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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불화한 독수리 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인서비1 2018. 5. 31. 14:06
시대와 불화한 독수리-로자 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읽고 보다 

2015. 8. 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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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앞서 리뷰를 쓴 베른슈타인의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면 반박이 이 책,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약소국 폴란드인, 남성 혁명가들 사이에 낀 여성, 그리고 유대인, 또 장애인이었다. 이 모든 소수자의 정체성을 지닌 로자 룩셈부르크는 역설적이게도 평생 보편성을 위해 싸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자'였다. 그녀는 독어를 비롯한 6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였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의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다. 

그녀는 20세기 초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 '외로운 독수리'였으니, 독일 사민당에서는 수정주의의 '대세'와 맞서 싸웠고,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권위주의적 볼셰비키 당 노선으로부터 대중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싸웠다. 그녀의 최후는 비참했다. 독일 혁명 직후 우경화된 사민당이 집권하자, '스파르타쿠스 단' 봉기를 이끌다가 우익 용병들에게 체포되어 개머리판에 맞아 살해당하고 운하에 던져졌다.   

책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

 ​

"이 글의 제목을 처음 본 순간 놀랄지도 모른다.

사회 개혁이냐 아니면 혁명이냐?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사회 개혁에 반대할 수 있단 말인가? 또는 사회민주주의는 사회혁명, 즉 자신이 최종 목적으로 설정한 현존하는 질서의 전복을 사회 개혁에 대립시킬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 않다.  (.....)

사회 개혁과 사회혁명 사이에는 분리할 수 없는 연관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사회민주주의에서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은 수단이며, 사회혁명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제목이 마치 '개혁' 즉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를 거부하고 도꼬다이 '혁명'만 고수하자는 뜻으로 읽힐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로자는 개혁과 혁명은 둘 중 하나만 택하는 문제가 아닌 변증법적 관계라고 책 내내 강조한다. ​'소시지 뷔페'는 유명한 표현이다.

"법률 제정과 혁명은 뷔페에서 따뜻한 소시지나 차가운 소시지를 고르듯 역사의 뷔페에서 임의로 선택하는 역사 발전의 서로 다른 방법이 아니라, 계급 사회의 발전 가운데 나타나는 서로 다른 계기이다." ​

역사는 혁명을 거쳐 '입헌 질서'를 세운다. 그리고 입헌 질서 내에서 크고 작은 개혁이 또 진행되고 누적되는 바, 더 이상 부분적 개혁으로는 '수선'할 수 없을 정도로 시스템의 위기가 심각해질 때가 온다. 그러면 다시 혁명이 발발하여 새로운 입헌 질서를 세우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개혁과 혁명은 유기적이다. 베른슈타인과 수정주의자들의 문제는, '혁명'은 이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것으로 집어 던지고, '오로지' 개혁에만 매달리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혁운동마저도 불철저하게 만든다.

로자의 이론적 공헌은,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내용 즉 "자본주의는 여러 방편으로 '위기'를 해소하고 안정화된다. 붕괴는 없다"를 반박한 것이다. 로자는 그 시대(19세기 말-20세기 초)의 현실을 반영하면서 마르크스주의 틀 내에서 베른슈타인의 주장을 반박했다. ​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위기 종식의 조건이 되었던 바로 그 현상들로부터 생기는 결과이다. 언젠가세계시장이 전역에 형성되고 더 이상 돌발적인 확장을 통해 확대될 수 없다면, 조만간 생산력과 교환 관계 사이의 갈등이 시작되고 계속 반복되며 더 날카롭고 광란적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한 나라에서 완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비자본주의 지역'으로 자본이 진출해 새롭게 축적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비자본주의 지역은 한 나라 내부의 농촌 시골일수도, 해외의 식민지일 수도 있다. 이러한 해외 확장은 군국주의라는 움직임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나 비자본주의 지역도 '지구'라는 한계 안에 있다. 그 한계에 다다라 더 이상 확장이 불가능하다면? 돌려막기 하던 어음이 연쇄 부도나듯 자본주의의 누적된 모순이 폭발한다.  ​

"쓰디쓴 자본주의의 바다에 사회개량주의의 레모네이드 몇 병을 넣어 자본주의의 바다를 사회주의의 단물로 바꾸겠다는 베른슈타인의 생각은 더욱 어리석은 것이며 머리카락 한 올만큼도 덜 공상적이지 않다."

베른슈타인 오래 살겠다......

베른슈타인은 주식회사의 수많은 주주들, 노동자들의 '쪽수'로 획득해낸 의회 입법 등을 근거로 자본주의 생산 관계는 '실질적으로' 사회화되었다고 본다. 사회민주당이 의회 집권에 성공하면 사회주의로의 '소유권 이전'은 손바닥 뒤집듯, '문명화된' 방식으로 이뤄질 거라고 본다. ​로자가 보기에 베른슈타인의 낙관은 전혀 비현실적이다. 생산의 사회화와 소유의 배타적 독점은 그 어느 시대보다 더 첨예하게 대립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 관계는 점점 더 사회주의적인 것에 접근한다. 그러나 이에 반해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법적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에 더 높은 벽을 세운다. (...) 이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오로지 혁명의 망치질, 즉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것뿐이다."

(이 리뷰를 쓰기 전 벌어진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에서, 신격호 회장이 연매출 80조의 롯데그룹을 쥐고 흔드는데 필요한 자기 지분은 '0.05%'다. 0.5%도 아니고 0.05%!! 사회적 자산이기도 한 롯데그룹은 고작 지분 1만분의 5를 쥔 개인의 '소유물'이 된다. 법과 제도는 그 소유관계를 단단히 해줄 뿐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운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주주의 발전의 운명이 사회주의 운동에 연결되어 있다."

베른슈타인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즉 대의민주제를 통해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면, 로자는 사회혁명을 북극성처럼 뚜렷한 목표로 갖고 있는 사회주의 운동이 있어야 대의민주제도 제대로 운영된다고 본다. 로자에게 선거와 의회는 대중의 계급의식을 높인다는 목표 하에서 꼭 필요한 공간이다. 나중에 레닌으로 가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아예 없애 버린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제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고 그런 민주주의는 '필요치 않다.'

결코 주류가 될 수 없었던 로자는 실패한 것일까, 아니면 자본주의에의 굴복과 사회주의의 독재 사이에 난 급진적 민주주의의 길을 외롭게 걸어갔던 것일까. 확실한 건, 마르크스 이래 로자만큼 시대와 불화한 '비판적 정신'은 드물었다는 것이다. ​