가 라면을 먹는 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지금의 애들도 좋아 하지만 그 때 우리들도 라면 한 번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하지만 학용품도 제대로 못사는 처지에 군것질은 힘든 일이었고 라면을 삶아 먹는 다는 것은 동네 흉 거리가 되기도 했다.그렇게 귀했던 라면을 6학년때 재수생이던 백옥련이란 친구가 날 것으로 깨 먹다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찬물을 떠와서 거기다 불려 먹기도 하는 것을 보고 많이 부러워 했었다.라면이야 주식이지만 우리들이 먹는 과자로 나온게 라면땅이었다,손바닥만한 봉지에 라면을 구워서 넣은 것 같은 과자 라면땅도 정말 맛있는 과자였다.

그당시 우리들이 간식으로 사먹을 수 있는 과자는 몇 종류가 되지 않았다.

구멍가게인 전방에는 3~4단의 진열대 위에 상품을 진열했는데 맨 윗단에는 사탕류가 있었다.지금 술 담그는 병인 주둥이가 큰 뷰리병에 유과나 비과라고 씌여진 말랑말랑한 젤리형 사탕이나 오다마라고 불리운 큰 사탕.겉에 설탕으로범벅ㅇ 된 빨갛고 파란 색사탕이 담겨져 있었고 바브민트,쿨민트등 해태와 롯데에서 생산된 껌들이 반달모양의 진열대에 꼿혀 있었고 그 아래 에는 라면땅을 비롯한 몇종류 안되는 봉지 과자나 고무처럼 늘어나는 길다란 고무과자가 있었다.그 아래에 삼립빵등 방부제가 잔뜩 들어 갔을 법한 빵들이 있었다.지금이야 몇 개의 대형 제과점에서 만들지만 그 때는 가내 수공업으로 과자나 사탕을 만드는 곳이 많았다.생목 넘어 연탄공장 옆에도 과자 공장이 있었는데 동네 아가씨들이 한 달에 3천원씩 받고 일을 했었다.

 

지금처럼 부드러운 아이스 크림은 아예 없었고 얼음에 색을 넣고 단맛을 나게하여 손잡이 막대기를 달아 판매하는 아이스케키가 최고 였는데 내가 고학년때쯤 삼강 아맛나를 비롯 제과점에서 관리하는 얼음과자가 출시되기 시작했다.

아마 우리가 어렸을 때 가만히 있는 우리들의 입맛을 자극하는 소리 두 가지를 뽑는다면 엿장수 가위소리와 아이스 케키라고 리드미컬하게 외치는 소리였을 것이다.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신던 고무신이나 쓰던 대두병을 부모 몰래 갖다주고 엿을 바꿔 먹거나 아이스케키를 사 먹었을까? 그 때 아이스케키 장사조차 리어커를 끌고 다니면서 고무신이나 큰 병,심지어 장작까지 받으며 팔았다.

아마 그 때 도시에서는 저녁에 들리는 찹쌀~,메미~일묵하는 소리가 하나더 있었을 것이다. 또 냄새로 홀리는 것은 붕어빵집에서 빵 굽는 냄새였다.

 

돈은 물론 모든 것이 귀하던 시대.그 때가 우리 초등학교 시절이었다.지금 중국의 시골이나 필리핀의 시골에 가면 당시 우리가 살았던 환경과 비슷한 것같다.

모든 것이 귀하던 시대에는 물건들에 대한 소중한 가치를 알았었고 음식에 대해선 참 맛을 느낄 수가 있었다.들판의 풀이나 산속의 열매에 대한 진정한 맛도 느낄 수가 있었다.그러나 지금은 전혀 느끼지를 못한다,우리도 몰래 입맛은 변해 있어서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괭이밥을 먹어보면 도저히 먹을 수가 없다.

세상의 변화에 순응하는 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 하면서도 자연과 멀어진다는 왠지모를 불안함도 있다.

 

 

 

 

 

출처 : 이상규(청산거사)
글쓴이 : 청산거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